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
오사카 여행이니 일본 영화의 세 번째 작품은 1984년 스튜디오 지브리가 처음 선보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다음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이다. 1986년 개봉하였으며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성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하늘을 나는 성이라는 누구의 꿈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점점 잡혀가는 지브리의 방식으로 나타낸다. 전 작품보다 깔끔한 화면으로 보여주는 [천공의 성 라퓨타]는 '지브리식'의 진화를 알린다. 매끄럽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표현해낼 작품들, 1988년 [이웃집 토토로] 이후의 모든 지브리 영화의 여러 요소들이 원석의 모습을 간직한 채 빼꼼 빼꼼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설정들, 비행선이나 해적선 같은 경우 실질적이라기 보다 상징적인 영향이 강하다. 지브리의 영화가 그러하듯 공상과 판타지가 어우러진 독특한 그림체들과 설정들로 가득하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상징적이고 특유의 느낌을 줄 수 있는 매체의 개성을 십분 활용한 장면들은 관객들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또한 이런 집중력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는 영화의 OST 들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메인 테마 「너를 태우고」는 극의 분위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애니메이션과 결합한 음악의 선율은 지브리의 영화들을 추억이 깃든 오르골로 만들어주는 마술을 부린다.
무스카는 정부 특사 요원이다. 그는 정부의 힘, 군대를 등에 업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납치, 감금,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결국 그가 라퓨타의 왕이 되고 하늘의 불이니, 인드라의 화살을 언급하며 핵폭탄이 떠오르는 무기를 바다에 쏠 때는 뒤통수를 쌔게 맞은 느낌이었다. 무스카가 언급한 하늘의 불은 성경 구절 중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서 신이 그들을 처벌할 때 사용한 불과 유황을 의미한다. 인드라의 화살은 고대 인도의 언어인 샨크리스트어로 적힌 서사시에 나오는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전쟁의 신 인드라의 강력한 무기를 의미한다. 두 가지는 처벌의 의미가 강하다. 선이 악을 벌하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 아이들에게 총을 쏘아대는 군대의 모습은 악에 가깝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을 따라가며 웃어대는 것은 전형적인 악당의 클리셰이다. 무스카가 그러하다. 군대는 그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라퓨타에 있는 금은보화들을 모으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무스카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을 받은 군인들을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자의 입에서 처벌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닉 한가. 왜 처벌을 인용했을까. 단지 라퓨타의 신성성과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였을까?
라퓨타라는 전설 속에나 있을 법한 천공의 성은 뛰어난 과학기술의 집합체이다. 비행선이라는 신화적 이야기에 의존하지만 성의 무기가 보여준 파괴력은 핵폭탄을 떠올리게끔 한다. 이런 거대한 힘의 상징과도 같은 라퓨타를 장악한 무스카는 모든 세계를 자신의 아래에 두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고도화된 기술의 끝에 절망적인 미래가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미련도 없이 그저 힘을 얻는 것을 추구한다면 무스카처럼 강한 자기합리화에 사로잡혀 전쟁과 지배에 '처벌'이라는 명분을 댄다는 것이다. 그는 왕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욕망에 불과하다.
7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도 지배에 대한 욕망은 끊이질 않는다. 그는 라퓨타의 힘, 하단부에 있는 기술의 결정체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끊어내는 것은 '멸망'이라고 명명되어 왔던 주문이다. "바루스"라는 주문은 라퓨타어로 '닫혀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우악스럽게 발전해나가는 기술 문명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닫아두자는 의미일까. 기술, 힘에 대한 숭배자만이 '멸망'하고 만다. 무기의 멸망이었다. 무거운 하단부를 쏟아내고 거대한 나무만이 남은 라퓨타는 하늘을 더 높이 올라간다. 마치 그 하단부만 잡혀있었던 것처럼.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간직한 채.
성의 전체를 휘감은 나무뿌리가 파즈와 시타의 목숨을 살린다. 성에 도착해서 줄곧 성의 상단부에 있는 자연이 가득한 모습을 보아온 파즈와 시타다. 그들은 무스카가 있는 하단부로 갈 때에도 나무를 타고 간다. 자연은 그들이 아무 말없이 그대로 있음으로써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고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자연은 단지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멸망의 주문에도 자연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려고 만든 무기만이 사라진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런 자연에서 힘을 얻고 생명을 얻는다. 이는 아이들이 자연을 보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에 대한 보상과도 같다.
그러나 웃기게도, 필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이들이나 무스카 그리고 그들의 대비가 아니었다. 바로 아이들이 처음 찾아간 정원에 잠들어 있던 로봇이다. 이끼와 풀, 꽃이 어깨와 등을 덮은 로봇의 모습은 어딘가 애처로웠다. "정원을 가꾸던 로봇인가 봐"라는 파즈의 말처럼 기계가 정원을 가꾸고 그곳에 잠들어 있는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연과 기계의 묘한 앙상블에 있지 않을까.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천공의 외딴섬에서 정원을 돌보다 정원에서 최후를 맞이한 기계의 모습은 묘한 감상을 느끼게끔 한다. 인간이 사용해 온 자연과 기계가 인간의 손에 닿지 않은 채 서로에게 어울려 있는 모습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