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발작
이 글을 쓰는 것이, 걔가 설령 마음이 움직일랑 말랑했다해도 완전히 도망가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도대체 너의 ADHD 약점이 뭐야. 내가 보기엔 장점만 많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글이 답이 된다. 걔에 대한 걸 다 말한 거 같은데, 언급한 적 없는 에피소드다.
작년 6월에, 친구가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 더 이상 들으면 내가 정말 얘를 말로 죽여놓겠다 싶어서 얼른 차단을 눌렀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왜 화가 났었는지 설명하긴 어렵다. 나는 몇 년이 지났던 방금 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심박수 증가, 온몸 떨림과 같은 신체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내가 할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빨리 차단을 눌러야된다는 생각에 정말 다급했었다. 그당시만 해도, 차단을 풀고 욕하고 풀고 욕하고 반복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카톡 시스템이 한 번 차단을 하고 풀면 상대방에게 먼저 메세지를 보내지 못하지만, 그땐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차단하고도 엄청 씨름해야했다. 그렇게 차단 버튼 누르는데 성공해도, 상대방에게 문자로 욕하든 인스타 디엠으로 욕하든 그 분출이, 정말 막아지지 않을 수 있다.
영국에도 그 분노 조절을 도와주는 비상 약을 가지고 갔었다. 그 당시에, 비상 약을 먹고 아주 부들부들 거리면서 참았던 기억이 난다. 이게 걔가 ADHD를 이긴 가장 큰 에피소드다. 지금 여기서 증상 나타나면, 그게 걔 귀에 그대로 들어갈테니까.
내가 그렇게 쌍욕을 보내서 카톡 캡쳐라도 해서 전달이 되면, 얼마나 인성 쓰레기로 기억되겠나. 당시에도 이미 신찬성에게 차단 당한지 6개월이나 지난 때였는데, 그래도 그게 작동했다.
결과적으론 잘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작년 12월에 학교 졸업식 갔을 때, 인사 차원에서 그 친구에게도 졸업 축하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건 1000% 걔 덕이다. 걔가 아니었으면 나는 쌍욕을 퍼부었을 것이고, 그 좋았던 추억들마저 아주 얼룩이 졌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비 ADHD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지하철에서 설사를 틀어막는 수준이다. 그런 '소중한 사람에게 느낀 서운함, 서러움, 슬픔에서 비롯된 분노'는 누가 칼로 찔렀는데 아무 소리도 못 내게 입을 틀어막힌 수준에 가깝다.
그 당시에도 '내가 얘를 얼마나 사랑하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나에게 그래도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래선 안 된다' 같은 사고가 절대로 불가하다. 옆에서 누가 봤다면, 이미 몸만 봐도 벌벌 떠는 게 정상이 아니다. 그동안 ADHD에 대한 게시글을 넘치게 썼던 그 깊은 내막에는, 가장 큰 문제인 이것이 있다.
내가 가족에게만 보인 분노는 감히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다. 작년까지도 공공 장소에서 비명을 질렀다. 바퀴벌레 보면 나올 만한 비명이 한 몇 분 동안 지속된다고 보면 된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 같은 상태다.
대학교 레슨 선생님에게 쌍욕을 한 백개 이상 보낸 적도 있다. 딱 그럴 뻔 한 걸 걔가 막은 거다. 소중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화'에 그친다. 그 사람도 가장 좋아하던 선생님이었고, 부모는 소중하지 않아서 그랬겠나. 내가 사랑한 만큼, 기대한 만큼, 나를 안아주길 바랐던 만큼 분노가 폭발한다. 나를 이해해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카톡으로 사람을 죽여놓곤 했다.
이 상황에서 카톡이 아닌 전화만 했어도, 상대방이 느꼈을 나의 분노는 1/100 수준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상담 선생님도 방금 전까지 카톡으로 와다다 분노를 표출하던 내가, 온라인 줌 상담을 딱 켰는데 시작부터 방긋방긋해서 '에? 생각보다 괜찮네?'하신 경우가 많았다. 상담에서, 사실 내가 바란 건 그냥 나를 이해하고 안아주는 거였는데, 그렇게 표현 되면 상대방이 어떻게 아냐고 했다.
그런데 작년에 영국 오빠를 알게 된 이후로, 난 애초에 그렇게 분노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만 만나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영국 오빠는 내가 키보드 워리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연이가 그러면 다 이유가 있는 거 겠지'하는 마음이 장착되어 있었다.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그게 '공격'이 아니라, 그냥 지금 당장 감정 표출이란 걸 안다.
수없이 '나는 모든 슬픔, 서운함, 서러움의 감정이 모두 분노로 빠진다. 이 감정을 해체해야한다' 훈련을 해도, 계속 그렇게 분노로 빠지는 걸 막지 못하겠다. 그냥 영국 오빠처럼 상대방들이 '얘가 나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만 분노 표출이구나.'라고 알았으면 좋겠다.
이게 나의 가장 큰 아픔이고, 가장 큰 증상이다.
후에 병원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것도 공황 발작의 일종이라고 한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온몸이 달달 떨리고, 스스로 절대 통제할 수 없을 거 같고, 지금 있는 이 공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정말 누가 살려줬으면 하는 상태다. 되게 아픈 상태다.
그런 상태에 있던 나에게 상대방이 욕을 하면 나는 그 사람과는 깨진 그릇이 된다. 나는 완전히 아픈 상태에서 나온 증상인데, 상대방은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나에게 욕을 했다는 생각에 용서할 수가 없다. (물론 상대방들이 사과한 적도 없어서 그런 거 같다.)
정말 슬픈 비유이지만, 내가 틱 장애가 있어서 계속 고개를 내 의지대로 가누지 못하고 친 건데, 옆 사람이 "왜 쳐 이 개새끼야"라고 한 느낌이다. 난 이 비유를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아무 말 없이 차단 당한 상대방들은 그런 내막을 모르니, 황당하고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아무 말을 안 하고 차단하는 거 이상으로는 도저히 못 하겠다. 엄청난 훈련의 산물이다.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정말 큰 분노에선, 오타 때문에 무슨 말 하는지 아무 것도 못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서 난 더더욱, 이 정도로 오타가 다 나는데 내가 이성을 잃은 상태라는 걸 상대방들이 당연히 알아주길 바랐다.
처음부터 화가 나지 않아야 한다. 일단 화가 난 상태면, 차단 누르는 게 정말 최선이기 때문이다. 나의 바닥이, 증상이, 그 감정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아야한다는 걸 알아서 그토록 붙잡고 있었던 거 같다.
문제는 내가 걔를 가족으로 봤다. 부모의 분신으로 느끼고 있다. 가족에게 느낀 애증과 걔에게 느끼는 애증이.. 물론 가족이 더 크지만 걔도 만만치않다. 그럼 걔도 이 위험에 노출 된다. 이거 뭐 트와일라잇도 아니고, 나는 뱀파이어도 아닌데, 나를 좋다고 한 적도 없는데, 문득 이 생각이 드니 처음으로 걔를 위해서라도 걔가 도망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심이었다. 다 내 이기심이었다. 나를 위해서 필요했던 거다. 도저히 아빠랑은 이게 안 될 거 같으니까, 분신인 걔는 되는 모습을 보고싶었던 거다. 이미 걔한테 내가 막 분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그 씨앗을 봤기 때문이다. 걔가 마지막에 지금 니가 하는 말이 얼마나 역겨운 줄 아느냐까지 했는데 (어후 괜히 생각했다. 오랜만이다.) 그때마다 심장이 쫙 찢어지는 느낌만 날 뿐, 화나지 않는다.
언제는 내가 상처 받아서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상처였다고 카톡으로 말했을 때, 걔는 바로 사과했다. 그래서 "오잉"하고 순간 누그러졌다. 빠른 사과하는 사람은 내가 그렇게 분노하게 하지 않는다. 부모가 그게 됐으면 평생 내 버튼을 안 눌렀다. 그런데 걔는 그게 되는 걸 봤다. 이런 마음으로 붙잡고 있던 거 같아서 미안하다.
걔를 생각해서 분노 조절이 되는 그 기적 같은 걸 봤고, 걔도 곧바로 사과해서 분노로 향하지가 않는 걸 봤다. 내가 보기엔 걔는 나의 ADHD 약점을 그다지 본 것도 없는데, 그게 표면적인 이유였건 진심이었건 걔는 나의 감정 표출을 내세워 손절했다. '지가 지 감정 컨트롤이 안 되어서 그런 거다. 지도 의지와 다르게 자꾸 개입하게 되니까 짜증난 거다.' 등은 나의 해석이 들어간 거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른다.
여행 와서 울면서 이런 글을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오늘 학교에 다녀와서 용기가 났을 수 있다. 지금 아니면 발행하지 못할 거 같아서 힘내서 쓰는 글이다. 하늘이 나를 안 재우고 글 쓰게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몸에 박혀있던 가시 하나를 빼는 작업 같다. 다 감당 가능하니, 내 안에서 소화가 됐으니 글로 나올 수 있다.
원래도 간 상태였지만, 아주 가라. 가뜩이나 태어나 연애가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 너인데, 그냥 비 ADHD인 만나서 평온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니는 그럴 자격이 있다. 오 주여. 가수가 제목 따라 간다고 전에도 말했는데, '그동안 수고했어'가 곧 발매되어서 이러나보다. 세상에. 아주 가라. 미안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 갑자기 개똥벌레 노래 가사인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말아라. 나를 위해 한 번만'하는 노래가 머리에 울렸다. 이거 진짜 진짜 남자가 할 법한 대사 같은데,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는데요.
본머스 호텔에 누워있어서 슬프다. 소튼 호텔이었으면 당장 나가서 밖에서 울었다. 아. 그러지 말라고 하늘이 나를 본머스 호텔을 잡게 했나보다. 추운 밤에 그건 좀 처량하다. 머릿 속에서만 웨스트키 앞에서 오빠.. 오빠 하고 있다.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는데'라는 말은 소화시키고 자는데 꽤나 시간이 걸릴 거 같다. 나는 '사무친다'라는 영어에는 없는 이 단어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