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개봉하던 2014년 3월, '아트버스터'라는 단어와 함께 영화는 소개되었다. '아트버스터'.. 블록버스터라는 말에 대조적인 단어로 쓴 듯하다. 아트가 폭발한다는 느낌이려나. 여하튼 그때 만났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것을 설명하던 단어에서 동떨어진 영화는 아니었다. '아트'라는 불분명한 느낌의 무언가가 영화에선 폭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6년 8월이 되어, [비거스플래쉬]에 나온다는 랄프 파인즈와 틸다 스윈튼을 보며 나는 문득, 무슈 구스타브와 마담 D가 떠올랐다.
두 시간 가까이 가는 영화의 러닝 타임은 관람 후엔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속도 조율이 잘 되어있고 이야기의 흐름은 간결하고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린 듯한 관람 이후 나는 약간 멍한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광대하고도 오래된, 거대한 역사의 일부를 훔쳐본 듯한 느낌이었다. 불분명한 아련함. 그 무언가가 나의 마음속에 남았다. 마치 '아트'와도 같은 것이.
영화는 시작부터 몇 번의 '액자 속 액자' 구성을 판다. 루츠 공동묘지로 들어간 인물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책을 본다. 그리고 장면은 책을 쓴 작가의 기록, 1985년으로 넘어간다. 작가는 자신의 책이 누군가로부터 들은 내용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하고,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다시 전한다. 1968년 젊은 작가의 모습이 나오고(주드 로) 그는 알프스의 산자락,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묵고 있다. 그는 어느 날 기묘한 느낌을 주는 노신사와 만나게 되고 그의 특이한 사연을 듣게 된다. 누구나 아는 부자인 노신사가 호텔의 아주 작은방에서 일주일 씩이나 묵는다는 이야기를. 이에 젊은 작가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하던 중 우연찮게 그와 대화하게 되고 저녁 식사를 제안받는다. 그리고 노신사의 이야기, 1932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컨시어지인 무슈 구스타브가 마담 D와의 아침을 준비하는 장면들로 파트 1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동화적이고도 아름다운 색깔들로 가득 찬 채로 말이다. 줄어진 화면 비율이 나중에야 알아챌 만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1930년대 필름의 1.33:1 의 화면비율은 30년대를 기리면서도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위한 안성맞춤이다. 인물들, 배경, 소품 하나 빠짐없이 화면에 가득가득 담긴다. 색깔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그렇게 화려하면서도 낭만이 가득한 화면들이 줄을 잇고, 마담과 구스타브는 그 화면의 중심에 있다. 특히 마담 D의 옷은 클림트의 작품을 연상시키는데 화려한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연한 핑크빛 배경은 낭만을 배경의 구석구석 채운다.
구스타브는 그의 낭만이 담긴 그림, '사과를 든 소년'을 들고 호텔로 도망친다. 그러나 이내, 그는 마담 D 독살의 용의자로 몰려 체포되고, 체크포인트 19 교도소에 갇힌다. 파트 3부터 화면 전환이 많아지며 스토리의 전체적 속도가 빨라진다. 데코 푸가의 집사인 서지가, 구스타브가 그림을 훔치는 것을 도와줬던 서지가 사라졌다는 제로의 전언부터 등장인물이 제각각인 장면들이 진행된다. 가령 조플링의 책상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대놓고 독약이라는 단서를 주고 바로 구스타브가 장난스러운 문신을 한 교도소 동료에게 탈옥 제안을 받는 장면으로 진행되듯 말이다. 탈출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아가사와 제로의 이야기도 녹아든다. 장면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출연하지만 한 사건이 풀려나가는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다. 그래서 스토리의 진행이 매끄럽고 빠르게 느껴진다.
파트 4에서 극의 속도가 극에 달한다. 파트 3의 상상 속 대장정 같은 탈옥 이후 더 많은 이들이 화면에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선은 공간을 뻗어나간다. 다양한 색조, 의상들이 바뀌면서 넓은 영역으로 이야기는 선을 탄다. 그러면서 점점 높은 공간으로 올라가는 세로의 확장도 멈추지 않는다. 가로와 세로로 확장된 공간감은 일순간에 스키와 썰매 추격전의 속도로 변환된다. 그들이 쌓아온 공간(위치) 에너지는 급격한 속도로 전환되어 펼쳐진다. 공간을 채우던 색감들은 높이로 올라갈수록 점점 절제되고 흰색이 만연한 공간은 속도로 채워진다. 그렇게 격한 속도감의 끝에 조플링은 여유를 부리다가 제로에게 밀려 떨어진다. 조플링을 처리한 구스타브와 제로는 호텔로 돌아가 그림을 찾고, 마담의 숨겨진 유서를 발견하며 구스타브는 마담의 모든 재산을 유산 받는다.
아직 수염도 안 나서 그리는 제로와 못 가는 곳이 없는 데코프의 힘, 조플링
조명 밝기와 정면을 보는 구성 그리고 줌인아웃은 속도감에 따라 조절되며 몰입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색조가 가지는 여러 감정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율하면서 의미심장한 느낌을 준다. 핑크빛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컨시어지인 무슈 구스타브가 낭만 속의 인물임을 강조한다. 탈옥 후에도 파나쉬 향수를 찾고 조플링에게 죽기 직전에도 시를 읊는 그가 대표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호텔을 찾는 그가 대하는 손님들처럼,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그도 그렇게 변하듯, 돈 많고, 허영심이 가득하고, 천박하고 외롭다. 파나쉬 향수를 찾고 '금발의 귀족 같은' 분위기가 그득하지만 말이다. 마담 D가 죽으며 그에게 남긴 '사과를 든 소년'은 1968년의 호텔에도 걸려 있듯이 무슈 구스타브 낭만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파트 5의 시작에서 핑크빛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는 대조적으로 차가운 남색의 하늘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호텔 내부의 곳곳에 있는 검은 제복의 군인들은 더 이상 호텔의 화사함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 검은 무리의 핵과도 같은 디미트리의 호텔 입성과 누가 누구를 쏘는지도 모르는 총격전에 호텔은 상처 입고 색을 잃어간다. 마치 전쟁통에 죽음을 맞이한 구스타브와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제로의 회색빛 기억처럼. 총격전 이후 다시 사랑스러운 핑크빛으로 화면이 다시 끔 가득 차는 순간이 바로 호텔에서 '떨어진' 아가사와 제로가 안착한 맨들 빵집의 차이다. 이는 그들이 '운좋게도' 살아남고, 구스타브는 유산을 상속받고, 해피엔딩을 향하게 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된다. 동시에 핑크빛이 가득한 이 장면은 핑크로 대두되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컨시어지, 즉 무슈 구스타브의 자리를 제로가 이어받게 됨을 나타내는 듯하다. 두 사람의 행복을 드러내며 말이다.
검은 드미트리 그리고 화사한 제로와 아가사.
영화의 이야기들은 우연찮게, 하지만 익숙지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된다. 가령, 아랍식 목욕탕 같은. 그리고 1930년대라는, 과거의 과거의 과거 이야기쯤 전해야 들을 수 있는 익숙지 않은 이야기들은 어딘가 모르게 향수가 느껴진다. 언제나 여유와 낭만을 잃지 않았던 구스타브처럼, 비싼 그림의 값에 신경 쓰지 않는 아가사처럼, "도살장처럼 변해버린"시대의 변화에도 남겨진 파나쉬 향수처럼 말이다. 익숙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것들에 향수가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가진 '인간적임' 때문이리라. 경찰에게 쫓기면서도 죽은 서지에 대한 존중의 묵례를 남기는 순간이 보여주듯. 그렇게 동화 같은 느낌이 가득한 이야기는 8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따뜻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지는 연결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듯 사람과 함께 이야기는 완성된다. 한 명 한 명 허투루 쓰이지 않고 자연스레 이야기에 녹아들어있다. 사람들이 가득한 시대를 살았던 제로 무스타파는 사람을 대하는 직업,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잘 알아내는 로비 보이로 자신의 삶이 시작되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한 시대의 마지막, 시대를 위해 일하는 삶을 시작했던 제로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구스타브가 지내던 방에서 인생의 끝을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그윽한가. 비록 아가사와의 행복했던 순간은 그와 함께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야속하게 끝났지만. 제로가 젊은 작가에게 건넨 목욕탕의 말에서 그의 향수가 느껴진다.
이 목욕탕은 있던 그대로 일세 다만 유지를 못했을 뿐이지.
... 난 낡은 이대로도 좋아. 매력이 있지.
파나쉬 향수와 구스타브의 마지막 모습.
구스타브의 세상은 그가 오기도 전에 사라졌네.
모든 이가 어릴 적부터 자신이 꿈꿔왔던 세상을 그린다. 나이가 들어 그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고 돌아보니 어느새 그 세상은 저 멀리 도 가버린지 오래다. 아쉬움 그득하게 쳐다보아도 이미 저 멀리 가있다.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세상은 어쩌면 각각의 상상 속에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세상은 낭만을 가득 담고 마음속 어딘가에 혹은 자신의 어딘가에 있다. 제로가 셔츠 깃 아래 달고 다니던 아가사의 유품처럼 꿈에 대한 향수에 의지한 채 우리는 살아간다. 이름만 떠올려도 슬픈 이가 있기에 그녀를 위해 아무 돈이 되지 않는 호텔을 남겨두는 것이다. 돌아오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기억과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서.
꿈 꿔왔던 세상이 눈앞에 있지 않더라도 너무 슬퍼하진 말라. 자신의 꿈과 환상 속에 살았던 구스타브의 이야기처럼 언제나 자신의 꿈을 향유하며 살아볼만하다. 그들의 삶도 불안하고 허영심 가득하지 않던가. 만나지 못한 꿈에 대한 그리움. 구스타브에게도, 제로 무스타파에게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굳건히 꿈을 담은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지금처럼 32년에서 68년으로, 85년으로 그리고 현재로 전해지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