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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Jun 03. 2020

을지로를 떠나며

산림동의 기억들

학교 실기실을 떠나던 날



지난 2015년, 졸업을 하고 막 작업을 시작하자고 마음 먹었을 때 대다수 졸업생들이 그렇듯 나 또한 호의적이지 않은 주변 상황들과 마주해야만 했다. 그 어떤 지지층도 없이 기호 99번 정도의 번호표를 달고 무작정 선거에 출마하는 기분이었다. 당장 작업실이 없었으나, 나의 딱한 상황을 알아준 선배 형의 배려로 연신내 시장 근처 그의 반지하 작업실에서 몇 달 지낼 수 있었다.




잠시 머물렀던 선배의  반지하작업실



작업실을 지원해주는 여러 프로그램을 발견하는 족족 지원했으나 이렇다할 이력도 없었을 뿐더러 작업도 미숙하기 그지 없었던 나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고, 그렇게 일 년의 절반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서울 중구청에서 작가에게 일 년 간 공간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발견해 지원했고, 구청장과 여러 공무원, 심사위원 앞에서 영혼의 PPT를 시전하고 나서야 간신히 선정돼 1.5평 남짓한 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중구청 주관 하에 <을지 디자인 아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발족된 사업은, 을지로 4가 일대 공업지대인 산림동에 퍼져있는 여러 빈 공간에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을 투입해 도시재생 관련 사업을 함께 진행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바야흐로 여러 지자체에서 도시재생이 유행처럼 시작되던 해였다. 내가 얻은 공간은 원래 페인트 창고였던 곳이었는데, 미닫이 문을 열면 문 옆에 작은 수도꼭지가 있었고, 방 안에는 콘센트 구멍 두 개가 전부였다. 




오토바이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복잡한 골목 한가운데 있었고, 사방에 철공소가 자리잡고 있어서 늘 불꽃을 튀기며 무언가가 절단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매캐한 철가루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는 줄은 이 곳에 오기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만의 무언가를 마음껏 해 볼 수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에 그곳은 마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동네 고양이들이 마치 사랑방처럼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당시 나는 새에 관련된 그림을 주로 그렸기 때문에, 작업실 이름은 <새 작업실>로 명명했다. 나의 새로운 작업실이라는 중의적인 뜻도 있었다.






첫 공간에서 얼마간 지내다 나는 두 번째 작업실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전 작업실과는 걸어서 오 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프로젝트 소속의 한 팀이 나가게 되면서 내가 그 공간을 대신 쓰게 된 것이었다. 예전에는 공장으로 쓰였던, 슬레이트 지붕이 깔린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사실 건물이라고 말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그저 벽과 지붕이 존재할 따름인 그런 공간이었다. 대신 전에 사용했던 공간보다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세 배 가까이 늘어났고, 층고는 무척 낮았지만 복층 구조로 되어있어 작품이나 이런저런 물건들을 보관하기 좋았다. 그러나 175cm이상인 신장을 가진 사람은 도무지 똑바로 설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곳으로 오면서 지민작가와 함께 작업실을 쓰게 됐고, 나는 지민작가를 위해 근처 목공소에서 합판과 목재를 사다가 톱으로 자르고 조립해 가벽을 만들어주었다. 가끔 군 휴가를 나온 남동생이 놀러오기도 했는데, 그는 조소를 전공했기에 나는 짐을 몰아둔 공간을 정리해 작업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셋은 곧잘 어울렸다. 전에 쓰던 공간도 그랬지만, 여기에도 당연히 화장실이 없어 근처 지하철이나 상가로 가야만 했다. 여름은 에어컨이 있어 그럭저럭 견딜만 했지만, 겨울에는 종종 물감이 얼만큼 안이나 밖이나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자랑 할만한 예쁘고 멋진 공간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일년의 95퍼센트를 그 곳에서 지내며 무척 많이 웃었고 그만큼 울기도 했다. 이제 벌써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을지로를 완전히 떠나게 되어 남아있던 짐을 정리하고 있자니, 시선이 닿는 곳 여기저기에 그 시간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만 같다.





나는 사실 도시재생이라는 단어나 어감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제와서 도시재생을 가지고 잘 되었느니 못 되었느니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다. 나는 엄연히 중구청 주관 사업에 소속되어 지역에서 공간 지원을 받고 활동하는 작가였으므로 을지로에 머무는 동안 매년 연말에 구청 회의실에 모여서 일 년 간 지역에서 활동했던 성과들을 보고하고 공간 지원 연장 여부를 결정했다. 성과의 경우 개인적인 작품활동 보다는 중구 관할 지역에서 수행한 사업을 주로 평가 대상으로 했다. 덕분에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딛고, 관의 여러 사업에 사업 주체로 참여하고, 때로는 기획해 보기도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를 생각하면 서류 한 장 작성하는 것도 쩔쩔맸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내게 주어졌던 분에 넘치는 어려운 일들이 결국 내게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는 배움을 선사했고, 그 소중한 기회들에 감사한 마음 뿐이다. 





누구에게나 어려우면서 동시에 소중했던 시간이 있고, 그 기억은 서로 형태는 다르지만 삶의 견고한 버팀목이자 위안이 되어주는 것 같다. 을지로의 기억들은 내게 있어 그런 소중한 위안이며, 그 기억들을 조금이나마 여기 공유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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