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글북>
디즈니의 리부트 영화 중 하나인 [정글북]이다. 모글리 역할을 제외하면 화면에 가득한 정글이 모두 CG로 만들어졌다는 놀라운 영화다. CG로 만들어 낸 정글의 표현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만큼 정글이라는 디지털이 미치지 못한 영역이 디지털로 세세히 묘사되는 것은 묘한 느낌을 준다. 또한 새로운 영상 분류의 등장을 알린다. 모글리만이 실사인 실사 영화는 새로운 방식의 영화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디즈니는 [정글북]의 리부트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방식을 시험하고있다. 왜 디즈니는 CG로 만든 실사영화의 방식을 택한 것인가. [겨울왕국] 같은 세련된 애니메이션으로는 부족했던 것인가?
[정글북]의 중심은 단연 모글리이다. 그러니 모글리를 따라 [정글북]을 보자. [정글북]에서 인간인 모글리가 만나는 모든 동물들은 CG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런 동물들, 실제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내어 찍는 방식은 인간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런 정글 속에서도 모글리는 외로운 '인간'이다. 그리고 모글리는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자신은 늑대의 무리에서 자란 늑대이고 싶다. 그렇지만 모글리는 다른 늑대들보다 성장도 달리기도 느리다. 어린 늑대들처럼 금방 크지도 않고 그들처럼 빠르게 달릴 수 없다. 그러나 모글리가 원하는 늑대의 일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과도 같다. 모글리가 자연스레 사용하는 인간의 정체성,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은 늑대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정글의 어떤 동물도 모글리가 늑대의 일원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정글의 세계에서 이상한 것은 모글리다.
모글리의 인간성은 때론 이용당하고 때론 동경받는다. 모글리는 곰 바루를 만나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존중받는다. 바루의 입장에선 모글리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모글리는 바루를 만나며 도구를 마음껏 사용한다. 그리고 루이를 만나며 자신이 가진 정체성, 인간의 도구와 불을 다루는 힘에 대해 깨닫게 된다.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강력할 수 있는지를 알게된다. 그리고 모글리는 불을 통해 쉬어칸과 적대한다. 아켈라의 복수를 위해 쉬어칸과 싸우는 것이다. 모글리는 불을 통해 쉬어칸과 싸워 이긴다.
모글리는 아기 코끼리를 구하는 것처럼 바른 일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도움은 후에 모글리에게 돌아온다. 정글을 덮은 불은 코끼리들의 도움으로 진압된다. 그리고 모글리는 늑대 부족의 일원으로써 인정받는다. 정글의 모두를 위협하던 쉬어칸을 모글리는 당당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모글리는 자신의 다름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맞선다. 이후 모글리는 나무를 타는 등 다른 방식, 자신만의 방법으로 무리에 적응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자신이 가진 정체성, 개성을 바른 일에 쓴다면 다른 이들이 다름을 인정해주리란 메시지로 보인다. 나아가 인간이 가진 도구를 만들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극대화시켜 파괴적인 일에 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원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바른 일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놀라운 것은 [정글북]의 시선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다. 단지 동물이 말을 한다는 것이 '인간 중심적'이라는게 아니다. CG의 발전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낸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세계는 사람의 시선에서 보는 동물과 자연을 이야기한다. 모글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처럼. 동물들의 행동 방식은 재현되지 않고 표현된다. 동물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까지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으로 표현해낸다. 그리고 나서는 인간의 방식으로, '우리가 자연한테 잘하자.'는 식이다. [정글북]은 CG로 그려낸 '실사 같은 동화'에 머무르기에 설정된 한계일까? CG로 만들어진 정글은 무자비하지만은 않다. 디즈니의 다른 동화들만큼이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유쾌한 바루의 노래처럼 말이다. 뮤지컬 같은 표현방식 또한 사용된다. 이는 디즈니가 추구하는 방식에 잘맞고 그들의 방식으로 잘 표현된다고 느꼈다. 목소리의 울림은 [정글북]에서 따뜻함을 느껴지게끔 한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자연은 제3자이거나 배경 양식에 불과하다. [정글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하는 이야기이지 정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정글북]에서의 정글은 CG로 표현된 방식처럼 이야기를 드러내는 장소나 표현 방법에 불과하다.
이것은 디즈니가 새롭게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전 실사 영화를 보아왔던 (실제 곰을 촬영한 영상을 봐왔던) 사람들은 새 방식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실사 영화'에서는 사람은 관찰자나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왔었다. 자연의 이야기 자체와 구성을 따라왔다.(다큐에서 자연을 이야기 할 때) 자연의 이야기를 봐온 것이고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 보여주는 것이다. 진짜 곰처럼 생긴게 춤을 추며 애랑 놀아주니 얼마나 이질적인 광경인가. 새롭게 추구하는 디즈니의 방식은 '재해석된 자연'이 아닐까. CG로 표현해낸 '사람처럼 행동하는' 정글의 동물들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다. 애니메이션의 방식에서 차용한 것처럼 현실은 재해석되어 표현된다. 꾀나 현실적인 외형으로.
그러나 생생한 정글의 재현은 이상한 역설을 남긴다. 자연을 생생히 표현해낼수록 실재하는 자연의 모습은 옅어진다. 어쩌면 남아 있는 자연그대로의 모습은 당신의 하드드라이브에 있는 전자기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남긴다. 실제하지 않는 동물들이 불에 대한 두려움을 표하는 것은 영화 속의 세계와 영화 밖의 세계를 관통하는 역설이다. 인간이 가진 두려움을 CG로 만든 영화로 투영하는 것은 아닐까. [정글북]은 사람의 이야기를 자연의 탈을 쓰고하는 영화다. CG로 창조된 자연의 외관을 쓴 동화 작가의 이야기다. 디즈니는 이런 방식을 새롭게 차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즈니는 여러 동화의 실사화를 예고 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미녀와 야수]이다. 이러한 방식이 '편협한 인간 중심적 시각'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쨋거나 이야기는 인간 중심적 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동화화'는 왜곡의 여지가 있다. 동화스러운 느낌을 위해 바루나 바기라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다소 고정적인 선입관을 만든다. 문화적 결정체인 영화가 미치는 사고적 영향력은 무시할만한게 아니다. 그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현실에서 다소 떨어진 영역과는 달리 '실사 영화'라는 카테고리에서 현실 반영은 필수적인 요소다. 만약 현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과하게 표현한다면 [미녀와 야수]가 보여주는 '현실'은 현실과 동떨어질 수도 있다.
당연히 디즈니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고민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전혀 새로운 표현 방식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펼치기란 힘든 것이다. 디즈니의 [정글북]에서는 디즈니의 새로운 방식에 대한 고민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동물들의 말과 으르렁거림을 섞은 표현 방식이나 동물들의 걸음걸이, 움직임을 통해 보여주려는 방식 등의 현실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들 말이다. [정글북]은 앞으로의 영화들을 예고하며 자신들의 방식을 실험하는 단계로 보인다. 그럼 [겨울왕국]만큼이나 모든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디즈니의 실사 영화들을 기대하며 [정글북]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