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방우주나 Jun 23. 2019

선의와 충돌하는 자유

영화 <칠드런 액트>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를 꿈꿀 때면 그것을 선의 지평, 합당하고 합리적인, 나아가 본질적이기까지 한 것으로서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을 따르자면, 자유는 선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자유는 선이고, 선은 자유이다. 자유로이 자신의 행동을 영위할 수 있는 주체는 -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그렇기에 자유와 생명은 서로 충돌하지 않으며 그것은 공존이 아니라 상호 보장하는 '원칙'으로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원칙은 언제나 당연히 지켜지는가? 이 영화는 이에 질문을 던진다. 

 <칠드런 액트>는 영국의 '아동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백혈병에 걸린 한 소년, 애덤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수혈을 거부한다. 하지만 수혈이 동반되지 않는 치료는 소년의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소년을 치료하는 병원은 이 소년이 미성년자이며, '미성년자에 대한 복지는 미성년자의 선택보다 앞선다'는 아동법의 원칙을 근거로 수혈을 거부하는 소년의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주인공 피오나 메이는 이 소송의 판결을 맡은 판사이다. 

판사와 소년

 법정에서 소년의 생명과 자유는 충돌한다. 소년에 대한 복지를 근거로 수혈에 찬성하는 병원 측은 소년의 생명을 담보로 자유를 추구할 권리는 없다고 말한다. 소년의 자유를 근거로 수혈에 반대하는 부모 측은 수혈을 하지 않는 것은 소년의 선택이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치료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환자의 기본권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 빈틈이 있다. 바로 반대하는 측이 소년의 의사가 아니라 부모의 의사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정곡으로 찌르며 메이 판사는 '이례적으로' 소년의 병실에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칠드런 액트>는 틈을 통해 새롭게 서사를 열어낸다. 애덤과 만난 피오나는 새로운 연결점을 시사한다. 영화는 이런 연결점을 통해 소년의 비극을 폭넓게 확장한다. 자유와 충돌하는 생명, 생명에 어긋나는 자유는 당연시되었던 기준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애덤을 지켜보는 피오나의 입장에서 우리는 그 무력한 원칙을 바라보는 관찰자로 있다. 그리고 애덤의 선택에 영향을 주지만 선택을 대신할 수 없는 무력한 타자의 입장에 있다.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 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잭은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타자에 대한 인간적 입장을 다루기 위해 영화는 피오나의 사랑에 대해 논한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지속해서 등장하는 피오나의 남편 잭은 부부관계를 만족하지 못하겠다며 외도를 떠난다. 잭이 피오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성적인 관계이다. 물론, 잭이 말하듯 '정신적인 사랑'을 포괄하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잭의 요구는 섹슈얼리티에 머무른다. 그리고 피오나에게 다른 사랑을 표현하는 애덤이 있다. 피오나의 판결을 통해 삶과 삶의 목적을 찾게 된 애덤은 계속해서 피오나를 스토킹 한다. 피오나를 스토킹 하는 애덤의 모습, 그런 '선을 넘는' 애덤의 행동을 최대한 친절하게 받아주는 피오나의 모습은 두 사람의 관계가 마치 '정신적인 사랑'인 것처럼 보여준다. 이 맥거핀은 영화 전체의 내용과 적절히 반응하며 다층적인 의미를 만들어 낸다. 

 애덤은 피오나에게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피오나를 자신이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부모'로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애덤은 피오나의 출장지에서 쫓겨나며 피오나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한다. 이는 잭이 요구했던 '성적인 사랑'으로 여겨진다. 피오나는 애덤의 고백 앞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피오나의 말 한마디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그냥 소년이란 말이야." 피오나에게 있어서 애덤은 자신이 맡았던 소송의 피고였으며, 한 소년에 불과했다.

핀 화이트헤드의 연기는 독특하다.

 피오나와 애덤이 피오나와 잭보다 복합적인 관계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맥거핀은 피오나의 감정을 보다 깊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자신을 믿고 따르며 추종하는 미성년을 대하는 방법에서 피오나는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온정적인 방법을 택한다. 그는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함께 부르며,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소년을 최대한 이해하고 회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피오나는 '아름다운 소년'이라고 애덤을 언급한다. 이러한 피오나의 행동들이 모두 '애덤'을 위하는 게 아니라 소년을 위했다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맥거핀이 작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피오나와 애덤의 관계를 걷어내고 성년과 미성년의 관계로서 두 사람을 조명한다. 

 '온정적'으로 피오나가 소년에게 베푸는 사랑은 소년에게 생명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만든다. 사회적인 사랑, 이타적인 행동, 곧 '복지'를 통해 애덤은 자신의 생명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지켜낸다. 이 사랑은 심지어는 종교적인 것보다 포괄적이어서 애덤의 신념을 넘어선다. 애덤에겐 신의 자리가 메이로 대체된다. 메이의 온정적인 사랑은 애덤이 바라는 특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또한, 메이의 사랑은 그 특정을 채우고도 남는 보편의 사랑이 아니다. 이 어긋남은 애덤이 자신의 생명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의 근거가 된다. 신의 사랑으로도 온전히 채우지 못한 애덤의 공허는 무엇도 채울 수가 없다.

 피오나의 선의, 온정적인 사랑은 결국 애덤의 죽음을 결과로 낳게 된다. 결과만 보자면 단순히 피오나의 생각과 판단이 무력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칠드런 액트>가 날카롭게 파고드는 지점은 이러한 결과가 아니다. 이 영화는 왜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를 찌른다. 다시 말해, 피오나의 선의가 어떻게 좋지 못한 자유로 이어졌는지를 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생기와 비극은 복잡한 파장을 일으키며 각각이 피어오른다. 그러니 누구도 함부로 잘못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열렬히 피었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사로 쓴 '사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