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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나 의외로 괜찮을지도?

내가 만난 남자들(6)

by 애랑



생각하다가 지쳐서 잠들었는데 새벽녘에 눈이 떠지자마자 생각이 시작돼서 이후로 잠은 못 들었다. 자꾸 오빠한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악담보다는 나에게 얼마나 상처였는지를 깨닫게 해 주려는 말들이 많았다. 그걸 말한다고 들고 깨달을 사람이었으면 그런 짓을 안 했겠지. 그의 삶에 구원 욕망이 있는 것 같다. 본인이 선택한 삶인데. 자신도 고칠 의지가 없는 사람을 내가 왜 도와주려고 할까 싶어서 생각을 자꾸 멈추려고 노력했다.


출근을 위해 샤워를 했다. 씻다가 내려다본 가슴. 문득 오빠가 내 가슴을 좋아하던 게 생각나고 영상물과 겹쳐 보이며 내 몸뚱이가 더럽다고 생각이 들었다. 성인 웹툰이나 snl 섹드립 등 아무렇지 않고 웃으면서 봤던 것들이 하루사이에 다 불쾌했다.


영상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빠와의 기억들이 다 역겨움으로 느껴졌다 죄책감, 수치심이 느껴진다. 섹스가 더러운 거라고 생각이 든다. 왜 봤을까.. 그 장면이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그게 너무 역해서 속이 계속 안 좋았다. 불쑥 내 앞에 나타난 장면은 사라지지 않는다.


밥이 안 넘어가서 식이장애 상담선생님한테 메일을 보냈다. 전화가 왔다. 상담 때마다, 차일드 파트인지 어른 자아인지 확인하라던 상담 선생님이 욕을 하셨다. 내 모니터링 일지를 통해 그와의 썸부터 그에게 위로받았던 시간들, 다투고 힘들어하던 상황을 다 알던 선생님이셨다. 내가 잘못한 건 없다고 하셨다. 작정하고 속이는 데 어떻게 알겠냐고 하셨다. 앞에 아른거리는 영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단하게 환기를 시키자고 했다.


- 지금부터 색깔 찾기를 할 거예요. 어떤 색깔을 찾게 할 건데 빠르게 최대한 빠르게 대답해야 해요. 지금 주위에 파란색이 몇 개가 보여요?

- (파란 차, 하나. 안내판, 둘. 지나가는 아저씨 옷, 셋. 건물 벽면, 넷. 창문 테두리, 다섯. 하늘, 여섯) 여섯 개요.

- 잘했어요. 그럼 빨간색을 찾아볼까요.

- (꼬깔콘, 하나. 자동차, 둘. 건물 안전가이드, 셋.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 넷) 네 개요.

- 좋아요. 더 빠르게 이번엔 초록색.

- 하나 둘, 두 개요.

- 잘했어요. 흰색도 찾아볼까요.

이번 일이 터지고 처음으로 오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색깔 찾기를 하며 본 하늘은 맑고 예뻤다. 내가 매번 보던 하늘인데, 구름인데, 이렇게나 맑은 날이었는데.


상담선생님이 너무 걱정하셔서 속으로 아니 나 그 정돈 아닌데..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헤어지고 힘들었던 순간들보다 감정은 괜찮다고 느꼈다. 근 몇 주간 친구랑 대화하다가 웃어도, 즐거워 웃는 게 아니라 웃을 타이밍이라서 웃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웃겼다. 내 상황으로 드립 치는 것도 가능했고 웃음이 났다. 뭘 먹으려 할 때 영상이 떠오르는 걸 빼면 하루 만에 너무 멀쩡해졌다. 퇴근하고 에너지가 넘쳐서 오랜만에 러닝을 뛰었다. 운동 후, 개운해야 하는데 땀이 식기도 전에 길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왜 우는지 몰랐지만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눈물이 났다. 집에 돌아와서 빨래를 개는데 또 눈물이 났다. 평소였으면 내 감정을 분석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힘들구나 마음이 많이 아프구나 하고 그냥 울었다. 그렇게 빨래하나 개고 울고, 하나개고 울고 그렇게 집 정리하는 내내 울었다. 살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계속 눈물을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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