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도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한다.
나는 보수적인 지방의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진 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2살 즈음에 '아빠'라는 소리를 딱 한번 했다가, 아버지로 부터 바로 '아버지'라고 해야 한다고 피드백을 받고는 머쓱해진 적이 있었다. 어느 날 훌쩍 커버린 탓에 작년까지 입었던 치마가 짧아진 것이 아버지 눈에 띄어, "치마가 짧은 거 아이가?"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부엌에 계시던 어머니가 후다닥 뛰어나와서 외출 나가던 나를 잡고 치마를 끌어내려 주셨던 때가 불현듯 기억이 났다.
식사 때마다 아버지와 오빠, 남동생은 같은 밥상에 앉았고, 어머니와 언니들, 즉 여인네들은 따로 밥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 그런 세대의 한 사람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따뜻한 밥을 맛나게 먹다가 오빠의 밥그릇에서 누런 뭔가(계란)가 같이 딸려 나오는 것을 보고는, 내 밥그릇에는 '저것'이 왜 없냐고 엄마에게 물어보자, 엄마가 내 옆구리를 손으로 쿡 찔러서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그날의 일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큰 쓰라림으로 남아 있었다.
십 대 후반에 접어들어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할 때에도 공부보다는 취업을 하는 학교로 가야 하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고, 그것이 나의 콤플렉스가 되어 오랜 시간 나를 방황하게 만들었을 때가 있었다. 7년이나 돌아 돌아서 내 힘으로 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하기는 하였지만, 돌고 도는 시간만큼 내 또래들과는 많이 멀어져 버려서 동기들 간에 추억보다는 직장 동료와의 사이에서 더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가정폭력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받으면서 어린 시절의 일들이 명백한 '차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딸이라서 받았던 어린 시절의 '차별'에 관한 에피소드 중의 일부였다.
사회복지사로서 여성 폭력 피해자 지원 업무를 하면서, 어렸을 때 그 일들이 떠오르면,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여성들 중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이제는 내가 조금씩 옛날 사람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녀를 1명 또는 2명을 낳아 기르기 때문에, 옛날보다는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바보' 아빠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제발 자녀들이 자신들의 성(性)을 결정하고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차별하며 키우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업무상 여성을 만나는 일이 많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성이다 보니, 피해자를 접해 본 나의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 여성을 괴롭히는 3대 폭력인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의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여성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성인지 감수성은 어느 정도인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유교적이고 가부장적 가정환경 안에서 자라난 세대들 속에서는 가정폭력이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 안에서도 가정폭력이 많은 것은, 폭력이 세습(답습)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보고 성장한 아들은, 자신이 가장이 되었을 경우에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될 확률이 높다고 교육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학습된 폭력은 잠재의식 속에서 불같이 쏟아져 나와서 자신의 배우자를 학대하고 괴롭힌다는 것이다.
피해자를 상담하다 보면, 남편도 어릴 때 폭력적인 가정 안에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일부 소견을 가진 남성들은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여성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었고, 소유하려고만 하면서 여성을 제대로 존중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고, 성적인 대상, 섹스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며, 여성의 존재 가치를 폄하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 몰상식한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남편의 가정 폭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급하게 집을 떠나야 했던 피해자 중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빈 몸으로 파출소나 지구대를 찾아가 경찰의 안내로 <긴급 피난처>로 오는 사람도 있었고, 오랜 기간 동안 폭력을 견디다 못해 작심을 하고 조금씩 짐을 싸서 나온 사람도 있었다. 데리고 나온 어린 딸은 벌써 어머니의 아픔을 눈치채 버려서 결혼은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왜냐고 물어보니, 이제 겨우 8세 아이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결혼은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엄마처럼 울지 않기 위해서...
저는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말문이 탁 막혀 버렸다. 이 어린아이가 뭘 알아서 이런 말을 할까?
혼란스러워하는 피해자를 상담하면서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후, 좀 더 장기간 머무를 수 있는 기관으로 연계하여 보내면서, 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하면서...
장기간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 중에는 삶에 대한 힘이 느껴지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 자존감이 떨어져서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거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폄하하기도 하였다. 남편 폭력의 원인이 자신이 못난 탓이라고 자책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격을 무시하고 자존감 말살을 하는 심한 욕설을 거듭 들으면서 가스 라이팅(gaslighting) 상태가 되어,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네 친정식구들을 죽여버리겠다'는 말에 겁을 먹기도 하였고, "자살해 버리겠다."는 협박에 두렵지만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기도 하였다.
행복하려고 한 결혼이었는데...
그 결혼이 자신의 무덤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남편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현실 앞에서 피해자는 크나큰 슬픔과 좌절감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슬프지만, 마음을 다잡고 쉼터에 간 피해자들 중에는 지옥 같았던 남편(가해자)의 울타리를 벗어나, 더 나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립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동반한 어린 자녀에게도 아빠의 폭력은 지울 수 없는 상처이며 트라우마가 될 것이고, 폭력 앞에 스러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홀로서기를 위해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겁에 질린 피해자의 어두운 얼굴, 흔들리는 눈빛, 쪽잠을 자거나 아예 잠을 못 이루고 신경쇠약에 걸려서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가는 피해자를 보면서, 어쩌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루고 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것은, '사랑'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 더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책임감과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할 의무도 함께 생기는 것이며, 무엇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2~30년을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상황인데,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았다.
결혼한 모든 가정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덩치만 자란 미성숙한 어른은 책임감도 부족할 뿐 아니라 나쁜 남편들은 아내를 존중하지 않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고 존중하지도 않았으며,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존중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심한 욕설로 아내를 쥐 잡듯 잡아서 폭력으로 무력화시켜 놓고, 성폭력도 스스럼없이 저지르며 짐승 같은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수많은 피해자들을 봐오면서 세상에 같은 피해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피해자 유형도 다양하다는 것에 놀랄 따름이었다.
가해자 유형을 살펴보면, 일용직 노동자부터 고학력의 전문직 남성까지 다양하며,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있었고, 교묘하고 집요하리 만큼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면서 지역사회 인맥을 동원하여 아내를 무력화시키는 케이스도 있었다.
폭력은 범죄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 이 모든 것이 심각한 범죄인데도 '신고' 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자신을 더욱 위험하게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신고를 꺼려하는 피해자 중에는 "그래도 남편인데, 그래도 아이 아빤데... "라고 하며 자신보다 가해자인 남편을 걱정하는데, 우리나라는 가정폭력 범죄를 [가정보호 사건]으로 다루기 때문에 형량이 높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고 가정폭력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가정은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작은 사회이며, 한 생명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워내야 할 의무를 가진 집단이다. 그 원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기억과 학습과 배움은 훗날 성인으로 살아갈 자양분이 된다.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를 보듬으며, 좀 더 성숙한 모습의 부모로서 가정 울타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