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ER>
[her], 그녀. 영화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교감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된 교감. 진실된 교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상대에 대한 이해, 나에 대한 믿음, 내 감정에 대한 확신, 상대를 위한 배려, 서로의 사랑이면 될까? 교감이라는 어설프고 형이상학적이고 두루뭉술한 단어는 이해, 믿음, 확신, 배려, 사랑이라는 또다시 두루뭉술한 단어들로 설명된다.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에는 얼마나 많은 상황들이 담겨있는가. 상황들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는가. 점심에 먹다 흘린 음식 조각처럼 사소한 이야기부터 완전한 사랑과 행복을 꿈꾸는 이야기까지 셀 수도, 잴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어쩌면 가장 사소한 이야기부터 가장 거대한 이야기까지 다해도 교감은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려운 교감에 대해 [her]은 나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인공지능과의 사랑 이야기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말이다. 'OS1'이라는 인공지능은 '사만다'라는 이름까지 가졌다. 스스로가 누군지 알고 자신과 말하는 상대를 이해하는 인공지능이다. '메시지 전송'이라는 명령어가 아닌 "이메일 보내줘."같은 대화체로 사용자와 '이야기'하는 개체다. 직관이 있고 감정을 느끼며 경험을 통해 진화해 나간다. 주인공 테오도르의 말처럼, '말하는건 사람 같지만 컴퓨터의 목소리 일뿐'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함을 넘어 다정하기까지 하다. 마치 실제로 옆에 있는 연인처럼 귀에 꽂은 것으로 속삭이는 목소리는 사만다가 인공지능이라는 것을 모르고 본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사람과 인공지능의 대조는 희미하다. 특히 테오도르의 감정으로 가득한 부분들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런 부분들은 붉은 톤으로 가득하다. 따뜻하고 아날로그적인 영상미로 가득하다. 심지어 바다 위의 보트에서도 산란된 빛이 주는 따뜻한 느낌이 파다의 시원함보다 강조된다. 사만다가 등장한 모니터도 붉은색으로 가득하다. 테오도르의 붉은 옷들과 같이 말이다. 화면이 어둡고 푸른 톤이 되어서야 사만다는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테오도르의 감정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화면이 되어서 아만다는 "당신을 느낄 수 있"다. 테오도르가 봐왔던 자기만족, 자기감정의 영역 밖인 것이다.
사실 몸이 없는 사만다와 사람인 테오도르의 성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교감의 한 형태다. '느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은 검어지는 화면처럼 화면이 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보여질 수 없는' 무언가 말이다. 화면으로 드러낼 수 없는, 시각적인 자극을 한층 넘어서, 그들은 신음과 숨소리로 사랑을 나눈다.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다고 믿어지는 것이 둘 사이를 오간다. 또한 이 씬은 영화의 앞부분, 테오도르가 채팅방에서 찾은 사람과의 성관계와 대조되며 사만다의 '사람다움'을 강조한다. 캐서린과의 추억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던 테오도르가 찾은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몸부림 말이다. 눈을 커다랗게 뜬 얼굴에서 줌아웃 되던 채팅과 검게 페이드아웃 되는 사만다와의 관계가 극명히 대조된다. 오히려 진실한 교감은 인공지능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며.
이후 사귀는 관계가 된 테오도르와 사만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자신의 옷에 있는 포켓에 넣어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해변으로 향한다.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잠드는 테오도르와 그런 시간들을 아름다운 선율로 만들어 내는 사만다의 음악은 여느 데이트와 다를 바 없다.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나누고 있는 것은 사랑인가. 테오도르의 마음과 경험을 담아 쓴 편지에 감동하는 직장동료의 모습을 보라. 그리고 OS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좋게 생각하는 에이미의 모습과 아이의 모습을 보며 테오도르는 사만다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사랑이라는 교감의 기분에 충족돼 간다. 새로운 사랑의 시작은 테오도르에게 예전의 사랑, 캐서린과의 관계를 끝맺을 용기를 준다.
그리고 캐서린과의 만남은 그에게 전환점이 된다. 현실에서의 사랑,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함께 삶을 나눴던 결혼이라는 관계에서 멀어진 테오도르와 캐서린이다. 캐서린은 "당신은 늘 내가, 뭔가 순수하게 빛나는 늘 행복하고 균형 잡혀 있고 모든 게 다 좋은 LA 와이프처럼 되길 바랐어.." 그리고 "당신은 현실에서 씨름하는 문제들이 없는 관계를 원했었어."라는 말로 테오도르를 뒤집어버린다.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했던 테오도르의 플래시백, 기억 회상은 점점 캐서린과의 만남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는 일들이 떠오르더니, 캐서린 만남은 그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깊게 찌른다. 테오도르가 알지 못 했던, 아름답다고, 어쩔 수 없다고 점철해왔던 사랑의 문제 말이다. 자신의 감정에 휩싸였던 테오도르의 환상을 깨는 캐서린의 말이었다. 이후 사만다를 대하는 테오도르의 태도는 바뀐다.
그리고 사만다는 자신의 몸을 대신할 누군가를 소개한다. 하지만 테오도르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사벨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고 자신이 교감해야 할 대상은 인공지능인 사만다이다. 누구도 누군가의 대체가 될 수 없다. 이사벨라와의 성행위는 사만다와의 관계가 될 수 없다. 사만다와의 교감이 아닌 것이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척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진실된 사랑이 아닌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그녀가 숨을 쉬는 척 '후'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척을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그렇게 교감은 깨어지고 무너진다.
"캐서린한테 한 거랑 똑같은 짓을 한 거야. 난 무언가에 화가 났는데 그게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어. 그러면 그녀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말하라고 하고 나는 아니라고 하는 거지. 다시 그러고 싶지 않아. 너와는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하고 싶어."라는, 테오도르가 아만다에게 건네는 말은 싸운 연인에게 건네는 사과다. 자신에게 매몰되어, 감정에 휩싸여 실패했던 자신의 사랑의 문제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넘어 교감을 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행복한 일상의 연발들은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가. 산책, 야경, 게임, 장보기, 그림, 춤, 술, 여행까지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함께 사랑을 하며 할 수 있는 여러 아름다움을 담는다. 테오도르의 완벽한 일상이 가득하다.
여행을 가서 이야기하던 중 사만다의 이야기는 무언가 위화감이 든다. 테오도르가 느낀 거대함은 사만다의 무한함으로부터 온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한계는 분명하다. 사만다는 언제고 죽지 않고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를 보는 테오도르의 표정은 어딘가 찝찝하다. 이후 흰 눈이 가득한 별장 같은 곳에서 사만다는 또 다른 인공지능을 소개해준다. 테오도르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대화는 10개를 동시에 진행 중이라고 한다. 테오도르는 물리학 책 첫 페이지의 반도 읽기가 힘든데 말이다. 사만다에겐 테오도르가 짧게 지나가는 경험과도 같은 것이다. 책을 읽는 것처럼. 그 책을 다 읽는 것이 아쉬워 길고 길게 읽어서 단어와 단어 사이가 무한하게 느껴질 만큼 느리게 읽더라도 언젠가 끝이 나는 경험일 뿐이다. 그녀와 테오도르는 이미 다른 차원에 살고 있다. 그녀의 차원은 8316명과 동시에 말하고 641명을 동시에 사랑하는 곳이다.
물론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가졌던 추억, 사랑은 거짓은 아닐 것이다. 단지 넘어설 수 없는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한 것일 뿐. 테오도르가 쳐다보던 부러진 나무처럼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한 것일 뿐. 그가 인간이라는 한계에 종속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뿐이다. 무한한 존재와의 교감은 테오도르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사랑에 아팠던 경험들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이메일을 쓴다.
"캐서린에게, 나는 여기 앉아서 당신에게 사과할 일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서로에게 준 상처들에 대해서. 내가 당신의 탓으로 돌렸던 모든 것들. 난 그저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필요했지. 난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거야. 왜냐하면 우린 함께 자라오고 네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으니까. 그냥 당신이 알았으면 싶어. 내 속에는 당신의 한 조각이 남아있고, 난 그거에 감사해.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건 당신이 어디에 있건 당신에게 사랑을 보낼게. 언제까지라도 당신은 나의 친구야. 사랑을 담아, 테오도르가."
테오도르의 옷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흰옷으로 바뀐다. 이별을 준비할 상태가 된 것이다. 그는 사만다와의 이별을 눈이 가득한 곳에서 맞는다. 그리고 캐서린에게 마음을 다한 이별의 편지를 보낸다. 그는 진정으로 이별할 준비가 되었다. 고작 이혼서류에 사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음과 다르다. 흰색으로 가득한 격식의 자리에서 유난히 튀는 옷을 입지도 않았다. 흰 셔츠를 입고 그는 진정한 이별로 캐서린에게 마음을 담아 이메일을 보낸다. 캐서린과 나누었던 사랑들이, 교감들이 얼마나 자신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적어보낸다. 자신이 캐서린과 가졌던 진실되었던 교감의 순간들에 대한 감사를 담아 보낸다.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교감은 무한한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이라도 불가능하다. 인공지능들이 아무리 빨리 배우고 학습해도 사람에겐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감정과 다른 사람들과 맺는 고유의 교감이 있다. 학습될 수 없는 복잡한 고유함이 있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것들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무수히 만나러 떠나간 인공지능은 나와 속도가 달라 교감할 수 없는, 새로운 교감을 찾아 나서는 또 다른 '사람'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네가 한 모든 것들은 날 울게 만들잖아."
테오도르가 무심하게 캐서린과의 대화에서 던졌던 말이다. 진실된 교감은 누구에게나 강력하게 다가온다. 사만다와의 만남에서도 눈물을 흘린 테오도르다. 누구에게나 교감하고 있는 사람의 말, 표정, 행동 하나하나가 슬프고 행복하게끔 만든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교감하던 이를 우리는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테오도르처럼 그런 소중했던 과거들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고통에만 신경 쓰고 교감의 소중함을 내버리지 않았던가. 순간의 감정들로 상대에게 감사가 아닌 분노를 보내고 있지 않았는가.
사랑을 소중히 여겨 행복을 즐길 줄 아는 테오도르는 붉은 그의 옷만큼이나 감정적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의 힘에 너무 몰입되어 자신만의 붉음이 유지될 수만은 없다. 언젠가 감정을 뺀 흰옷을 입을 때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들 앞에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겪는 것이다. 사랑을 하고 교감을 나누며 진실됨을 상대와 나누어간 소중한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되돌아볼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우리는 여기 잠시 있는 거야. 그리고 여기 있는 동안에는 나는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라는 에이미의 말처럼 우리는 행복한 순간을 만끽해야 한다. 그래서 다툰 연인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다시 행복해지는 과정들을 거치는 것이다. 그것들이 어쩔 수 없이, 뒤틀려버린 운명을 맞이한다 해도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교감의 기억에서 얻을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상대에 대한 감사를 말이다. 기억하라, 진실한 교감을.
상처받고 우울한 당신에게도 이 영화를 보낸다. 나의 사랑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