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정신에 겪은 첫 공황
디즈니나 뮤지컬영화,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공짜로 얻은 메가박스 영화쿠폰이 있었는데 상위 순위의 영화들이 다 별로였다. 예고편으로 몇 번 접한 한국영화들, 어린이 애니메이션 영화, 그리고 재개봉한 일본 로맨스영화 등이었다. 8위에 있던 멜랑콜리아를 골랐다. 줄거리로는 우울증을 가진 여주인공의 망한 결혼식, 그리고 멜랑콜리아 행성의 접근으로 인한 지구 멸망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심리 어쩌고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짧은 줄거리 설명 몇 줄에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꽤 많이 (심리, 사랑, SF) 들어 있어서 골랐다. 그럼에도 스스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생각하며 큰 기대는 없었다.
도착한 신도림 영화관은 건물도 너무 덩그러니 있고 관객도 없고 안내해 주시는 분도 없었다. 오전이긴 했지만 영화관에는 정말 팝콘 만드는 한 분만 계셨다. 티켓확인도 안 하고 문도 셀프로 밀고 들어갔는데 영화 시작 10분 전까지 우리 말고 아무도 안 들어와서 혹시 영화상영도 셀프로 틀어야 되는 거냐며, 제대로 들어온 게 맞냐며 농담도 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무거운 음악을 바탕으로 슬로우모션이 걸린 장면들이 나왔다. 물에 잠긴 신부, 걷는 신부의 발에 걸리는 검정 이물, 아이를 안고 뛰어가는 여성, 가까워지는 행성으로 인해 신체 끝에 생긴 불빛. 느린 화면에 표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공허한 눈동자에서 삶의 의욕은 보이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눈이 빛나던 것은 빛나는 자신의 손가락을 구경하는 장면이었다. 와 나 이영화 좋아하겠는데? 라며 심장이 두근거릴 즈음 스토리가 진행됐다. 주인공은 결혼식에서 티 없이 밝은 모습에서 나타났다. 슬로우모션이 걸렸던 무표정한 얼굴이 오버랩됐다. 아니나 다를까 누구의 말 한마디에, 상황 하나에 이리저리 휘청이고 꺾여버릴 정도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상태였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고는 무너진다.
그리고 주인공이 우울증과 싸울 무렵 영화를 보던 나는 같이 힘들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몸이 힘들었다. 오랜만에 커피를 마셨다고 울렁거리는 거겠거니 했지만 괜찮아지지 않았고 결국 중간에 나가서 토를 했다. 따뜻한 캐모마일 티를 사서 다시 들어갔다. 그렇지만 울렁거림은 가시지 않았고 손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카페인 두근거림이 이렇게까지 심할 수 있나 싶었지만 차도 카페인 없는 것으로 골라먹던 나였기에 1샷을 넣은 라떼 두 모금이 치명적이었을 수 있지 생각했다. 그 상태로 한 시간은 더 참고 본 것 같다. 영화가 흥미진진했으니까. 주인공의 상황이 너무나 공감됐으니까.
그러나 결국 손떨림이 손 저림과 입술 저림으로 번지고 가슴 압박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상황이 되고 나서야 공황이구나 깨달았다. 속이 안 좋아 먼저 나간다고 마저 보고 나오라고 친구에게 말하고 상영관 밖으로 나왔다. 구석 사각지대를 발견하고 쓰러지듯 앉았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팔 저림이 심해 내 마음대로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심호흡을 해보려고 했으나 이미 급박해진 호흡은 잘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위험하다,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잔뜩 웅크러진 손가락과 팔을 겨우 풀어 휴대폰을 켜서 같이 간 친구의 연락처를 찾았다.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누르려던 찰나 멈췄다. 문득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팔은 부들거리고 호흡은 거칠었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죽을 것 같진 않았다.
팔을 주물러주고 발도 굴러보며 호흡에 집중했고 그렇게 온전하게 호흡이 돌아오기까지 40분, 그리고 저림이 멈추기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그즈음 영화가 끝나 친구가 나왔다. 친구랑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관 밖으로 나가는데 잠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시간 전의 공포가 너무 감쪽같이 사라져서, 어이가 없었다.
전에 술 먹고 공황이 온 적이 있어서 그 후로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근데 그냥 내 일상까지 찾아왔다니. 그렇지만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하루가 있을 수도 있구나. 내 생각보다 내가 많이 피곤했을 수 있지. 인간의 10명 중에 9명이 경험하는 게 공황이라잖아? 그렇게 또 나를, 새로운 경험을, 닥친 일들을 받아들인 사건으로 남겼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다.
멜랑콜리아.
이 영화를 너무 잘 만들어서 공황이 온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