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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해했다

내가 만난 남자들(5)

by 애랑


아침 7시 반, 언니한테 카톡을 보냈다. 세상이 왜 이러냐고. 언니가 전화가 와서 다 말하고 나니까 그제야 눈물이 났다. 언니 앞에서 운 게 처음이었다. 언니한테 의지한 게 처음이었다. 집에 남은 오빠 흔적을 다 버리고 산부인과에 가서 성병검사도 했다. 서있을 기력이 없어서 집에 와서 누워만 있었다. 잠도 안 왔다. 뇌가 끊임없이 각성하면서 나를 과거의 모든 시간으로 데려갔다.


오빠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돼서 나갔다. 분명 어제저녁까지 예쁘게 하고 편지를 챙겨서 나가야지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자지도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한 발짝 한 발짝을 겨우 떼었다. 오빠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따뜻한 티를 사 와 건넸다. 내 입은 답이 없는 질문들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입을 열면 쏟아져 나올까 봐 그저 고개만 저었다.


앉아서 가만히 그를 들여다봤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었던가.

너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눈으로 나를 봐왔던 걸까.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 진심이었어?”


12시간을 넘게 떠올린 수많은 의문 속에서 내가 처음 뱉은 말이었다. 너의 사랑이, 그리고 나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길 바랐나 보다.

왜 숨겼냐고,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냐는 이어진 나의 질문에 그는 진실을 덮으려는 핑계들을 말을 했다. 자신의 사랑은 진심이었다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슬픈 눈으로 나를 봤다. 가해자는 너라고 슬픔 비슷한 것도 느낄 생각 하지 말라고 말했다. 전날 떠오르던 생각들을 다 뱉었다.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고 어떤 기분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가 알았으면 했다. 오빠의 친구들도, 친형도, 알고 있다고 했다. 나만 몰랐다. 정신병원은 니들이 가라고 애먼 사람들 미치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멍 때리다가 다시 쏘아붙이고 멍 때리기를 반복했다. 전날부터 떨리기 시작한 손은 여전히 덜덜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자해를 이래서 하는구나.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멈추고 싶어서. 회피하고 싶어서. 이대로 세상이 망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차로 치지 그랬냐고, 그냥 칼로 찌르지 그랬냐고 왜 사람을 힘들게 하냐는 내 말에 그는 누구보다 아픈 표정을 하며 그런 말은 하지 말라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나를 잡는 그의 손이 더럽다고 느꼈다. 그의 손이 닿는 게 불쾌했다. 영상 속 오빠가 떠올랐다. 다른 여자를 주무르던 손. 근데 더럽다고 말하지 못했다. 씻지 못할 상처를 줄까 봐 삼켰다. 유일하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생각이었다.


힘을 조금이라도 풀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아서 온몸에 힘을 주어 버티며 한 발씩 내디디며 집에 갔다.


또 넋을 놓고 있다가 해가 졌다.


현생을 다시 잡고 싶었다. 지나간 일이라고 흘려보내고 싶었다. 무너질 생각은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싶었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 감정을 다루고 싶었다.

유튜브를 찾아보는데 이건 바람도 아니고 잠수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었다. 아무리 찾아도 만나던 사람이 애로배우였다는 경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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