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찬 이규봉 Mar 30. 2021

1.결합법칙과노동조합

노동조합은 필요한가?

   자연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이 지배한다. 힘이 센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한 생태계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그 이유는 동물들에게는 탐욕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배가 고프면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지만 배가 부름에도 일부로 약한 동물을 마구 공격하여 다른 동물이 먼저 먹을까 봐 또는 나중 배고플 때 쉽게 먹으려고 약한 동물을 멸종시켜 가며 저장해 놓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은 어떤가? 인류가 마을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형성한 이후로 인권의 가치가 가장 중시되는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전쟁이 없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전쟁이란 기본적으로 힘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가 가진 것을 강제로 빼앗는 행위이며 강대국의 요구를 약소국에 강제하는 행위로 동물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동물과 달리 힘이 센 인간은 힘이 약한 인간을 멸종에 이르기까지 학살하기도 한다. 자신이 먹고살기에 충분한 재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재물을 갖기 위해,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또는 덜 가진 자에게 가야 할 몫을 힘으로 빼앗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 이유는 사람도 동물이건만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탐욕이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천민자본주의의 속성이다. 그러나 역시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인지 동물 사회에서는 결코 보기 어려운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힘이 없는 소작농이나 노동자들이 지주나 사용자 같은 힘이 있는 자들의 탐욕이나 착취에 대항하여 대규모로 힘을 합해 끊임없이 저항을 해온 것이다. 그 저항은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했다. 이러한 저항을 테러라고 부르든지 반란이라고 부르든지 혁명이라고 부르든지 어떻게 부르든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힘없는 자들의 분노 어린 저항은 가진 자에게나 못 가진 자에게나 심각한 불행을 초래한다.

   인권을 중시하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오늘도 사회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위하고 항의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개인적으로 호소하는 1인 시위도 많지만 집단으로 나서는 경우도 많다. 1인 시위는 관계기관에 신고 없이 할 수 있어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 싶은 개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2인 이상의 시위는 반드시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집회의 자유는 헌법 제21조로 보장받고 있다.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못한 기업도 많으나 대체로 큰 기업에는 노동조합이 있어 노동자들을 대신해 노동조합이 매년 사용자와 단체협약을 한다. 만일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노동자의 의지가 관철되지 않고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헌법 제21조 1항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에 의해 노동조합은 집단으로 시위할 권리가 있다. 또한 헌법 제33조 1항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에 의해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노무 제공을 거부하는 파업을 주도하는 등 단체행동권도 행사할 수 있어 사용자와 타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을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사용자는 회사에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어처구니없이 노동자 편이 아닌 사용자 편에 서 있는 어용 노동조합을 만들기도 한다. 

   노동자들을 위하는 진정한 노동조합이 없다면 각 노동자는 사용자의 관대함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농노가 귀족의 자비심에 기대고, 식민지 노예가 주인이 너그러워지기를 기다리며, 상놈인 머슴이 양반인 상전이 관대하게 베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다행히 좋은 그런 귀족과 주인과 상전을 만난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지만 인간의 본능은 그렇지 않다. 귀족과 주인과 상전은 대체로 농노와 노예와 머슴을 착취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재산으로 보았으며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동물로 취급하여 사고팔기도 했다. 한 재벌의 회장은 자기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을 서슴없이 자기 머슴이라고 말했다.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못 가진 자로 구성된 사회에서 약육강식으로 표현되는 동물 사회가 아닌, 약한 자도 인간다움을 누려 모두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위계보다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세계 인권 선언

     

   최근에 일어난 가장 큰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이다.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전 지구적으로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파괴적인 전쟁으로 그 시작은 유럽으로 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다. 불과 그 20년 전에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두 번이나 큰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전쟁 후 생긴 국제연합(UN)은 세계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고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인권을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권리로 하여 1948년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세계 인권 선언은 비록 법적인 구속력은 없으나 오늘날 대부분 나라의 헌법이나 기본법에 그 내용이 포함되고 반영되어 실효성이 크다, 그뿐 아니라 1966년 12월 채택된 국제인권규약은 개인의 생존권과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그리고 선거권과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제연합에서 채택한 조약으로 1976년 3월부터 효력을 발생해 처음으로 법적 구속력을 가진 세계적인 인권 관련 국제법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1990년에 가입하여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그 내용 중 노동에 관련된 조항을 살펴보자. 가정이나 학교 그리고 직장 등 각자의 일터에서 여러분들은 아래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가?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제4조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 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한다.

제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떠한 차별 없이 동등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제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20조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23조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일할 권리, 실업상태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제24조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인 제한과 정기적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위와 같은 조항 중에서도 민주국가에서 반드시 보장돼야 하는 기본 원리로 다른 기본권보다 우위에 있는 조항이 있다. 이를 ‘우월적 지위론’이라고 한다. 이는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의 자유 그리고 예술의 자유로 이를 행사함에 불편함이 있어도 사회나 시민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는지?


노동 3권은 헌법적 권리


   집단으로 시위를 하는 행위는 시민들에게 많은 불편을 초래하므로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많은 시민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국가의 의사 결정을 시민이 통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법적으로 보장을 받는다. 헌법의 기본권으로 집회나 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그러한 집회나 시위를 함으로써 필히 따르는 교통이나 도로 통행에 따른 불편함을 여타의 시민들이 감수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시민이라면 노동조합의 집회나 시위 역시 감수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노동자들의 행동을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헌법 제33조 제1항에는 노동자는 노동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이 조항은 한 사회가 고루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아주 합리적인 조항이다. 왜냐하면 사회 구성상 약한 자들이 강한 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려면 약한 자들이 뭉쳐야 하기 때문이다. 1776년 《국부론》을 저술한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비인간적인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서 단체행동권은 반드시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조항이 없다면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어려워 사회적으로 약자인 노동자는 행복권을 추구하기 매우 어렵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불안요소가 된다.

   단결권은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는 권리와 또 그가 원하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이며, 단체교섭권은 노동자가 노동조합이나 기타 노동단체의 대표를 통해 사용자와 노동조건에 관하여 교섭하는 권리로 사용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할 수 없다. 또한 단체행동권은 사용자와 노동조합이 계속 대립되는 경우 이의 해결을 위해 노동조합은 계약에 따른 노동력을 제공하는 의무를 단체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통상적인 영업을 저해하여 사용자에게 그들의 의사를 나타내는 투쟁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단체행동권이 없는 노동조합은 그 활동이 매우 미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공무원이 그렇다.

   비록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르게 되어 있어 제한을 받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최소한의 장치인 노동 3권을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노동 3권은 현대 입헌주의 헌법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 헌법에 규정된 이후 세계 각국의 현대 헌법에 수용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헌법 제21조에서 집회와 결사에 대해서는 허가가 필요 없는 자유를 인정한다. 집회와 결사를 통한 단체행동권은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로 보장하고 있어 기업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집단적 행위를 정당하게 할 수 있고, 사용자는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따라서 사용자는 타협을 할 건지 아니면 단체행동권으로 인해 손해를 볼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물론 노동자도 단체행동권을 행사하면 무노동 무임금 정책이나 사용자의 직장폐쇄로 손해 볼 수도 있다. 

   노동 3권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1조가 선언하는 법 앞에서의 평등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으로 바로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평등성에서 출발한다. 만일 사용자가 횡포를 부리는 경우 그 직장을 그만둘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개인적으로 노동자는 사용주에 맞설 힘이 없다. 그렇게 되면 비록 사용자의 수가 적지만 그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있어 그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행동하면 그 사회는 봉건사회로 회귀하거나 또는 자본독재사회가 된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노동자는 과거 노예나 소작농처럼 권리는 없고 복종만 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민중의 분노가 쌓이면 감정이 폭발하여 민중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혁명 중에 많은 민중이 살상되겠지만 기득권층도 피해를 입는다. 이것은 사용자가 주를 이루는 기득권층에도 악몽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을 가진 소수 사용자의 횡포에 힘이 없는 다수의 노동자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뿐 아니라, 힘을 가진 자도 함께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장치인 것이다. 도둑을 잡기 위해 경찰력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도둑이 잘 안 생기도록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과 같다.

   복지정책이 잘 발달된 서유럽의 선진국들의 공통점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많이 가입할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015년 현재 노동자의 노동조합 가입률은 10.2%로 OECD 29개국 중 26위로 거의 끝에 위치한다. 이는 10명 중 9명 이상이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각종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다는 뜻으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 노동자의 상황은 좋지 않다. 


[2016.10.26. 한겨레]

   이렇게 된 주된 원인은 지난 1998년에 닥친 금융위기 이후 세계 통화기금(IMF)의 자금을 지급받기 위해 세계 통화기금의 권유에 따라 경쟁을 전면화하고 노동을 유연화하는 등 완전경쟁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절되므로 국가가 나서서 시장의 수요 공급 기능을 조절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여 생산성은 오르나 노동자 소득은 제자리가 될 수 있으며 높은 생산성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유효 수요로 미국에서는 1929년 대공황을 초래하였다. 1934년 케인즈는 “만성적인 불황을 타개하려면 국가가 개입하여 고용하고 화폐를 공급하는 등 총수요를 증대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정부의 공공지출과 화폐공급을 확대하는 뉴딜 정책을 감행하여 큰 정부가 되었다.

   모든 시민의 이익과 밀접하게 연결된 국영 또는 공영기업의 민영화와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 노동의 유연화, 그리고 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폐지하고 복지를 축소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하이에크에 기반한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를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와 영국의 대처 행정부는 각각 단체행동권을 행사한 자기 나라의 노동조합을 공권력을 이용하여 분쇄하고 그 사상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둘은 모두 알츠 하이머 병으로 죽었다. 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 시민들은 그녀의 장례식을 국장이 아닌 민영화로 대신하자고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대량파괴로 돈벌이의 수단으로 환경파괴를 가속화하여 인류 사회의 멸망을 재촉하며,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개도국의 농업기반을 파괴하여 식량위기의 주범이 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은 점점 커지고 중산층이 줄어들어 빈부의 양극화도 심해졌다.

   우리나라도 1992년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기업의 가치를 높인다는 이유로 기업은 비정규직을 양산하였고 노동자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였다. 인건비 절감으로 당장은 기업의 가치가 올라가 자본가인 주주들의 이익은 증대하겠으나 다수의 노동자는 사회 저소득층이 되고 그들을 대변할 제도적 장치도 사라져 오히려 나라 전체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2019년 8월 20일 대법원은 ‘고속도로 톨게이트 징수 노동자는 한국도로공사 직원’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국영기업인 한국도로공사가 운용하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징수하는 업무를 하는 도급업체 소속의 노동자들은 실은 한국도로공사 직원이라는 대법원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파견법에 따라 이들 노동자는 일한 기간이 2년을 넘는 때부터 이미 도로공사의 직원이 되어 도로공사가 이들을 고용할 의무가 생겼는데 이들을 해고했으니 잘못이라는 뜻이다. 한국도로공사는 톨게이트 무인 수납이 활성화되자 자회사를 만들어 전체 톨게이트 징수 노동자 6천5백여 명의 이적을 요구해 5천여 명은 소속을 옮겼으나 이를 거부한 1500여 명은 해고를 시켰다. 이 중 43명이 경부고속도로 서울요금소 지붕에 올라 고공농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를 하나의 큰 수와 여러 개의 작은 수의 합을 통해 알아보자.

     

수와 반올림


   수는 무한히 많다. 그래서 수를 표현하는 자리의 수도 무한히 많다. 이 무한한 개념은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그려진다. 실제에서는 유한의 자릿수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서 수를 저장하는 것을 살펴보자. 컴퓨터는 0과 1을 대신하는 유한개의 기억소자(memory chip)를 사용하여 수를 표현하므로 연산 과정 중에 생긴 수는 그에 맞는 자리 수만 기억된다. 즉 컴퓨터가 사용하는 수는 유한개의 자릿수를 가진 수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무한개의 자릿수를 갖는 수는 컴퓨터에서 어떻게 되나?

   유한개의 자릿수를 갖는 수는 모두 0.a 1a 2... ak×10^n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단 a1는 0이 아니다. 이때 이 수는 k개의 자릿수를 갖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123=0.123 × 10^3, 1230=0.123 × 10^4, 0.0123=0.123 × 10^-1


은 모두 3자리를 갖는 수로 표현한 것이다. 표현할 수 있는 자릿수가 오직 두 개뿐일 때 123은 어떻게 나타나나? 이 경우 1 자리에 있는 수를 처리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무조건 1자리의 수를 0으로 하는 방법과 1자리의 수가 5 이상이면 10자리의 수를 하나 더 올려주고, 4 이하이면 없애는 반올림이 있다. 반올림으로 하면


123=120, 125=130, 0.356=0.36 등


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오차가 발생해 참값과 차이가 난다. 같은 이유로 유한개의 자릿수를 갖는 컴퓨터 계산은 필연적으로 오차를 갖게 된다. 이 오차가 무시할 정도로 작으면 별 문제가 없으나, 무시할 정도의 이 작은 오차가 쌓이고 쌓여 오류가 발생하면 기대하지 못한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더하는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 ((a+b)+c) ≠ (a+(b+c)) 


   수를 더하는 과정에서 더하는 순서를 바꾸어도 그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3+4와 4+3은 모두 7로 같다. 이러한 수의 법칙을 ‘교환법칙’이라 한다. 또한 3+4+5에서 3+4를 먼저 하고 그 결과에 5를 더한 것이나 4+5를 먼저 하고 3에 그 결과를 더한 것이나 답은 모두 12로 항상 같다. 즉 (3+4)+5 = 3+(4+5)이다. 이러한 법칙을 ‘결합법칙’이라 한다. 그러므로 더하는 과정에서 그 순서는 전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한 사실이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가 우리 주변 아주 가까이에 있다. 바로 컴퓨터이다. 컴퓨터의 자판(키보드)을 이용하여 수를 입력하면 이 수는 마치 우리의 뇌가 수를 기억하듯이 컴퓨터에 있는 저장장치(기억소자, 메모리칩)에 기억된다. 만일 자릿 수가 매우 많은 수라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표기할 수 있는 한 물론 우리의 뇌는 이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컴퓨터는 우리가 표기할 수 있는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수가 무한히 많아 이를 모두 저장할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수는 무한히 많지만 컴퓨터에 있는 저장장치는 그 공간이 유한하므로 그에 맞는 자리 수의 수만 기억된다. 즉 컴퓨터는 모든 수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저장할 수 없는 태생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저장된 수와 실제의 수는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를 마무리 오차라 한다. 


“유한한 자릿수의 덧셈에서 더하는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더하는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컴퓨터는 오직 세 자리 수만 나타내고 그보다 큰 자리 수는 반올림한다고 하자(왜냐하면 컴퓨터가 아무리 많은 자리 수의 수를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그 자릿수는 유한하므로 그 결과는 같기 때문이다. 괜히 설명만 복잡할 뿐이다.). 그러면 네 자릿수 4562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반올림되어 4560으로 저장된다. 왜냐하면 컴퓨터 내부에서 4562는 소수 형식인 0.4562 × 10^4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컴퓨터는 3개의 자리 수만 나타낼 수 있으므로 마지막 2를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수는 한 자리 위로 반올림되어 0.456 × 10^4로 저장되어 컴퓨터 화면에 4560을 보여준다. 결국 4562는 4560이 되어 오차가 발생한다. 

   컴퓨터의 구조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러한 오차 때문에 컴퓨터에서 더하는 순서를 바꾸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4560+2+2+2의 값을 구할 때 더하는 순서만 바꾼  ((4560+2)+2)+2와 4560+(2+(2+2))은 그 값이 같지 않다.

   첫 번째 식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4560에 2를 더하면 4560이 되므로 이 결과에 반복해 2를 다시 더해도 그 결과는 변함없이 4560이다. 그러나 두 번째 식은 2 끼리 먼저 더한 수 6을 4560에 더하므로 그 결과 4566은 컴퓨터 안에서 0.4566 × 10^4로 표현된다. 이 컴퓨터는 3개의 자리 수만 나타낼 수 있으므로 마지막 6이 한 자리 위로 반올림되어 그 앞의 수 6이 7로 된다. 그러므로 이 수는 0.457 × 10^4이 되어 4570이 되는 것이다. 즉


((4560+2)+2)+2=(4560+2)+2=4560+2=4560

4560+(2+(2+2))=4560+(2+4)=4560+6=4570


   따라서 큰 수에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수를 반복해서 더해 보았자 큰 수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수끼리 먼저 더하여 수를 키워 놓고 나중에 큰 수에 더하면 큰 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변한다. 그러므로 덧셈을 할 때는 비슷한 크기의 작은 수끼리 먼저 합하여 그 결과를 큰 수에 합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큰 수는 사용자작은 수는 노동자


   민주적인 문화가 상실되어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업뿐 아니라 사회의 그 어떤 조직도 권력(또는 인사권)을 가진 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횡포를 부릴 때 그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개개인 노동자는 항의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잘못됨을 단체로 대응하면 횡포를 일부분이나마 막을 수 있다. 큰 수를 사용자로 보고 작은 수를 노동자로 보자. 큰 수에 작은 수를 더하면 전혀 큰 수에 영향을 주지 않듯이, 횡포를 부리는 사용자에게 노동자 개개인이 항의해 보았자 그 효과는 없고 자신만 피해 보게 된다. 결국 작은 수에 해당하는 노동자끼리 먼저 힘을 합하여 단체로 행동하면 큰 수에 해당하는 사용자는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사회에서는 세계인권선언에서 보듯이 노동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노동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학급이 있다. 이 반에 짱이 하나 있어 다른 누구도 감히 그의 잘못에 항의를 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개개인 각자가 짱한테 대들어 봤자 얻어맞기만 할 뿐 개선할 수가 없다. 선생님한테 말해본들 짱을 편애하고 있어 오히려 더 악화될 수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짱의 부하로 들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던져주는 것을 받아먹고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부른 돼지가 되거나 애완견이 되거나 새장의 새가 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소신을 지키며 버티는 것이다. 비록 배는 고프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소크라테스가 되거나 늑대가 되거나 들판의 꿩이 되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은 비록 처음에는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같은 처지의 여러 학우들이 힘을 합쳐 함께 대항하면, 그가 선생님의 비호 아래 짱의 자리를 내놓지는 않을지라도 함부로 학우들을 대하지는 못하게 된다. 힘이 약한 자들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 그래야 정의롭지 못한 사용자나 권력자의 횡포를 일부나마 막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그리고 단체행동권은 사회적 약자들 다수가 모여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현하게 함으로써 동등하게 권력자나 사회적 강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업무방해죄와 손해배상청구권


   그러나 아무리 힘이 약한 자들이 뭉쳐도 이와 같이 뭉치는 것을 교묘히 법으로 통제하면 효과를 발휘하기 매우 어렵게 되고 오히려 심각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시절 노동자들의 파업이 나라의 이익을 해친다는 이유로 유럽은 파업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일제강점기에도 이러한 법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럽도 일본도 모두 이러한 법을 폐지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러한 법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위계(僞計) 또는 위력으로써 사람의 업무를 방해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314조 인 ‘업무방해죄’이다. 

   이 법으로 인해 회사는 파업을 하는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이나 재산을 가압류하는 소송을 마구 할 수 있게 됐다. 1990년부터 기업은 파업하면 불법파업이라 하여 그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남발하여 그 결과에 따라 노동자의 재산을 가압류하는 등 많은 노동자들이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해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다행히도 2011년 대법원은 ‘불법파업이라도 전격성과 막대한 손해가 인정되지 않으면 업무방해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 제동을 걸었다. 파업을 하면 업무가 방해되는 것은 당연함에도 마구잡이 소송을 하게 만드는 일방적인 기업 편의의 이러한 업무방해죄는 당연히 폐지해야 한다. 

   아울러 손해배상청구권도 제한되어야 한다.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 3권이 업무방해죄나 손해배상 청구 소송과 같은 하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1991년 10월 최병렬 당시 노동부 장관의 “노사분규 중 폭력 행위에 대해 불법과 합법을 가리지 않고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도록 강력히 지도하라.”는 지침이 1994년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손해배상 청구에 의한 가압류는 기초생활비까지 압류하여 노조를 무력화하는 핵심 매뉴얼이 되었다. 그러나 2005년 민사집행법 개정으로 손해배상 가압류 대상자라도 150만 원 정도의 최저생계비는 보장받게 되었다. 2017년 6월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의 시정 권고도 받았다. 노동 3권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나 손해배상으로 인한 가압류는 이러한 안전장치마저 걷어 낸 것이나 다름없어 위헌이나 다름없는데도 그동안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탄력근로제


   현 근로기준법 제51조(2018.2 개정)에 따르면 사용자는 노동자에 대해 1주 단위로 법정근로 40시간을 넘어 최장 52시간까지 노동시킬 수 있다. 단 연장근로는 통상임금의 150%를 지급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1주당 52시간까지는 초과 수당을 주고 노동을 시킬 수 있으나 이를 초과해서 일을 시키면 불법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는 정시에 퇴근할 수 있고 야근이나 휴일근무 등을 강요당하지 않아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 운이 별로 없는 한 정치인이 주장했던 ‘저녁이 있는 삶’을 모든 노동자가 누릴 수 있게 하려고 제정하였지만, 더 일 할 수 있는 연장 근무 수당이 줄어들어 수입이 줄어든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법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1주일 단위가 아니라 3개월 단위였다.

   그러자 기업에서는 노동시간 축소에 대해 1주 단위 노동시간을 생산 물량에 맞춰 탄력적으로 노동시간을 조절할 수 있게 허용하는 탄력근로제를 주장하여 현 3개월의 기간을 6개월로 늘리려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감이 1년 내내 균일하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별로 없다가도 어떤 때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수입이 줄어들고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럼에도 2019년 2월 19일 “대통령 산하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기로 합의”했으나 결국 통과되지는 않았다. 왜 기업은 찬성하고 노동계는 반대할까? 그 이유는 기간을 연장하면 사용자는 기존 노동자를 연장 근무시킬 수 있어 노동자의 추가 채용과 임금 지급 규모를 줄이는 등 노동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반대로 노동자는 연장노동이 줄어들어 임금이 저하되며 과도한 노동으로 건강권 또한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시간당 인건비가 1만 원이고 편의상 4주를 1개월이라고 하자. 불규칙한 회사 일감에 의하여 한 노동자가 “처음 3개월은 주 52시간 일을 하였고, 다음 3개월은 주 28시간 일을 하였다”라고 하자. 그러면 총 노동시간은 960시간이다. 탄력 기간이 현행대로 3개월이면 처음 3개월인 12주에 해당하는 법정시간을 초과한 매주 12시간, 즉 모두 144시간에 대해서 50%의 임금이 더 지급되어 노동자는 72만 원을 더 받은 1032만을 받게 된다. 그러나 탄력 기간이 6개월로 연장되면 평균 매주 40시간이 되므로 연장근로수당은 한 푼도 못 받아 소득은 오직 960만 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회사에 통상적이지 않게 업무량이 갑자기 폭증한다거나 연장근로를 대폭 늘리지 않으면 사업상 중대한 지장을 줄 일이 생기면 52시간을 초과하여 노동을 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탄력 기간이 6개월로 연장되면 “처음 3개월은 매주 40시간, 다음 3개월은 매주 64시간, 그다음 3개월도 매주 64시간, 다음 3개월은 매주 40시간 노동”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6개월 평균 매주 노동 시간이 52시간이므로 추가 임금만 더 주면 된다. 하지만 노동자는 6개월 연속 매주 64시간의 중노동을 할 수 있게 되어 건강권에 심각한 침해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탄력 기간을 줄일수록 노동자에게는 이익이고 늘릴수록 기업에 이익이 된다. 법의 취지에 맞게 탄력 기간을 1주일에 가깝게 택하면 좋으련만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쉽지 않다. 양자 합의로 적절한 기간을 택하면 되는 데 개별 노동자가 이것을 할 수는 없다. 노동조합이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국제노동기구 핵심 협약


   우리나라는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ILO)에 1991년에 가입하였다. 현재 187개 가입국 중 143개국이 모든 핵심 협약을 비준하였다. 우리나라는 ‘아동노동 금지’와 ‘차별 금지’ 협약은 이미 비준을 했으나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협약은 비준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협약을 비준하는 것은 국제무역이나 투자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한 기본적인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것이며, 국내의 노사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비준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도 비준하지 않아 유럽이 분쟁 해결 절차를 개시하려 하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노조법 제2조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다.”이다. 비준을 하게 되면 이 법을 고쳐야 한다. 그러면 군인과 경찰을 제외한 모든 공무원이 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 지금은 해결되었으나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이 법외 조직이 된 것도 바로 이 조항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 단체와 사용자 단체는 행정당국에 의해 해산되거나 활동이 정지되어서는 안 되며, 군 복무의 대체 복무나 징역형 일부가 강제노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파업 시 대체근로를 전면 허용하는 것 역시 국제 노동기준에 반한다. 

   이러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사용주들의 압력으로 법 개정은 물론 비준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2021년 2월 이 협약의 비준 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하여 법 개정만 남겨놓았다.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2019.5.22. 경향신문]

진정한 노동조합이 없다면?


   경제단체 설문조사 결과 노동운동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시민은 10%뿐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저조할까?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역사도 짧을뿐더러 좀 특별한 역사를 가졌다. 일제 식민지 근 40년, 국토 분단으로 인한 남북 대립이 70여 년, 군사독재 정권 30여 년 동안 노동을 무시하는 교육과 광고에 길들여진 많은 언론의 편향된 기사에 힘입어 대부분의 노동자는 인권유린은 물론이고 착취당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경제 발전은 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노동 관련 정부 기관은 노동자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늘 기업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한국 노동운동은 그렇게 과격하거나 투쟁적이지는 않았고 일부 소수의 노조가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이것을 정부와 언론이 침소봉대한 결과 아닐까? 

   2017년 기준으로 노조 가입률은 10.7%이며 우리나라 노조 중 98%는 한 시간의 파업도 없이 교섭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OECD에 가입한 나라 중 노조 조직률은 최하위이고 노동시간과 저임금 그리고 임금격차는 최상위에 있다. 노동법을 개정하여 노동조합을 더 많이 조직하고 힘을 더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거시적으로 볼 때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기업도 편해지며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러나 과거 국회의원을 지낸 이인제는 “파업은 핵폭탄이다”, 그리고 김무성은 “노조의 쇠파이프”라는 발언으로 노동조합을 혐오하고 부추겼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는 오히려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40시간의 노동이나 휴일수당과 연장근로수당 그리고 최저임금은 노동자들의 투쟁 덕분이라며 “미국인이요, 노조에 가입하라” 하였고, 우리의 대통령 문재인은 “노조 결성을 막는 것은 부당노동행위”라고 말하였다.

   노동자들을 위하는 진정한 노동조합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해고가 자유로워진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무한 경쟁에 휘말리고 인건비는 줄어들어 소득이 줄 수밖에 없다. 인건비 절감으로 당장은 기업의 가치가 올라가 주주들의 이익은 증대되겠으나  노동자는 저소득층이 되어 나라 전체에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봉건사회로 회귀하거나 또는 자본독재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 노동자는 권리는 없고 복종만 하며 서로 감시하는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결국 민중이 분노하게 되고 이로써 민중혁명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노사 모두에게 악몽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법칙 제1호는 평등


   ‘대수(大數)의 법칙’이 있다. 주사위를 던질 때 1이 나오는 확률은 1/6이다. 그렇다고 6번 던지면 한 번은 꼭 1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100번 던졌는데도 1이 한 번도 안 나올 수 있다.  무한히 많이 던질 때 1이 나오는 확률이 1/6에 가까워진다. 2도 그렇고 다른 수도 다 그렇다. ‘A가 있으면 A가 아닌 것이 반드시 있다.’ 이 얼마나 평등한가?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있으면 사용주도 있고 자본이 있으면 노동이 있는 것이다. 이 둘은 누가 높고 누가 낮은 우위가 있는 것이다. 서로 평등한 관계이다. 이러한 평등의 법칙을 구체화한 것이 주역(周易)에서 거론된 음양(陰陽)의 법칙이다.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된다.”는 일음 지일양지(一陰之一陽之)란 음양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부족한 것을 도와주는 보완적 관계를 의미한다. 즉 자본과 노동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동등하게 서로 부족한 것을 도와주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자본과 노동의 평등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직이라 볼 수 있다.

   명심보감은 ‘범사노복에 선념기한이라(凡使奴僕 先念飢寒)’고 가르친다. 무릇 사람을 부릴 적에는 우선 그들의 춥고 배고픔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용주가 노동자를 부릴 때는 우선 그들이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소득과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저임금으로 부려 이득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적정한 임금을 주어 상생하는 것이 고용주에게도 좋다는 뜻이다. 직원들을 배고프고 춥게 하면 그만큼 일의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고용주는 당장은 지출이 적어져 이익을 보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수익이 더 떨어져 손해를 보게 된다.

   시민 개개인은 국가의 폭력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힘을 뭉쳐 함께 촛불을 들면 국가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 촛불 하나하나는 무기력하나 그것이 열이 되면 단체를 변화시키고, 백이 되면 마을을 변화시키며, 천이 되면 도시를 변화시킨다. 백만의 촛불은 나라를 변화시킨다.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며 실천하는 지성인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인류가 저지른 가장 참혹한 사건들은 불복종이 아니라 복종에 의해 일어났다. 반면 인류가 이룬 가장 위대한 해방은 복종이 아니라 불복종에 의해 일어났음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분노한 민중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고 다 함께 행동할 때 새롭고 억누를 수 없는 힘이 생겨난다.”라고 말했다. 불복종이 힘을 가지려면 먼저 합쳐야 한다.

   제국주의 속성을 지닌 강대국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침탈에 작은 나라가 각각 대응하기는 역부족이다. 유럽이 통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고, 중동 아시아가 연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고, 남아메리카가 통합되어 한 목소리를 내고,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가 또한 한 목소리를 낸다면 힘이 약한 작은 나라라고 강대국의 침략에 무조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힘이 있는 자와 권력이 있는 자의 횡포에 약자들이 맞설 수 있는 것은 약한 자들이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 내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민주사회에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힘이 있는 자나 권력이 있는 자에게 빌붙어 살려하는 자들이 항상 있어 단결을 무산시킨다. 이래저래 힘이 없는 자들이 인간답게 살기 힘든 것은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있지만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도록 무관심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비슷한 위치의 또 다른 사람들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무력화되면 당장 해고가 자유로워진다. 이로 인해서 상품가치는 경쟁력을 가져 기업의 가치를 높여주어 기업에 투자한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한편 노동자들은 무한 경쟁에 휘말리고 인건비는 줄어들어 소득이 줄게 된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하여 사회의 중산층을 줄어들게 한다. 이는 사회에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만든다. 우리나라도 싫으나 좋으나 미국을 비롯해 유럽이나 중국 등과 이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거나 또는 하고 있다. 넓은 시장을 가졌다고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다국적 기업이 침투할 수 있다. 이제는 민중을 절대적으로 위하는 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한 힘없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하워드 진은 말한다. “분노한 민중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고 다 함께 행동할 때 새롭고 억누를 수 없는 힘이 생겨난다.”라고. 불복종이 힘을 가지려면 먼저 합쳐야 한다. 무기력한 촛불 하나가 10이 되면 단체를, 100이 되면 마을을 그리고 1000이 되면 도시를 변화시킨다. 백만의 촛불은 나라를 변화시킨다. 다수의 약한 자들이 소수의 강한 자들과 그나마 평등하게 살 수 있으려면 서로 연대의 끈을 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


시사 및 읽을거리


황성환, 『아메리카 제국의 멸망』, 민플

경향신문 2015.9.7.  이인제, “파업은 핵폭탄이다” 

         2015.9.9.  오바마, “미국인이여, 노조에 가입하라”

         2017.8.17. 문재인, “노조 결성 막는 부당노동행위”

         2018.4.11. “노조 파업에 무차별 업무방해죄 기소 제동 걸렸다”

         2019.5.22.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내용”

한겨레 2016.10.26. 노조 가입률

프레시안 2015.10.23. 김무성, “노조 쇠파이프” 

시사인 2019.2. 594호 “노동자 목 죄는 손해배상 가압류 소송”

       2019.3. 599호 “탄력근로제 합의 그것을 알려주마”

       2019.3. 600호 “대한민국 노조법은 ILO와 싸운다”

작가의 이전글 단독주택 ‘우송재’ 삶의 이야기(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