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
[미드나잇 인 파리] 듣기만 해도 로망을 자극하는 영화 제목이다. 파리, 낭만의 도시에 대한 환상을 가득 품고 있는 이 영화는 우디 앨런 감독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우디 앨런 자신의 로망을 실현하는 매개체로 보이기도 한다. 우디 앨런이 가진 파리에 대한 동경을 살펴보며 영화를 즐기는 것도 좋은 관람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동경을 증명이라도 하듯 파리의 일상적인 모습을 4분~5분에 걸쳐서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을 알린다. 향수 그윽한 음악과 함께.
길 팬더는 잘 나가는 할리우드 상업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약혼자 이네즈 그리고 이네즈의 부모님과 함께 결혼 전 파리를 방문한다. 프랑스의 다양함에 대해서도 반색하는 이네즈 가족과는 달리 길은 파리의 로망에 푹 빠져있다. 그래서 길은 시나리오가 아닌 순수한 문학 작품을 써내고 싶어 한다. 예술이 넘쳐나고 문학인들이 사랑하던 1920의 파리에 향수를 느끼며 말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파블로 피카소 등 그의 황금 세대와도 같은 작가들을 꿈꾸며.
비가 와도 차가 아니라 걸으며 파리를 돌아보고 싶어 하는 길은 스스로도 역설적이다. 파리라는 환상에 젖어서는, 가구를 보고 결혼을 준비하는 이네즈와 가족들에게 눈길조차 떼버린다. 1920년대의 파리를 다녀온 이후로는 이네즈와 함께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심지어는 새로운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그녀와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네즈와 나눈 사랑보다 자신의 글을 읽어주고 1920년의 자유와도 같은 여자, 아드리아나에게 점점 빠져든다. 상업 작가지만 1920년을 로망하는 그는 자신이 못하고 있는 일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살바도르 달리, 스콧 젤다 피츠제럴드 부부
파블로 피카소와 아드리아나를 그린 그림, 어니스트 헤밍웨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파리라는 배경 아래서 모든 일들은 꿈처럼 진행된다. 마지막까지도 길을 쫓던 탐정이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며 꿈이 현실적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어벙한 상태의 길, 술을 마셨던 그의 상태, 자신의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예술가들은 고증적, 현실적이라기보단 길이나 관람자들이 그려내는 이미지에 가깝게 그려진다. 이는 영화가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가벼운 느낌으로 다가오게끔 한다. 파리에 대한 동경과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동경이 영화 내에서 그대로 그려지는 느낌이다. 마치 그림 반, 사진 반의 영화 포스터나, 아드리아나를 그린 피카소의 그림에서 보이는 왜곡처럼.
그러나 그에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이 1920년대 파리와 아드리아나는 한순간에 주는 인상이 달라진다. 더 이상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고 물음을 던지기보다 아드리아나에 집착 아닌 집중을 하던 길은 아드리아나와 함께 1890년대의 파리로 가는 마차를 탄다. 1890년대를 '황금시대'라고 생각하던 아드리아나는 그 시대에 남자고 길에게 말한다. 길의 역설은 여기서 깨어진다. 자신이 '황금 시대'라고 생각하던 1920년대, 위대한 예술가의 사랑을 받았던 여자가 1890년대에 남겠다니. 자신의 글을 읽어주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지닌, 나를 알아주리라 생각한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드리아나, 이네즈 그리고 길
다른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자면,
현학적인 인물, 폴은 정제된 지식을 펼치는 사람이다. 당연히 길은 못마땅해한다. '진실된 예술'이라는 자신의 추구에 폴이 무엇을 안다고 난리란 말인가. 폴 연결되는 이네즈는 '중요한 부분'이 비슷하다. 영화 속 길의 말처럼 길과 이네즈가 다른 '중요한 부분' 말이다. 미술을 대하는 것이 현학적이고 드러난 부분에 대해서만 수용한다. 폴이 항상 하는 머리말처럼 "이 부분에 대해선 내가 조금 아는데," '아는' 지식들을 늘어놓는다. 길은 진정한 예술, 그은 직접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궁색하긴 마찬가지이다. 그가 아는 것은 정확한 사실일지는 몰라도 치정적인 감상들뿐이니까.
그러나 '우연히' 겪게 된 좋은 경험이 그 대척점에 서게 해줬다. 처음 현재에서 가브리엘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히 알게 된 좋은 노래를 따라 간 것이었으니. 어설픈 비가 떨어지는 파리를 진정 사랑하고, 현재에 진정으로 파리에 살고 있는 유일한 인물은 가브리엘뿐이다. 폴도 잠시 들린 것이고, 이네즈와 가족들도, 나아가 1920년대의 사람들까지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파리'에 있는 가브리엘은 길이 우연히 들은 노래처럼 인연을 이어나간다.
현재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그 극복의 과정에서 온 생각들은 현재가 더 불완전하게끔 보이게 했다. 아드리아나와 이네즈 두 여자와 이별을 고한 것처럼. 길이 만나던 두 여자, 환상에서 만나 이끌리던 아드리아나, 겉치레 같은 '섹시한' 이네즈와 이별한 길. 그가 파리지앵 가브리엘과 비 오는 파리를 걷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인 이유는 현재에 대한 길의 생각 변화에 있지 않을까. '황금 시대'를 좇던 그가 우연히 만난 가브리엘과 비에 젖으며 걷는 그때가 그의 '황금 시대'가 아니었을까.
모네의 수련 앞에서도 말 많은 폴, 가브리엘과 만난 길
우리 모두 불완전한 현재를 살잖아요.
활로를 찾기 위해 과거의 낭만에 빠져살던 길은 그것이 결국 그들이 사는 또 다른 세상임에 불과하단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파티와 술이 난무하는 1920의 파리는 그의 낭만 속에 파리가 아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술 주정을 부리고, 코뿔소만 찾는 달리가 사는 그때에도,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 '현재'를 살았던 것이다. '소시민적인' 욕구, 아드리아나와의 잠자리를 위해 이네즈의 귀걸이까지 손댈 만큼 '무례한 노력을 계속하던' 길은 '우연히'탄 마차로 이런 전환이 일어난다. 처음 그를 '로망'에 빠지게끔 했던 처음의 '우연'처럼.
불완전한 현재에 대해 환상을 섞어 그려내는 영화는 즐거운가? 당신이 바라던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는 여실히 드러났는가? 오히려 한적한 파리의 곳곳을 찍은 4분의 인트로가 당신의 동경을 더 자극해야 하는 것 아니었나. 동경이라는 것은 언제나 환상적일 것이란 기대가 섞여있다. 다소 불만족스러운 현재에 우리는 종종 과거의 시절에 대한 혹은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동경을 토로하곤 한다. "그때가 좋았지.", "그땐 안이랬어."와 같은 말을 내뱉으며. 그 짧은 한탄이 나올 때 우디 앨런의 대답이 듣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