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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Jan 14. 2024

#15 천재 싱어송라이터는 아니라서

1월 둘째 주 짧은 글

크리스마스 끝

이곳 크리스마스는 11월 중순에 시작해서 1월 2일에 끝났다. 도심에 크리스마스 마켓들이 줄줄이 철거되는 모습을 보니 남은 겨울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 싶기도 했다. 11월부터 일몰 시각이 날이 갈수록 빨라지는 걸 느끼며 점점 슬퍼졌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마켓이 문 연 모습에 해 진 저녁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밤을 버티게 해 줬다.



감정 이입

울고 싶은데 행복한 노래를 부르는 게 어려울까, 아니면 슬픈 노래를 적당히만 몰입해서 울지 않고 부르는 게 더 어려울까. 또한 노래에 너무 몰입하여 울어버리는 것과 울까 봐 전혀 집중하지 않고 감동이라곤 느껴지지 않게 부르는 것 중에 뭐가 더 프로답지 않은가. 차라리 울자. 무대 위에서 아무리 울어도 길어야 몇 초다. 그 몇 초 운다고 프로 정신이 부족하다고 할 사람 없다. 백 번 가까이 공연 중 눈물을 보인 경우는 단 한 번,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발인날이었다. 나 자신도, 내 경험도, 내 실력도 전부 믿는다.



감정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출하면 그것은 혼잣말, 수다 내지는 일기다. 감정을 정돈하여 표현하면 노랫말과 예술이 된다. 그런데 이따금 감정을 날 것 그대로 꺼낸 것 같은데 예술이 될 때도 있다.



가짜

대다수 관객들은 내 노래에 별로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가사를 티 나게 틀리거나 음이탈이 나지 않는 이상 무대에서 무언가 문제 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안다.



대도시 쥐

가끔은 유학이 아니라 유배를 온 기분이다. 걸어서 강남역 가던 내가 쇼핑몰 하나, 영화관 두 개 있는 쥐똥만 한 도시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나가서 딱히 할 게 없는 덕분에 연습실에 더 자주 가고 강의 복습도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런던에 살았으면 얼마나 유혹거리가 많고 더 많은 돈을 썼을까 싶다.


아니다. 난 정말 대도시 쥐다.



천재 싱어송라이터는 아니라서

천재 싱어송라이터는 아니라서 가만히 앉아 녹음기만 켰는데 1절 가사와 멜로디가 동시에 술술 나오는 경험이 자주 있지 않다. 소위 그분이 오신 날이다. 번개 정도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연애 도사가 되기보다 계속 이렇게 때론 바보 같이 살면서 또 다른 바보들을 위한 많은 곡을 쓰겠다.

곡 탄생 유무와 관계없이 나를 성장시키는데 거름이 되어준 많은 인연에 감사해야 맞다. 그러나 곡을 쓰게 해 준 사람이라면 특별히 더 감사하다. 부작용은 과거 미화.



런던병 치유는 본머스에서

런던에 자주 가지도 않으면서 '런던에 학교 갈 걸'이라는 생각을 근래 들어 자주 하는 이유가 사람들 때문이란 걸 안다. 마치 그 순간엔 영원할 줄 알았던, 아니 영원까진 아니더라도 앞으로 1년은 함께 웃고 즐거울 줄 알았던 사람들.


흔히 사람들은 너무 빨리 친해진 사람들은 그만큼 빨리 식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절친도 똑같이 빠르게 친해졌다. 그 사람들은 가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 관계 괜찮을까 고민해야 했고 이 친구는 한순간도 우리의 관계가 고민되거나 문제를 느껴본 적이 없다. 빨리 친해진 게 잘못이 아니라 그저 나와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런던이 아닌 사우스햄튼을 선택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장점은, 바닷가가 가깝다는 거다. 공교롭게도 이 친구가 그 바닷가에 산다. 지금도 아침에 날씨가 너무 좋아 무작정 찾은 바닷가에서 친구 기다리며 글을 쓰고 있다.

바닷가에 앉아서 "나와"하면 나오는 친구가 있다니 난 여전히 복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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