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는 사랑

영화 <연인>에 이어서

by 골방우주나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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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인]에 대한 추천글이자 짧은 감상평은 남긴 바가 있다. 본 글에서는 [연인]의 이야기 선에 따라 영화를 찬찬히 훝어보며 생각나는 여러가지를 써보고자 한다. [연인]은 제목처럼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이 연인에 관련된 사회, 경제,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그렇지, 연인의 사랑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다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들처럼 연인 또한 가족이나 환경이 넘어서는 안될 벽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벽에 부딪혀 상처입고 떨어진다. 자그마한 틈으로 밀애를 나누는 것 외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연인]에서 남녀는 익명으로 등장한다. 이름불러서 포착할 수 없는 서로는 프랑스인 여성, 백인, 중국인 남성, 아시아인으로 불리고 분류된다. 사회적 계층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계층 구성원의 일부 인 것이다. 1920년 대 식민시대의 식민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사이에 있는 그녀와 그다. 그녀는 지배층에서도 돈이 없어 피지배층과 같은 기숙사를 쓰는 지배층의 수직적 구조에서 가장 아래에 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다른 백인들에게 이용당하고 사기를 당한 이야기는 그녀의 어머니가 받았던 지배, 억압의 충격이다. 백인이라는 지배층에 있는 그녀의 어머니도 다른 백인들에 맞서 무기력하게 당하고 말았다. 반대로 중국인 남성, 그는 피지배층인 아시아인 중에서도 부를 거머진 사람이다. 피지배계층 구조의 꼭대기에 있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기사가 있는 차를 타고다니며 깔끔한 슈트를 입고다닌다. 그의 행색은 백인보다 더욱 백인 같다.


넘어설 수 없는 문화적 간극을 두고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어린 백인 여성이라는 강하지 않은 지배층의 역설은 영화 내내 이미지로 제공된다. 언제나 일을 하고 있는 아시아인들 사이로 그녀는 홀로 프랑스인으로 그 사이를 걸어간다. 현지인들의 배를 타고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과 언제나 상반된다. 또한 제인 마치의 분위기는 소녀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난간에 발을 툭 얹은 세상을 지루해하지만 모르는 누군가와 하룻밤과 같은 욕망이 살아 숨쉬는 그녀이다. 그녀에겐 세상이 지루한 이유가 몇몇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일 것이다. 마약 중독에, 그녀가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을 보고 즐기는 오빠와 그런 오빠에게 맞서지 못하고 한심하게 매일 울기나 하는 남동생이다. 두 형제는 아이 같다. 유아기적이다. 성숙하지 못하다.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거나 무너진 채 산다. 몰락한 지배계층의 여실한 일원들이다.
그런 그녀의 가족들과 중국인 남성이 만난 장면은 그들의 위선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지배층이라는 자존심과 허영을 위해 차려입은 모습과 달리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대는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 와중에 자신의 지배층스러움을 이야기하는(영국 유학 이야기) 중국인은 얼마나 무상하던지. 모순이 부딪히는 상황은 그녀와 그의 사랑만큼이나 어색한 일이다. 중국인 남성이 그를 위협하는 외소한 그녀의 오빠에게 "당신은 내가 얼마나 약한지 모르시는 군요."라고 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녀를 위한 그의 숭고함이자 인내이다. 계층의 벽앞에 무너진 그의 마음이다. 이후 '독신남의 방'으로 돌아와 섹스를 밀어붙이는 중국인 남성은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가. 그러나 분노로 뒤섞인 감정을 쏟아내는 몸부림의 시간이 지난 후 그의 표정은 깊숙히 씁쓸하다.
그런 중국인의 상황은 더없이 쓸쓸하다.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외면하려하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해야한다. 그는 가문이라는 지위와 계층을 유지하기위해 예정된 혼약을 진행해야한다. 독신남의 방에서 축 쳐진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하는 그의 말은 죽어가는 이의 말로 같다. "나는 지금 너에 대한 사랑으로 죽어가고 있어. --- 난 죽은거야." 그가 스스로 잡을 수 없는 마음은 그녀의 싫은 소리를 억지로라도 듣고 싶다. 그러면 그녀를 싫어하게 될까.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란 고통을 더이상 느끼지 않아도 될까하는 마음으로. "내 말을 따라해봐. 나는 돈 때문에 당신을 좋아해요."
결혼식을 올리면서도 멀리서 지켜보는 그녀와 그의 눈이 맞부딪히는 순간은 지릿한 충돌이다. 찰나의 순간에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한다. 이후 배를 타고 떠나가는 그녀가 본 그의 차와 같이 닿을 수 없이 쳐다보던 멀어져만 가던 이별의 순간이 온다. 처음부터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던, 미래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던 둘은 멀어짐에 대수롭지 않게 대처하려한다. 애절한 그들의 사랑을 한순간 한순간의 마주보는 시선에 담아.

이후 그녀는 바다에 울려퍼지는 쇼팽의 왈츠에 사랑을 깨닫는다. 그와 함께 했던 무도회장도 가져다 주지 못했던, 밀어내기 급급했던 순간은 망망대해에서 왈칵 그녀의 마음에 울려퍼진다. "모래 속의 배설물처럼" 뒤섞인 현실이 그녀를 덮친다.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성숙하지 못했던 사랑의 기억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담아둔 채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나 넘어서지 못했던 사랑의 힘은 흐르는 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중국인 남자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했던 말처럼 오랫동안, 눈감는 날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예전에 그녀를 사랑했었다고...그리고 그 사랑은 아직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며, 죽을때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사랑은 불멸의 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토록 강렬한 힘을 알아보지 못할까. 눈앞의 벽의 크기에 짓눌린 것일까. 문화적 잣대들은 '금기'가 되어 우릴 짓누른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자유와 억압, 무수한 입장들. 넘을 수 없는 벽은 부딪힐수록 견고해진다. 얼핏 틈으로만 벽너머를 바라볼 뿐이다. 애타는 마음은 커져만 가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애써 사랑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문득, 자신에게 필요한 건 애타는 마음만큼의 용기였음을, 자신이 애써 밀어내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일까. 너무 가까이에 있어 거대한 힘을 받아내지 못한 것일까. 그리고 나서 금기 앞에 자유롭지 못했던 자신을 어떻게 떠올릴까.
벽에 부딪히며 생긴, 무겁디 무거웠던 사랑의 무게로 생긴 상처와 흉터는 삶의 흔적으로 남는다. 흉터를 보면 다친 날의 고통과 느낌을 기억하듯, 마음의 흉터도 그런 작용을 한다. 마음의 흉터는 사랑을 낙인처럼 찍어두어 잊혀지지 않는 것으로 남긴다.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는 연로한 중국인 남자가 수십년의 시간이 지난 후 건네온 전화처럼 말이다. 사랑의 순수한 본질, '추구'는 처음 찍었던 방향을 언제까지고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은 채로 열렬히. [연인]의 사랑은 그러했다. 이러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에 동감한다면, 이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 모든 것을 넘어서는, 시대의 금기에도 맞서는 사랑을 담아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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