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찬란한 빛 모두 사라진다 해도 - 줄리 입 월리엄스 ( 나무의철학)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행복한 삶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고나서 겪은 투병기를 진솔하게, 혹은 격정적으로 쓴 책.
결국 저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남겨진 이들에게 많은 것을 남겨준다.
읽는 내내 만약 내가 그녀의 상황을 내게 대입해 보며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헀고,
덕분에 항상 우리가 부정하려하고 잊으려 애쓰는 것에 대해서 성찰할 기회를 주었다.
삶의 매 순간에 충실할것.
줄리가 이 책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히기를 바랐는지를 떠올리며 그녀의 글을 다시 한 번 적어보겠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암 환자로서의 삶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든 결코 혼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혼자가 아닐 것임을 깨닫길 바란다……. 나의 풍요로우면서도 뒤틀리고 다난했던 인생을 읽고 여러분이 울고 웃으며 기쁨과 슬픔을 느끼기를, 그리고 힘을 내어 지혜와 진리를 얻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바란다.
2020-01-19 15:07:15
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줄리는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줄리와 함께 살면서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은 없었다. 진정한 지혜와 평화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할 때 진짜 삶이 시작된다. 그러니 진실을 회피하는 것은 곧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2020-01-19 15:05:41
“그렇게 끔찍한 일만은 아니구나.”
나는 몇 번이나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감각해졌던 감정이 산산조각 나면서 줄리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는 고통스러운 상실감이 밀려왔다. 줄리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달이 지나자 본격적인 슬픔이 밀려온 것이다. 한동안 나는 슬픔과 원초적인 감정에 휩쓸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온갖 후회와 회의, 그리고 한동안 해방감을 느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줄리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온갖 비이성적인 감정 때문에 자주 무너져내렸다. 틈만 나면 2013년 봄에 찍은 줄리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젊고 활기차고 아름다웠던 그녀를 기억했고, 줄리의 내면에서 풍겨나오던 자유로움과 무한한 가능성에 놀라곤 했다. 저 생기 넘치는 줄리의 몸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줄리의 죽음은 정해져 있었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막을 수 있었다는 건 착각이었다. 이 모든 혼란과 가능성, 이랬더라면 혹은 저랬더라면 하는 생각들, 각종 의학적 시도와 대체의학에 대한 미련,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다 피할 수 없는 결말로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줄리가 암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줄리가 본인의 운명에 어떻게 맞섰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줄리는 시력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병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고도 회피하거나 숨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진솔하고 열정적으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2020-01-19 15:04:19
일상을 살면서 자신이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남극에서 돌아온 후 나 역시 개인에게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알고보면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에 다시 빠져들었다. 가족과의 갈등, 친구와의 다툼을 해결하고, 100페이지에 달하는 계약서 초안을 밤늦게까지 작성하고, 단어 몇 개를 놓고 마치 대단한 문제라도 풀듯 상대 변호사와 격렬하게 협상을 하고, 내 앞에서 새치기한 남자 때문에 짜증을 내고, 결혼식 계획을 세우고, 아파트를 구입하고, 어떤 침대를 살지 고민하고, 양치질과 텔레비전 보는 문제를 두고 아이들과 씨름하며 보냈다.
우리는 거대하고 장엄한 풍경의 그림자가 아니라 일견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실은 좁디좁은 한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를 작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 무기력함 속에도 인생의 진실이 있다. 그리고 그 진실 속에 인생이 있다.
때가 되면 나는 다시는 못 일어날 것을 직감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행복하게 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그랬듯이 가족과 친구들을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 같은 삶의 끝을, 또 다른 기적의 시작을 간절한 마음으로 맞이할 것이다.
2020-01-19 14:52:36
이 책을 읽게 될 분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 삶의 여정을 나눌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일상의 고통에 매몰되지 말고 느긋하게 삶을 즐기세요. 최대한 긍정적으로 살고 확률 따윈 무시하세요. 아들, 딸, 남편,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기세요. 살아가세요, 친구들. 그저 살아가세요. 여행을 하세요. 여권에 스탬프를 모으세요.
2020-01-19 14:49:04
나는 죽어가면서도 계속 살고 있다. 이런 삶에도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있다. 나는 암 진단 후 몇 년 동안 내 삶의 기적을 내 방식대로 풀어내고 있다.
내 삶의 조명이 꺼지기 전에 이 말을 하고 싶다. 둘째 부인, 나는 당신을 증오하지 않아요. 한때 내 가족이었던 이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주세요. 그들을 돌봐주고 나를 위해 끝까지 삶을 살아주세요.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곧 만나러 갈게요, 할머니. 할머니한테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2020-01-19 14:47:57
그렇게 슬프던 내 여름이 끝나고, 인생을 보는 관점이 바뀌면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남편과 두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은 슬펐지만 내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웠다. 내가 태어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눈을 잘 뜨고 있으면 내가 죽어가는 모습은 볼 수 있을 테니까. 죽음도 일종의 기적이다. 죽음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는 어렵지만 나는 계속 배워나갈 것이다.
2020-01-19 14:43:01
하지만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나는 두려워도 용기를 내서 눈을 똑바로 뜨고 정직하게 죽음을 마주하자는 쪽이다. 그러다보면 새로운 지혜가 생겨날 테니까. 나는 진실을 찾기 위해, 충실하게 남은 삶을 살면서 개인적으로 체험한 여러 기적을 의식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지혜를 쌓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처럼 삶의 진실을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나와 함께 기꺼이 삶과 죽음의 어둠과 두려움, 비극,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고 싶어 했다.
2020-01-19 14:37:59
삶의 기적은 언젠가 반드시 끝이 난다. 나는 내 삶이라는 기적이 어떻게 끝날지 알게 되어 고통스러울 뿐이다. 인생의 끝은 무엇이며 어떤 느낌일지, 죽음의 과정은 어떨지, 삶이라는 실타래를 원래대로 되감는 일을 얼마나 깔끔하고 아름답게 할 수 있을지, 흉하게 뒤엉킨 실을 풀어내는 일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나는 지난 5년 내내 생각했다. 끝이 가까워져오는 요즘은 이런 생각을 더 자주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조차도 기적일 것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기적의 실타래를 되감는 일을 꺼리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죽음은 어둡고 무섭고 비극적인 일이다. 죽음이 예상보다 일찍 찾아올 때는 더욱 그렇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어둠과 두려움, 비극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찾았다.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엄혹한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충격적인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죽음과 두려움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어떻게든 나을 것이라는 착각과 거짓된 낙관주의, 주변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응원에 끝없이 의지하려 했다.
물론 좋은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환자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증상이 가장 심각한 환자들과 그 보호자들까지도 진실을 외면하는 진부한 말들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언제나 희망은 있어요.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져요. 끝까지 싸워야 됩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살 수 있다는 희망마저 사라질 때가 있잖아요. 그게 사실 아닌가요? 왜 계속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죠? 부정적이 된다고 뭐가 더 잘못되나요? 아뇨, 내겐 다른 선택지가 있어요. 죽음을 고르는 선택지요. 무섭고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 앞에서 내 생각을 말해봤자 이단 소리나 들을 텐데.
2020-01-19 14:37:40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수많은 것도 떠오르지 않을 거고. 내 생각을 하지 않는 때가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세 시간으로 늘어나고 하루 종일 생각을 안 할 때도 올 거고 정기적으로 내 무덤을 찾는 일도 그만두겠지. 그래도 괜찮아. 원래 그래야 하는 거야.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사람이 건강하게 살려면 과거를 망각하게 해주는 시간의 힘이 필요해. 그 힘은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새로운 경험과 감정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줘. 현재에 충실하게 살면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줘. 우리의 기억을 원래 있어야 할 곳인 과거에 담아 정리해주고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할 때 꺼내볼 수 있게 해줘.
그리고 당신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말일 텐데, 시간은 과거의 상처를 아물게 해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줘. 가장 고통스러웠던 경험도 시간이 흐르면 객관화가 되니까 그 경험을 돌아보면서 배움을 얻고 성장할 수 있지.
2020-01-19 13:29:13
좋지 않은 스캔 결과를 받고 보니, 오래전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이 약속을 지키게 될 듯하다. 젊은 나이에 죽게 될 테니 말이다. 아마 가족들과 친구들 중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대단한 모험,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여행을 제일 먼저 할 사람이 나인 것 같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오래 남아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남편과 함께 나이 들고 싶다. 부모님을 땅에 묻어드리고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 삶을 더 많이 누리고 싶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은 없다. 살면서 선택권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 나는 바삐 짐을 싸고 있다. 남겨질 이들을 위해 목록을 만들고, 지침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유산과 관련된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추억을 쌓고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을 하고 마지막 글을 남겨야 한다.
그리워질 사람들, 그리워질 삶의 요소 하나하나를 꼽아보겠다.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고 빼던 단순한 동작, 수많은 요리를 만들어낸 무쇠 냄비의 그윽한 멋, 코스트코에서 장 보기, 조시와 함께 텔레비전 보기,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기, 그리고 이 삶. 나는 이 모든 것을 몹시 그리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젊음을 낭비한다고 말한다.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지금, 문득 생각해보니 우리는 건강한 시절에 건강을 낭비하고 살아 있는 동안 삶을 낭비한다. 이 삶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이런 진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제 잠은 중요하지 않다. 저승으로 가야 할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다시 통증이 시작되면, 마약성 진통제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면, 그때는 실컷 자도 된다. 가슴 아프게도 지금 내 곁에 무력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조시와 두 딸, 어머니와 언니와 오빠, 사촌들과 수많은 친구들이 내 곁에 있다. 이런 자리에 오게 만들어 미안하다. 슬픔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 일을 하게 만들어 가슴이 아프다. 어쩌면 나는 오래전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이기적인 약속 때문에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빨리 떠나는 것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아님을 믿어주기 바란다.
이제 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특별한 세상의 문턱에 서게 될 것이다. 나는 신에 대한 믿음보다 이승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믿음을 더 확고하게 간직해왔다. 나는 저승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는다. 4년 전 암 진단을 받은 후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 데비, 칼라일, 레이첼, 콜린, 크리스, 제인을 비롯한 수많은 지인들이 자꾸 생각난다. 나는 그들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것이다. 그들과 먼저 간 조상님들이 나를 반겨주고, 내가 저승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미아를 임신했을 때, 출산이 두려워질 때마다 나는 수천 년 동안 출산을 해온 수십억 명의 여성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지금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지인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죽어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다 했는데 내가 저승으로 건너가는 의식을 치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2020-01-19 12:57:16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정신 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거의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조시는 내가 원래 미친 사람인데 암 때문에 증상이 더 심해진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가여운 조시는 내 히스테리와 분노, 슬픔, 눈물, 어둠을 모두 감내해주었다. 이제 그도 지쳤을 것이다. 이런 상태로 사는 생활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게 맞다. 조시와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하니까. 조시가 다시 정상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당연히 조시의 가족들도 그런 바람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짓누르는 짐이다. 가족 모임에서 피폐해진 몸뚱이로 그의 옆에 서서 그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조시를 동정할 것이다. 내가 얼른 사라지고 조시가 남은 생을 함께할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것이 조시를 위해 백번 낫다. 그의 상처를 낫게 하고 고통을 잊게 해줄 여자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살아가는 게 용감한 것일까 아니면 그만 사는 게 용감한 것일까? 내가 떠나주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곁에 머무는 게 더 큰 사랑일까? 난 아직 모르겠다.
2020-01-19 10:48:43
둘 중 누가 더 용기 있는 사람일까? 첫째, 버티다보면 더 나은 방법이 나올 거라며 끝까지 항암치료를 고집하는 암 환자. 둘째,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약만 투여하며 최대한 사람답게 살다 가기를 선택한 암 환자.
나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계속 이 문제를 고민해왔다. 나는 용기와 담력을 중시한다. 암과 죽음에서 도망치기 위해 발광하는 짐승처럼 목숨을 구걸하기보다 현실을 인정하고 두려움과 분노, 슬픔을 포용하면서 의연하게 살아가는 용감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내적인 힘, 존엄과 품위,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어떤 길을 택해야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불가능을 극복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스포츠와 영화에 열광한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위의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거의 만장일치로 첫 번째를 고르지 않을까?
이해는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오랜 기간 엄청난 감정적, 신체적 고통을 감내하는 암 환자는 분명 감동을 주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병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도록 두는 것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의 입장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 일은 그동안 죽음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안전망을 없애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환자야말로 죽음을 진정으로 대면하는 게 아닐까? 품위와 존엄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셈이 아닐까? 나는 치료를 포기했으니 겁쟁이에 형편없는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약해빠진 패배주의자이고 싸우다가 도망친 사람이 되는 걸까?
2020-01-19 10:40:55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신체적 고립까지는 아니어도 감정적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된다. 죽음을 향한 여정은 혼자 가야 하는 길임을 어느 때보다 절감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외부가 아닌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자아와의 대화를 통해, 신앙이 있다면 신과의 대화를 통해 위안을 구하게 된다.
2020-01-14 14:05:27
전이암을 몸에 품은 채 2년 동안 굳건하게 살아오면서 깨달은 중요한 진실이 있다. 암이나 암 치료로 인한 육체적 고통 혹은 장애를 제외하면 내 꿈을 가로막는 것은 암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휴가를 가지 못하게, 새 집을 사지 못하게, 원하는 일을 못하게 막는 것은 암이 아니다. 암에 대한 두려움과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굴복해버린 정신이다.
정신의 마비는 사실상 수정할 수 있는 꿈, 심지어 암 진단 이후 생겨난 새로운 꿈까지 뭉뚱그려 죄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정신적 마비 상태일 때는 사전 대책조차 세울 수가 없다. 용기를 내거나 대담한 결정을 하거나 장래를 고려할 수도 없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할 정신이 없으므로 현재의 일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후가 좋지 않은 불치병의 여러 역설 중 하나는, 내가 이 병으로 죽을 거라고 인정하고 나니 정신적 마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계획도 세울 수 있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어느 정도는 계획이 필요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굳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꿈을 꾸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동안 삶에 충실하기를.
2020-01-14 13:58:43
저는 조금이라도 더 살겠다고 아득바득 매달리고 싶지 않아요. 며칠을 더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살날을 며칠 더 늘리는 것보다 존엄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남편과 어린 딸들을 배신한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가족을 위한다면 삶의 질을 포기하더라도 하루라도 더 살려고 해야 맞는 거겠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들도 나를 패배주의자라고 부를까? 더 오래 살기 위해 더 노력하지 않았다고, 더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고 나를 비난할까? 병마와 싸우면서도 삶을 즐기며 잘 살았던 여자로 나를 기억하고 존경해줄까, 아니면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오던 노인처럼 삶을 붙잡고 매달려야 나를 우러러봐볼까? 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려면 죽지 않으려고 발악을 해야 할까, 아니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나는 아직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고, 답을 찾는다고 해서 그 답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그저 딸들을 사랑한다는 것뿐이다.
내가 A.C. 박사에게 심정을 털어놓은 그날, 언니가 두 딸을 데리고 가서
2020-01-14 13:48:31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내 안에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불굴의 여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베르 카뮈의 이 구절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독하게 밀어붙여도 내 안에는 더 강하고 훌륭한 정신력이 있어서 버티게 해주기 때문이다.
짐승처럼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고, 본인이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걸 부정하고, 망상과 거짓 희망에 집착하고, 오늘을 희생해가며 치료를 받고, 인생의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것은 기품도, 품위도 없는 태도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삶을 관조하고 발전시키지 못하게 한다. 이런 태도는 불굴의 정신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내적인 힘과 의연함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 진정한 내면의 힘은 죽음을 차분하게 대면하고, 죽음이 적이 아니라 삶의 불가피한 부분임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2020-01-14 13:45:24
. 내가 울면 어머니는 서툰 영어로 물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니?” 물론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럼 된 거야.”
간단한 조언이지만 사실이었다. 최선의 노력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후회도 없어야 한다. 나는 암과 계속 싸울 것이다. 암과 싸우던 초기처럼 죽을힘을 다해 이기자는 식은 아니지만 이 불치병을 보다 잘, 깊이, 현실적으로 이해하면서 계속 싸우려 한다. 나는 성취욕이 강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물론 최선을 다해도 최고 성적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암과의 싸움에서도 최선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죽게 되어도, 이 삶에서 조금이나마 더 시간을 벌고 최대한 잘 살아본다면, 그래서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포기하지 않고 싸우기로 선택한 것만으로도 딸들에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교훈을 일깨울 수 있으니 마음이 평안할 것이다.
2020-01-14 12:42:56
우리가 삶을 통제한다는 생각은 엉터리 같은 착각이자 잔인한 환상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제어하지 못한다.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냥하게 대할지 정도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자신과 타인에게 얼마나 정직하게 대할지, 삶에 어느 정도의 노력을 쏟아 부을지, 불가능한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지도.
2020-01-14 12:30:15
확률상의 숫자는 고정된 게 아니다. 꾸준히 조금씩 변한다. 내가 예비 수술을 받은 덕분에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얼마나 높아졌냐고? 알 수 없다. 다양한 힘이 무작위로 작용해 일어날 것 같지 않던 비행기 사고가 나듯,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던 우리가 결국 이렇게 만났듯이, 여러 좋은 일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줄지어 일어나다보면 나도 암을 이겨낼 거라고, 조시는 말하곤 했다.
2020-01-14 11:14:44
하지만 우리는 결국 만났고 결혼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무수한 길이 무작위로 스쳐가는 이 혼란스러운 우주에서, 우리는 인연의 끈이 닿아 하나가 됐다. 만약 우리가 태어났을 때 훗날 만나고 결혼할 확률이 0이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가능성이 0에 가까울 정도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이루어진 것을 어떻게 숫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의 결혼은 숫자가 실은 별 의미가 없으며 통계 역시 쓸데없는 자료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예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현관문 밖으로 나가거나 비행기를 탔을 때 죽을 확률이 별로 높지 않다는 통계를 내가 믿지 않았다면, 내 아이들이 학교에 침입한 어느 미친놈이 쏜 총에 맞을 확률이 높지 않다는 통계를 믿지 않았다면, 나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것이고 내 아이들도 못 나가게 했을 것이다. 우리가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해가 뜰 거라 예상하는 것은 확률의 법칙상 그리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녀의 대학 진학을 대비해 돈을 모으고 노후를 위해 저축하는 것은,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 대학에 가고 우리가 은퇴 후에도 살아갈 확률이 높다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근거로 일상에서 뭔가를 실천하고, 이것을 ‘계획’이라고 부른다.
암 환자들은 생사 여부와 관련된 통계를 무시하면서 그런 숫자 따위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하지만 위선일 뿐이다. 암에 걸렸어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야 하며, 살아가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숫자의 가치를 믿는다. 숫자를 믿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거리를 건너지 못하고, 효과가 있다고 증명된 진 빠지는 치료도 견디지 못할 것이며 생일 파티나 휴가도 계획하지 못할 것이다. 암에 걸리지 않았어도 어차피 살아야 한다. 지구는 자전을 하고, 우주는 특정한 법칙에 따라 작동하며, 세상에는 통계적 예상에 따른 결과가 펼쳐진다. 예상되는 결과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나는 어떤 숫자를 믿으며 살아갈지 선택할 수 없다.
2020-01-14 11:09:41
하지만 우리는 결국 만났고 결혼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무수한 길이 무작위로 스쳐가는 이 혼란스러운 우주에서, 우리는 인연의 끈이 닿아 하나가 됐다. 만약 우리가 태어났을 때 훗날 만나고 결혼할 확률이 0이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가능성이 0에 가까울 정도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이루어진 것을 어떻게 숫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의 결혼은 숫자가 실은 별 의미가 없으며 통계 역시 쓸데없는 자료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2020-01-14 11:09:19
이후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공부하고 일하고 휴가를 떠나면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 삶의 평범하고 특별한 일에 관해 사촌들과 통화를 하면서,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남극에서 카약을 타면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면서 손금쟁이 여자가 했던 한마디 한마디가 내 완고한 뇌와 심장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나는 오래전 신들에게 묻곤 하던 온갖 질문을 하지 않게 됐다. 어쩌면 나의 우주는 내 아쉬움과는 달리 아름답고 완벽하고 멋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두 번째와 세 번째 가설처럼 훨씬 더 비극적인 운명으로 전개됐을 수도 있었다. ‘병’, ‘좌절’, ‘불행’ 그리고 ‘어린 나이에 사망.’ 이것이 손금을 봐준 여자가 내 우주에 대해 한 말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운 좋은’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한다. 그게 바로 우리의 선택이라고 그 여자가 말했다. 나는 내가 참담한 조건으로 태어난 이유를 알고, 나를 위해 준비된 우주의 계획이 뭔지 깨닫고,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아내는 데 집착한 나머지 자유로운 선택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내가 눈과 귀를 열면 손금이 내 인생을 들려줄 거라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불운이 가득한 곳에서 삶을 시작해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를 알려줄 거라고 했다. 역사적 상황과 가족들의 결정에 떠밀려 이민을 왔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내가 결정한 삶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해온 좋은 선택과 힘겹게 얻은 교훈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들에게 질문을 퍼부으며 얻으려 했던 인생의 답을, 결국 내 손금과 내면과 과거를 들여다보면서 얻은 셈이다.
2020-01-14 11:03:10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이다. 이렇게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앞으로 이 사람과 대면할 일이 없을 테니까, 이 사람은 나에 대한 선입견이 없을 테니까 좀 더 편하게 속을 털어놓을 수 있다.
“당신의 손금은 손금 읽는 법만 알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에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본인의 인생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주목해서 보세요. 그럼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손금은 변할 수 있고 늘 변해요. 당신의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제어할 수 없는 조건을 잔뜩 안고 태어나죠. 어디서,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 어떤 장애를 갖고 태어나느냐 같은 거예요. 하지만 주어진 조건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본인 선택에 달린 거예요.”
2020-01-14 10:57:36
내가 암 진단을 받은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는 악몽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와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나는 하느님의 손길 덕분에 로스앤젤레스에 왔으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마법 같은 사랑을 만났다. 이 사랑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랑,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도 별로 경험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경험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사랑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랑은 삶이 위협받는 순간이 되어야 드러난다. 누구든지 잠깐이라도, 몇 시간, 며칠, 몇 주만이라도 이런 사랑을 경험하면 그 순간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이런 사랑이 삶을 스치고 지나가면 아무리 냉소적인 사람이라도 강렬한 힘을 품은 채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암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하지만, 내가 어쩌다 암에 걸리게 됐는지를 글로 풀어놓으며 매일 깨닫고 있다. 암은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하기만 하던 예전의 삶을 앗아갔지만 대신 가족과 이웃들의 사랑을 선물로 안겨주었다는 것을. 이 사랑은 이제 내 영혼의 일부가 되어 나를 영원히 버티게 해줄 것이다.
2020-01-14 10:19:46
당장 걱정되는 건 조시였다.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지만 나는 삶의 큰 난관을 대하는 데 있어서 조시가 나만큼 강하지 않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런 쪽으로는 내가 더 단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여자다. 나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하고 회복력이 좋다고 믿는다. 조시는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아마도 내가 저세상으로 떠나면, 그가 나 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추슬러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언제나 남겨진 이들에게 더 버거운 법이다.
2020-01-14 10:07:42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또 오늘을, 8년 후를, 40년 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이제 나는 희망이 내 영혼의 영원불멸한 일부임을 안다.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도 희망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처럼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남아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죄다 짓이기고 싶을 만큼 지독하게 암울했던 시기에도, 나는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온기를 느꼈다. 내 인생이 끝나갈 때쯤, 더 이상은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질 때쯤 내 희망은 지금과는 또 다른 무엇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내 아이들에 대한, 인류에 대한, 내 영혼에 대한 희망으로.
2020-01-13 15:22:49
나 역시 암과 싸우는 내내 생존 모드로 변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미래를 꿈꾸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번씩 가슴이 무너질 때면, 자기보호본능을 따라 다시는 내 의지를 약하게 만드는 실망, 충격, 고통을 느끼지 말자고 다짐한다. 희망이 꺾일 때마다 상처를 받으면 오래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암과 싸우는 가장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바로 얼마 전에도 패배했다. 나는 나 자신을 추스르면서 “희망 따위 엿이나 먹어라”고 선언했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먼 미래의 행복한 순간을 머리로든 마음으로든 다시는 떠올리지 말자고 결심했다. 희망을 갖는 게 두렵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을 거부한다.
희망은 참 웃기는 것이다. 자체적인 생명력과 의지가 있는 것 같기도 같다. 의지로 제어할 수 없으며 우리 영혼에서 완전히 떼어놓을 수도 없다. 희망의 불꽃은 아무리 미약해도 절대 꺼지지 않는다. CEA 검사 결과에 실망한 나는 암과의 전쟁 따위는 아무리 치러봤자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는 좌절의 기억을 뒤로하고 그날과 그다음 주, 그다음 달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다 문득 내게 현실적으로 남은 시간이 8년 정도이며 이 시간이면 내 아이들이 각각 열 살과 열두 살이 된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일단 8년으로 압축된 삶을 열심히 살고, 혹시 그보다 좀 더 살게 되면 덤이라고 기분 좋게 생각하자.
2020-01-13 15:17:46
지난 8개월 동안 나는 희망의 가치를 따져보면서, 어머니에게 들었던 베트남에서의 삶과 우리 가족이 탈출하던 당시를 종종 떠올렸다. 어머니의 이야기에는 희망의 변덕스러운 속성이 담겨 있었다. 희망은 우리 영혼 안에 자리한 불꽃이다. 어두운 밤에 홀로 켜진 촛불처럼 미약하게 깜박일 때도 있고, 무한히 따뜻하고 눈부신 빛으로 격렬하게 타오를 때도 있다
2020-01-13 15:10:57
존재의 불안정함은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내 두 아이도 자신들의 불안정함을 이미 느끼는 듯하다. 대단히 아름답고 지적인 사람들도 자신이 충분히 아름답고 지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너무나 놀랍다. 사람들은 자신이 충분히 날씬하거나 매력적이지 않다며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외모, 지능, 체중 등 스스로를 재단하는 수백 가지 항목에 따라 자신이 남들에게 호감을 사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를 구별하려 한다.
누구나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가족과 친구들, 동료들, 교회 등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마치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코드 같다.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일 수도 있고, 이 작은 행성에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의 숙명일 수도 있다. 아무리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불안해진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짊어져야 할 몫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뜻밖에도 암은 나의 이런 불안을 가장 효과적으로 떨쳐내게 해주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오랜 고통을 암이 없애준 셈이다.
2020-01-13 15:08:06
암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의 순간을 망가뜨리고 미래를 의심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에서 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벗겨내고 모든 것을 남극 하늘처럼 또렷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2020-01-13 10:53:31
죽음이 임박하면서 인생에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갑작스레 확인했지만, 그로 인해 좋은 점도 있었다. 관계의 진전 속도가 빨라져서 오후에 한 번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지인이 친구가 되었다. 낭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좋은 사람과 친해지는 것 말고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을 많이 생각해보게 된다. 혹시 여러분은 내가 조시와 결혼했을 때, 꼼틀대는 어린 딸을 처음 품에 안았을 때가 제일 행복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조시와 미아와 벨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결혼과 출산은 기쁜 일이었지만 걱정도 뒤따랐기에 마냥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쁜 흰 드레스를 입고 조시 옆에 서 있는 동안, 나는 우리의 관계가 과연 오래갈 수 있을지 무의식적으로 걱정했다. 첫 아이를 낳아 품에 안는 방법을 배울 때도, 이러다 이 연약한 아기를 다치게 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을 느꼈다.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 근심 걱정 하나 없던 순간을 꼽자면 열아홉 살 때 중국 간쑤성의 어느 외딴 산비탈에서 티벳 승려 세 사람과 나란히 앉아 저 아래 사원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염불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때다. 그리고 2005년 추수감사절에 수백 마리의 야생 펭귄을 만나기 위해 청명한 하늘과 눈부신 태양 아래서 조디악 보트를 타고 흰색과 초록색, 파란색으로 물든 바다를 가로질러 남극대륙으로 향하던 때다. 또한 별빛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가 길을 밝히는 가운데, 차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좁은 방글라데시의 어느 길을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던 때였다.
모두 내 인생에서 다시 없을 행복한 순간이었다. 길지 않은 순간이지만 평화로웠고, 과거나 미래에 대한 근심도 없었다. 목적지를 향해 멀고 때로는 험한 길을 가면서도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내 영혼이 인간으로서 경험하기 힘든 신적인 영역까지 아우른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신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한 경이로운 풍광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2020-01-13 10:51:06
암의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지 않아도, 행복은 뜻밖의 순간에 찾아와 의식을 스치고 지나가버린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때때로 영혼을 짓이기는 삶의 단조로움을 느낄 것이다. 아침마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고, 아이들을 서둘러 학교에 보내고,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견디고, 입맛 까다로운 아이들이 어차피 안 먹을 줄 알면서도 몸에 좋은 음식을 요리하고, 양치질을 언제 할지 다음날 무슨 옷을 입힐지, 내일 점심을 잘 먹으면 어떤 선물을 줄지 아이들과 끝없이 협상하는 일상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삶. 사람들이 아이 덕분에 느낀다는 순수한 기쁨을 나도 암 진단을 받기 전에는 종종 느끼곤 했다.
2020-01-13 10:43:44
정한 힘과 정신적인 회복력을 갖추게 된 거야.
너희는 이제 엄마 없이 자라게 될 거야. 마음 같아선 너희가 고통을 겪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엄마로서 한편으로는 너희가 고통을 겪더라도 잘 버티고 살아내어 교훈을 얻기를 바라. 너희가 고통을 통해 더욱 강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 너희가 엄마의 강한 면을 물려받았다는 거 알지? 고통을 통해 타인에게 동정심을 가질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어.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기를, 인생을 즐기고 인생의 온갖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하기를, 온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기를,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인생의 불안정함과 소중함에 감사하기를.
이게 너희에게 주는 숙제야, 예쁜 내 딸들아. 고통스런 비극을 아름다움과 사랑, 강함, 용기, 지혜의 원천으로 삼으렴.
물론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거야. 하지만 조숙했던 소녀 시절에 침대에서 홀로 흐느끼면서 깨달은 게 있어.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짧은 삶이든 긴 삶이든 인간으로서 처할 수 있는 온갖 삶의 조건을 최대한 이해하는 게 바로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라는 거야. 우린 매순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가지.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배우면서 성장하고 변화하고, 삶이 무엇인지 점점 알아가. 나는 이걸 영혼의 발전이라고 불러. 내가 고통과 괴로움에 관해 ‘공평’한 수준 이상의 몫을 감당했다는 것, 어려서는 앞이 보이지 않았고 말년에는 암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나름 멋진 삶을 살았다는 것을 너희가 알아줬으면 해. 이 고통과 괴로움이 나를 규정했고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켰어.
2020-01-04 12:36:53
예쁜 딸들아, 인생이 어째서 불공평한가에 대한 답은 나도 몰라. 아마 이번 생에는 알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비통함을 느끼면서 충분히 울고 상처를 받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얻는 게 있을 거야. 불 속을 통과하는 것은 괴롭지만 막상 끝까지 통과하고 나면 온전하고 강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어. 내가 장담해. 고통을 겪고 나면 진리와 아름다움, 지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거야. 고통이든 기쁨이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것도, 슬픔 없는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겠지. 인생에는 고통 없는 안도감, 잔인함 없는 연민, 두려움 없는 용기, 절망 없는 희망, 고생 없는 지혜, 결핍 없는 감사는 있을 수 없어. 인생에는 이런 역설이 넘쳐난단다. 온갖 역설 속에서도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야.
2020-01-04 12:3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