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를 보았다. 일상을 수수한 부분들을 찾아 퍼즐처럼 맞추는 듯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매력은 이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상적인 이야기 하나하나에 모두 생각들이 담겨있다. 긴 시간을 한 곳만 비춰주는 장면에도 흔들림 없는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 깊다. 특히 요시노 할머니(키키 키린)의 능청스러운 구시렁거림은 정곡을 찔러서 유쾌하고 또 씁쓸한 면이 있다. 영화는 억지로 위로하지도 굳이 그러지도 않는다. 단지 곁에 있음으로써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독이 그려낸 가족처럼.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처럼 속일 수 없는 영화다. 대단한 반전을 주는 것도, 극한의 감정을 주는 것도 아니다. 태풍이 지나갈 때의 집안처럼 소란스러운 면면들을 지나치고서 조용한 여운들이 남는다. 화사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상온의 빛깔을 유지하며, 오늘의 태풍을 지나는 한 인물을 길게 카메라로 찍는다. 평범하고 평범해서 여기저기 어디서나 볼법한 그런 료타라는 아저씨를 찍는다. 과거에 미련을 가진 채 마음만 앞서 충실히 무언가를 하지 못하고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라는 질문을 메모하는 꾀죄죄한 아저씨 말이다.
료타는 스스로를 소설가라고 말하는 흥신소 직원이다. 덥수룩하니 수염을 기르고 후줄근한 옷을 입고 다니는 그는 15년 전에 기억이 날까 말까 한 문학상을 받고 아직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다. 취재를 위해서 흥신소를 한다고 한다지만 월세를 못 낼만큼 돈이 없다. 돈을 위해서 어머니의 집을 구석구석 뒤져서 복권도 챙기고 팔 만한 물건을 찾는 지지리도 못난 아들이기도 하다. "돈 필요하니?" 료타의 어머니 요시노가 빈 집에 있던 그를 보고 한 말이다. 료타는 간직할 만한 아버지의 유품을 찾으러 왔다는 궁색한 변명을 댄다.
그에게 돈이 없는 이유는 그의 버릇에도 있을 것이다. 흥신소에서 이중 거래를 통해 받은 뒷돈을 경륜장에 모두 써버리곤 같이 있던 동료에게서 빚을 내는 그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전 아내 쿄코 이혼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아들 싱고를 만나는데 그가 가진 것으론 한 달의 한 번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씁쓸한 현재에, 시시한 현재에 그는 도박을 다시 찾는다.
별 볼 일 없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태풍이 지나가고 그는 달라질까? 그는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의 망가진 우산처럼 길거리에 나뒹구니를 것만 같은 사람이다. 현재를 어떻게든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를 보며 현재를 '뒤로 걷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도 료타가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겪은 이야기는 딱히 멀리 있지 않다. 우리에게도 있는 이야기다.
뭔가 닮은 아빠와 아들, 상반되는 전 아내
돈이 없어서 물건을 팔러 간 전당포에서 그리고 돈을 빌리러 간 누나에게서도 료타가 찾는 것은 씁쓸한 아버지의 재현이다. 없는 거짓말까지 하며 돈을 구하고 다닌 아버지의 모습과 자신이 묘하게 겹친다. 료타는 어릴 적부터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변변히 해내는 일 없이 돈을 구하러 돌아다니던 그의 아버지처럼 료타도 변변히 해내는 일이 없다. 한 달에 한 번 싱고를 만나는 날도 돈이 모자라다. 그래도 자기는 굶으면서 아들에게 모스버거를 사주고 흠집을 내서 돈을 깎은 미주 노를 사주는 그는 처절하다. 마치 없는 병을 만들어가며 돈을 받았던 그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는 로또를 아들에게 사준다. 3억 엔이라는 거금을 꿈꾸는 3백 엔짜리 희망을. 로또는 료타가 간직해온 꿈과도 같으리라. 언젠가 크게 소설가로 성공하리란 료타의 꿈 말이다. 성공해서 요시노에게 커다란 집을 사주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사는 그가 바라기만 하던 꿈. 후에 싱고가 요시노와 이야기하며, "3억엔을 따게 되면 우리 같이 살까요?"라고 물음으로써 싱고는 료타를 닮는다. 료타의 꿈이 전달된다. 홈런이 아니라 볼넷을 노리는 것처럼. 싱고는 영락없는 료타의 아들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는 그렇게 이어진다. 료타는 잠이 오지 않던 밤 아버지의 제단에 향을 꽂으려 한다. 향을 꽂는 모래 사이사이에 타고남은 향들이 남아 잘 꽂히지 않는다. 그는 모래를 부어 놓고 과거의 향들을 하나하나 집어낸다. 마치 과거 아버지의 기억을 집어내듯. 자신이 싫어했고, 닮기 싫었고, 시시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하나씩 하나씩 들어낸다. 선잠에서 깬 요시노가 료타의 곁으로 와 말을 건다. 료타는 덤덤하게 못 했던 이야기를 한다. 시시한 어른이 되어 미안하다고. 요시노는 여전히 능청스레 그럴 수도 있다며 다독이고 "행복이란 무언가를 버려야만 얻는 것이다."고 말한다. 요시노는 아직 과거에 미련을 두는 아비를 쏙 빼닮은 료타가 안쓰럽다.
더 늦은 밤 우비를 입고 비가 몰아치는 밖으로 나가는 료타와 싱고. 료타는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을 전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그 아버지의 역할이 되어 싱고와 태풍이 오는 밤 미끄럼틀 아래에서 먹는 과자와 이야기. 자신이 싫다고 말하는 아들 싱고. 태풍이 몰아치는 밤 얼마 남지 않은 부자의 시간은 과거와 겹쳐지며 흘러간다.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쿄코와 요시노는 이별을 준비한다. 가족인 척 들어와 한밤을 자고 한 방에서 자더라도 더 이상은 아닌 것일까. 가족이라 특별한 '스시의 날'이 앞으로의 달력에는 없다. 더 이상 그들의 '가족'이었던 과거는 끝맺었기에. 교차되는 두 입장 아래 요시노는 능청스러울 수 없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되어버린 현재를 슬퍼한다. 함께하고 싶지만 이미 돌아서 가버린 마음과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음은 억척스러운 태풍을 사이에 두고 있다. 요시노는 료타가 본인에게서 악필만 닮고 다른 것은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며 쿄코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멋쩍게 말한다. 그의 아비를 쏙 빼닮은 료타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부자를 찾으러 온 쿄코, 태풍이 모질게도 치던 밤 가족은 마지막 시간을 가진다. 싱고가 잃어버린 로또를 비를 맞아가며 찾으면서. 비에 흠뻑 젖으면서까지 찾으려 한 로또는 료타의 꿈이었다. 가족이 함께하고 어쩌면 쉽게 잘 되길 바라는 못난 꿈. 그래서인지 모질게 치는 비바람을 가족들이 함께 맞으며 로또를 찾는 장면은 짠하다. 가족이 역경을 버티면서도 흩어진 희망을 하나하나 찾는 것 같아서. 언젠가 가족이 다시 모일 수도 있는 희망을 남기는 것 같아서.
태풍이 지나가고 날은 맑게 갠다. 헤어진 아버지의 옷을 입고 료타는 길을 나선다. 고상했던, 태풍 속에서도 먹을 갈던 아버지의 벼루를 가지고 돈을 마련하러 전당포에 들리지만 그는 왠지 벼루를 팔고 싶지 않다. 아버지의 유품을 간직하며 료타는 싱고에게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태풍이 지나가며 그는 어떤 사람이 된 걸까.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잡는 화면 앞에 놓인 망가진 우산들이 보인다. 비록 태풍이 지나가며 망가지고 어딘가 부러진 우산들이 모여있다. 우산은 태풍을 겪으며 서로 다르게 망가졌지만 누군가가 맞아야 할 비와 바람을 대신 막아주지 않았을까. 그렇게 망가져선 만족스럽게 모여있는 건 아닐까. 그런 우산들을 뒤로하고 료타는 멀어져 간다. 망가져버린 것들을 놓고 새로운 길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