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외국인 친구들이 있으니

by 이가연

일본인 언니들을 만나고 오니, 역시 '또래 친구 필요 없어..' 싶다. 10년째 친구인 일본인 언니가 있고, 그 언니가 친구를 종종 한국에 데려온다. 오늘도 언니와 처음 만나는 언니, 셋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어도 조금 할 줄 알아서 가르쳐주었다.

언니들은 나를 너무 귀여워해준다. 연애를 하지 않는 이상, 언제 이런 귀여움을 받아보겠나. 너무 행복했다. 내가 파스타를 포크로 찍어서 그냥 먹는데도 귀엽다 하고, 밥 다 먹고 졸려서 눈 쪼그맣게 뜨고 멍 때리니 귀엽다 하고, 좀 눈 동그랗게만 떠도 귀엽다고 "카와이이"하니 내가 진짜 귀여워진 기분이었다. 사람이 귀엽다 귀엽다 말을 계속 들으면, 자기가 귀여운 줄 알고 더 귀여운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20대는 주로 대화 주제가 연애다. 오늘 연애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안 했다. 한국은 미혼 여자가 연애를 안 하고 있으면 주변에서 더 난리다. 원래 이게 맞는데, 20대 초중반은 또래 20대 애들이랑 얘기하느라 연애를 안 하면 무슨 젊음의 큰 낭비라는 인식을 가졌던 거 같다. 올해 내가 바로 세워진 가치관 변화들을 볼 때, 더더욱 앞으로 한국인 또래 친구는 없을 것이다. 원래도 한국인이랑 가치관이 안 맞고 너무 싫어서 떠난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오늘 처음 만난 언니만 봐도, 나에게 보자마자 나이를 묻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나이, 사는 곳, 뭐 하는 사람인지 안 물어보는 한국인은 5% 미만이다. 질문에 대한 혐오감이 너무 심해서 이제 진짜로 새로운 사람을 못 만날 거 같다. 혐오감이 좀 내려가면 만나러 나갔다가 다시 혐오감 채워오기를 무한 반복하는 한국에서 하루하루였다. 언제쯤 진짜로 아무도 안 만날까 나도 궁금하다. 일본인은 처음 만난 사람이 불편해본 적이 없다.

오늘은 오히려 하도 나를 애기처럼 귀여워해주길래 "아니! 나 애기 아니에요! 나이 별로 안 많아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라고 내가 먼저 물어봤다. 40살이라고 하길래, "그럼 애로 보일 수 있지..." 했다.

언니 둘 다 40대 미혼이고, 한국 놀러 오는 게 제일 큰 취미 생활이자 관심사로 보인다. 원래 알던 언니는 11월에 또 온다고 한다.

난 사람과 이야기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연애를 해도 그거만 하면 되지 싶다. 내가 누군가를 못 놓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 하루에 두세 시간씩 전화했다. 걔는 미처 몰랐겠지. 내가 매일 두세 시간씩 통화할 수 있는 한국인 남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내가 만들었다... '아무리 만나도 여자고 남자고 다 싫은데 너만 좋아'니까 이러는 거다.

외국어로 얘기할 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외국인들이 한국인과 다르게 불편한 이야기를 안 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당연히 지금 친구 중에 한국어로 영국 오빠랑 얘기하는 게 제일 좋다.

일본어나 영어 하면 되니 늘 감사하고 있다. 이 정도면 진짜 은둔 청년 아닌가 싶어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그 기준에 속하려면 가족도 친구도 교류가 거의 없어야 된다. 그런데 나는 가까이엔 가족이, 멀리는 친구들이 다 있다.

한국에는 지인이 50대 선생님들, 어른들만 있다. 그래서 같이 카페는 갈 수 있어도, 술은 마시지 못한다. 한국에서 술 마시는 건 일본인 언니나 영국 오빠가 올 때만 가능하다. 술이 아니라 펍에서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거라, 이번에 영국 가는 것도 사실상 한국에서 펍 갈 친구 한 명만 있었어도 갈 필요가 없다.

내가 영국 일 년에 두 번 가고, 영국 오빠도 일 년에 두 번 한국 올 예정이다. 일본인 언니는 일 년에 네 번은 한국 오니 그다지 '고립 은둔 청년'은 아닐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결핍을 채워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