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본 투 비 블루>
[마일스]를 보고 전기 영화에 대한 생각을 더욱 확고히 굳혀나가던 때, 마일스 데이비스와 비슷한 때에 활동하던 쳇 베이커의 이야기로 만든 [본 투 비 블루]가 생각났고 이제서야 보았다. 재즈 뮤지션의 전기영화라는 소재에서 둘은 비슷한 형식을 생각했으나 [본 투 비 블루]와 [마일스]의 이야기 구조는 상반되었다. [마일스]와 굳이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보자면, 전기 영화라는 점에서 [본 투 비 블루]의 승리인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두 뮤지션의 음악적 차이만큼이나 영화의 내용적 차이가 드러난다. [본 투 비 블루]는 쳇 베이커의 삶을 담고있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린,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얼굴로 알려진 쳇 베이커. 그는 부드러운 연주와 달리 괴팍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반항적인 이미지에 여자만 보면 달려드는 플레이보이는 게으른 천재였다. 'Born to be blue'는 쳇 베이커의 노래인데 영화의 제목으로 손색이 없다. 블루한, blue가 가진 우울의 의미에서, 제목은 쳇 베이커의 인생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노랫말을 따라가는게 운명이던가. 그는 그렇게 태생적으로 우울한 삶을 살았다. 낭만으로 그득하지만 문득 슬픈 그의 연주처럼.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음악에 청춘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영화에는 긴 연주 장면이 여럿 등장하고 중요한 장면은 세 번의 연주이다. 세 번의 연주는 그의 인생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의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되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담아 연주하고 있다. 같은 노래를 부르지만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에서는 쳇 베이커의 삶의 냄새가 난다. 그가 정말 이런 삶을 살았으리라 믿게 된다. 그리고 에단 호크의 연기는 이런 미묘한 설득력을 정확히 잡아내는 역할을 한다. 그의 연기 또한 인생의 정점을 향하고 있는듯 하다.
세 번의 연주는 처음 버드랜드에서 썬글라스를 끼고한 것, 스튜디오에서 공연을 하며 부른 발렌타인, 마지막 버드랜드로 돌아와 다시 부른 노래이다. 노래가 둘 있지만 연주와 노래가 완연히 다른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 연주 중에서도 스튜디오에서 부른 '마이 퍼니 발렌타인'과 버드랜드에서 부른 '마이 퍼니 발렌타인'은 가사도 다르고 쳇 베이커가 부르는 방식도 다르다. 그것은 그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 지나고 피를 토해대도 부를 수 없었던 트럼펫과 자신의 음악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다.
피를 질질 흘리며 마우스 피스를 아무리 바꿔봐도 부를 수 없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쳇 베이커는 최선을 다한다. 예전, 게으르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연습에 매진한다. 그를 삶에 끝에서 잡아준 제인의 도움과 함께. 제인의 차에 살면서도 베이커는 연습을 놓지 않는다. 그러고 돌아온 자신의 연주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아도 말이다. '쳇 베이커'라는 이름으로 다시 열린 작은 공연에서 그에게 약을 들고 다가오는 'H가 들어간 사라'는 베이커가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게끔하는 접점이자 미래를 위한 복선이다. 여튼 그는 스튜디오에서 기회를 얻어 괜찮은 연주를 해낸다. 예전처럼 음이 정확하고 멋지지 않지만 진심을 담아, 떨림을 담아 그의 연인 제인에게 불러주는 사랑 노래처럼 연주한다.
그리고 얻은 버드랜드의 복귀 기회에서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를 안정시켜줄 제인이 없는 상태에서 헤로인과 메타돈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것은 단지 약을 다시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였다. 그가 연주를 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헤로인은 그의 화려했던 과거를 찾아가는 길이다. 낭만으로 그득한 연주를, 약으로 만들어진 행복일지라도 한 음 한 음 스며드는 그런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다. 메타돈은 변화한 현재로 남아있는 길이다. 사랑으로 천천히 만들어 온 일생일대의 기회에서 자신과 제인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길이다. 거울을 보는 베이커의 눈에 우울함과 고난과 복잡한 삶이 다 들어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쳇 베이커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알려주지 않은 채 그가 무대에 선다. 노래가 시작되고 그는 노래를 부른다. 부릅뜬 그의 눈이 이곳 저곳을 살핀다. 목소리는 감미롭고 연주는 행복하다. 자신감에 가득차 있고 여유롭다. "안녕 디지, 안녕 마일스 웨스트 코스트에서 온 애송이가 니들을 먹어치워줄께."라는 말을 하며 무대에 오른 베이커는 오래된, 예전의 베이커였다.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부르고 벽을 칠하던 베이커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런 결과를 낳았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는지 이겼는지에 대한 결과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호기롭고 꿈을 가지고 있었던, 연주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계속 연주를 할 수 있었던 예전의 자신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하고 열성을 다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던 현재의 자신 중 어디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선택은 다만 슬프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로 남을 선택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왜 이리도 한탄스러운가. 떠나는 제인을 보며 읇조리는 그의 말처럼.
Born to be b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