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어도 걸어도>
걸음을 많이 걸으면 발의 어딘가엔 상처가 난다. 뒤꿈치가 가장 흔하고 발가락도 흔히 다친다. 보통 생채기가 나거나 물집이 생긴다. 생채기나 물집이 터진 자리는 무언가가 닿을 때면 따끔따끔하다. [걸어도 걸어도]라는 제목에선 그런 따끔따끔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에서 서로는 늘 약간씩 어긋나간다. 그것이 너무나도 현실적인 말들이어서 그러려니 할 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소하다. 소소하기 그지없다. 좋기 위해 노력하는 서로의 마음은 때론 각자의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거나 물집 자욱이 된다. 발에 딱 맞지 않는, 약간은 엇나간 신발은 이내 발에 상처를 남기는 것처럼.
걸어도 걸어도 닿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매년 10년 가까이가 지나도 아들의 죽음은 잊히지 않는다. 료타가 괜찮아 보이려고 노력해도 준페이의 그늘은 그에게 드리운다. 죽음은 오히려 더 기억이 선명하게 한다. 그의 기일이 되어 모두가 모이고 모여서 찍는 가족사진에도 그의 영정사진이 함께한다. 가족에게 있어서 준페이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매년 걷고 걸어서 그의 산소에 가더라도 말이다. 가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것은 그렇게 특별해서 쉬이 되기도 힘들다. 료타의 가족을 부를 때 할머니의 입에 붙은 존칭처럼 말이다. 베풀고 감싸 안아도 바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다. 누군가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오래오래 걷는 것과 비슷하다. 오래오래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걷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걷는 길엔 가시밭길도, 평탄한 도로도 있겠지만 발에 상처가 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나만의 길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익숙지 않은 타인의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익숙함에도 보이지 않던 깊은 길까지 걷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걸어도 걸어도]에선 그런 가족들의 모습이 닿지 못한 채로 끝나는지도 모르겠다. 걸어도 걸어도 닿지 못한 채로.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렇듯 매번 조금씩 어긋나거나 늦다. 그것은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익숙지가 않아서이지 않을까. 1년에 한 번을 볼까 말까 한 가족이라 그럴까. 그런 가족이 여럿 모이면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아내에게도 동생에게도 완벽한 가족의 모습으로 남기에 시간은 짧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적다. 그래서 가족은 가족이 되기 위해 열심히 걷다가도 지쳐버리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후회하는 때는 너무 늦은지도.
겉은 웃고 있어도 좋은 말을 해줘도 이면에는 다른 마음이 남아있다. 좋은 가족이고 싶어서 좋게 말을 건네지만 마음이 비치는 것을 막을 수도 딱히 막으려 하지도 않는다. 특히 수다스러운 할머니의 역할이 그렇다. '걸어도 걸어도'라는 가사를 따라 부르며 할아버지의 바람피웠던 과거를 찌르는가 하면 아들의 죽음에 관련된 이에게 남은 진하고 깊은 감정을 다른 아들에게는 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홀린 듯 나비를 쫓는 그녀다. 할머니의 삶은 할머니의 말과 행동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가족들을 대하며 가져왔던 행복, 사랑, 상처, 분노까지 그녀의 말과 태도에 녹아있다.
다른 가족들의 말과 행동도 그러하다. 다른 이의 자식인 자신의 아들을 챙기지 않는 시어머니에게 서운해하면서도 노래 이야기에 공감하는 며느리처럼 말이다. 어딘가 어긋나고 뒤틀린듯하지만 그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함께한다. 료타가 천천히 아츠시의 몸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그런 이해가 담겨있다. 그들은 언젠가 걷고, 걸어서 가족이 된다는 생각이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 "아츠시의 반쪽은 아빠 반쪽은 엄마로 만들어졌거든."처럼 가족이었던 이들도 잊지 않는다. 죽어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준페이도 아츠시의 아버지도 가족들의 기억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것이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하던 아츠시의 변화는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다. 죽은 토끼에게 보내는 편지가 받을 사람이 없어서 웃던 소년은 조심스레 자신의 소원을 달을 보며 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렇게 가족은 변화해 간다. 소소한 대화들마저 상처가 되고 그런 상처가 아물어가며 가족들은 변화해 간다. 찢어진 어릴 적 일기를 테이프로 조심스레 붙여본다.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듯 말이다. 괜히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속도를 맞추기도 하고 건너지 않던 육교를 건너고 축구를 같이 보러 가자고 한다. 소소한 변화들은 그들이 어려운 길을 지나 가족이 되어간다는 행복한 전조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늦다. "매번 이렇게 꼭 한 발씩 늦"다. 변화의 전조들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또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다. 료타가 어머니에게 노랑나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딸에게 전해준 것처럼 이야기들은 이어진다. 누구한테 들은 지 기억도 안 나는 것이 꼭 닮았다. 가족은 그렇게 시나브로 이어져간다. 조금 늦어도, 잊었다 생각해도 마음에 새겨진 채 남아 이어진다. 아름다운 기억만이 아니라 가족이 되는 과정이 모두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인 것일까. 만약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전화하여 안부를 묻고 언젠가 말했던, 같이 하자고 했던 것을 정말로 해보자. 그렇게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가족이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