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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by 이가연

이번주엔 봉사를 월, 수, 목으로 가게 되었다. 원래는 수요일마다 갔는데, 내가 요청하여 이번주엔 월요일도 갔다. 그러곤 오늘 수업 이후로 또 하고싶어서 내일도 가게 되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봉사 가기 즐겁게 만들까.


남들은 쉽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밖에서 10분만 걸어도 땀이 삐질삐질 나는데, 가뜩이나 우울증 약도 다시 먹고, 오늘은 심지어 아침부터 약 부작용에도 시달렸는데, 봉사 갈 기력이 날까 싶을 수 있다.


일단 수업하는 자체가 즐겁고, 아이들 만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원래도 그랬다. 특히 지금 시기에 봉사가 매우 즐거운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세상에 쓰임이 된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계속 거절의 연속이었다. 취준생은 한 번 취업이 되면 끝인데, 나는 한 번 공연팀 합격이 되어도, 거의 일회성에 그치기 때문에 계속 지원해야 한다. '공연'은 내가 사랑하는 일이니 기꺼이 감당한다해도, 심할 정도로 날 안 뽑아준다.


정기적으로 돈 버는 일은 몇 달 전부터 거의 포기 상태다. 간간히 잡코리아를 둘러보아도, 도무지 한국에는 내 능력이 제대로 쓰일 만한 일자리가 없고 해외 나가야할 것 같다. 그렇지만 레슨이나 의뢰가 들어온다면 얼마든지 할 의향이 있다. 유튜브, 블로그를 보고 얼마든지 의뢰가 들어올 수 있지만, 절대 없다. '세상이 나를 필요로하지 않는 것 같다'는 감각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봉사처에서는 한 명 한 명의 봉사자가 소중하다.


오늘도 봉사 1시간만 다녀오고 집에서 내내 혼자 있다. 아파서 봉사를 못 갔던 주에는, 일주일 동안 대면해서 말한 사람이 엄마랑 동생밖에 없던 때도 있었다. 영국인 친구와 주말에 영상 통화를 하고, 외국어 수업도 듣지만 그건 비대면이다. 그러니 봉사 가서 선생님들과 오며가며 인사하고 아이 만나는 시간이 행복하다.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지난 1년 동안 누굴 만나려고 노력만 하면 다 싫은 말과 행동들을 해서, 인간 혐오만 잔뜩 생겼다. 그런데 봉사처는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줄 가능성이 확 낮아진다. 물론 스트레스 주는 봉사처도 많이 봤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잘 맞는 봉사처를 만났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인간이 정말 좋고 만나고 싶은데, 동시에 인간이 너무 싫고 힘들다는 이 딜레마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정말 봉사 활동만이 답이었다. 봉사처가 봉사자에게 불친절하면 그게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단 1시간일지라도 오늘 하루도 누군가에게 쓰임이 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어 감사하다. 그러니 나는 비단 학생의 점수를 살리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살리는 것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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