나는 평발이다. 30분 걷는다고 평발이라서 불편하지 않다. 그런데 영국 가서 하루에 2만 보 걸으면 그때부턴 발을 잘라버리고 싶게 아프다. 그래서 항상 평발 깔창이 있는 운동화를 신는다. 2만 보 걸으면 깔창이고 뭐고 죽을 맛이다. 그냥 그렇게 걸을 능력이 없다.
나는 ADHD인이다. 장점도 있기 때문에, 살만 하다. 하지만 우울증이 찾아오면 확 상태가 안 좋은 걸 체감한다. 그래서 2012년부터 지금까지, 힘들면 바로 전문가를 찾는 것에 익숙하다. 도움을 잘 구할 줄 안다. 그런데 안 그래도 ADHD 때문에 가진 능력의 70%도 못 발휘하는 거 같은데, 우울증이 겹치면 30% 이하로 떨어지는 것 같다.
방금 전, 보통 사람들은 4개의 배터리가 장착된 기계처럼 살아간다면, 우울증 환자들은 1개 가지고 살아가는 거라고 비유한 댓글을 봤다. 굉장히 괜찮은 비유라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ADHD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해도, 우울증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데엔 심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과거 무지한 사람들로 인해, 화나게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어차피 모를 사람은, 영원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말해도 소용없다'하는 무기력감이 다년간 쌓였다. 가장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약 먹으면 안 좋다'라고 말해서, 나는 진작 작년 여름에 병원에 갔어야 하는데, 과거에 겪은 약 부작용 때문에 가기 싫어서 안 가다가 죽다 살아났다며 정말 욱해서 뭐라 한 적이 있다. 살면서 몇 명에게 욱했는지 모르겠다. 그 누구라도 누르면 작살 나는 욱해서 손절 버튼이다. 그 어떤 상사, 고용주, 높은 사람이 와도 이 '정신과 무지함 드러내기' 버튼을 누르면 인정사정없을 거 같다. (실제로 다 이거였던 거 같다.. 뭐. 사람에겐 누구나 발작 버튼이 있다.)
가르치는 10대 학생이면 가능해도, 20대가 넘도록 정신과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나랑 대화를 하면 할수록 다른 부분에서도 더 열받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우울증 얘기하기가 싫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가진 '우울증 다루기' 이야기가 귀하다는 걸 안다. 약 부작용도 겪어봤고, 5년 먹던 약을 끊어도 봤다. 약을 안 끊었으면 그 많은 약을 어찌 영국에 다 가져갔겠나. 2015년 가을부터 2020년까지 먹고, 2021년부터 2024년까지는 비상약만 가지고 있었다.
안 먹고 싶어서 버티다가 죽다 살아나도 봤고, 올해 1-2월엔 다시 먹고 날아다니는 경험도 했다. 나는 계절성 우울증이 심해서, 3월 되고 날씨가 좋아지니 이제 안 먹어도 될 거 같아서 끊었다. 그렇게 우울증 약은 감기약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약을 끊었다고 해서, 완전히 나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늘 잔존해 있다는 걸 알았다.
지난 6월 중순부터 스멀스멀 그 우울증 잔존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는 약을 다시 먹고 있다. 최소 일주일은 먹어야 효과가 나기 시작하고, 2주 정도 되어야 된다. 감기 약과 다르게 한 번 먹었다고 바로 좋은 게 아니다. (이걸 모른다고 욱하진 않아요.. 친절하게 다 설명해 줄 수 있다.)
얘기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이건 그만큼 내가 강하다는 증거도 되기 때문이다. 외국은 치료를 받았다는 거 자체가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증거로 제출된다. 난 내가 ADHD와 우울증을 같이 가지고도 많은 것을 이뤄냈다는 사실이 이력서 특이사항에 적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우울증은 극복하고, 고치는 개념이 아니라 '다루는' 개념이다. 지금 좀 괜찮아졌다가, 언제 다시 나빠질지 모르는 것의 반복이다. 평생 관리해야 하는 당뇨와 같다.
그 '다루기'에 고수는 아니어도, 중수 정도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