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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클코치 윤희진 Sep 10. 2021

운수 좋은 날

아버님! 다음에 천국에서 뵈어요.

운수 좋은 날 

    

올 여름도 예외 없이 휴가철이 맞이했다. 매일처럼 학생들과 어머니들께 전화로 상담하는 일을 잠시라도 놓을 수 있어 좋다. 휴가 계획으로 빠질 수 없는 것은 시댁과 친정을 방문하는 일이다. 7월 30일 금요일 모든 업무를 마치고, 내일 휴가 갈 생각에 부푼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7월 31일 새벽 1시 40분쯤이었나? 남편의 통화소리에 잠이 깼다. 큰 소리가 아님에도 잠이 깬 이유는 남편이 너무도 진지하게 통화하고 있어서이다. 어머님과의 통화를 통해 나는 바로 직감했다. 

‘아, 아버님께서 돌아가셨구나!’

전날 저녁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 아버님께 안부 전화 드린 지가 너무 오래 되었네? 전화를 드려볼까? 에이, 내일 어차피 시댁 가는데 갈 때 전화 드리지 뭐.’

생각났을 때 바로 실행해야했다. 어쩌면 아버님과 마지막 통화였을지도 모를 그 통화를 나는 영영 못하고 말았다. 아버님은 기다려주시지 않으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원래 오전 11시 쯤 짐을 챙겨 내려가기로 했다. 그러나 일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가서 어머님을 뵙고 아버님 장례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추스르며 아이들 옷가지와 내 짐을 챙겼다. 곤히 잠든 딸과 아들을 깨우며, 

‘어서 일어나. 할아버지 돌아가셔서 지금 내려 가야해.’

아이들은 갑작스런 할아버지 부고 소식에, 아님 잠결이라 그런지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우리 가족은 새벽 3시에 진주로 향했다.


내려가는 동안 장남인 남편의 슬픈 마음을 달래 줄 어떤 말도 나는 해 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 맞으리라. 9시가 좀 넘어 시댁에 도착했다. 아이들을 그 곳에 두고 우리 부부는 바로 장례식장으로 갔다. 아버님의 임종을 직접 뵌 어머님과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큰 동서, 서방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숙모님과 숙부님. 몇 몇 화환이 이미 도착했지만, 아직 빈소는 아버님의 영정 사진도, 국화도 없이 휑했다.

얼마 후 상조회사에서 사람이 왔고, 막내 서방님도 오셨다. 세 형제와 상조 회사 사람이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동서와 숙모님과 어머님 곁을 지켜드렸다. 갑작스레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공감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냥 말없이 어머님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 그 어떤 말로도 아마 어머님을 위로하긴 힘들 것이기에. 


곧 빈소가 조문객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2시 임종 예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장례 일정에 들어갔다. 예배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님을 처음 뵌 순간부터 마지막까지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26살, 상견례 때 밝은 미소로 맞아 주시던 모습. 결혼을 앞두고 인사드리러 시댁에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인자한 모습이 떠오른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그 땐 너무 어려 아버님의 선친을 잃은 아픔을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찾아오시는 조문객들을 맞아 인사드리기 바빴다. 큰 딸 출산을 2개월 정도 앞두고 할머님마저 별세하셨다. 첫 증손녀를 그리도 보고 싶어 하셨는데…… 1년 사이에 부모님을 여의신 아버님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기억해 보면 아버님과의 추억이 그리 많지는 않다. 1년에 고작해야 설, 휴가기간, 추석 정도만 뵐 수 있었기에. 그래도 찾아뵐 때마다 좋은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다. 큰 며느리라고 딸처럼 대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당신은 아들만 셋 두셨기에 큰 며느리인 나는 처음 맞는 여자 식구였기 때문이리라. 

‘아! 좀 더 자주 전화 드리고, 찾아뵐 걸……’

후회해 봐도 소용없다. 아버님은 기다려주지 않으셨다. 이제 살아생전엔 뵐 수 없기에 슬프다. 물론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곳에 가셨기에 고이 보내드리지만. 아버님의 손 한 번 잡아드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님은 늘 기도해주셨다. 당신에게 첫 손녀인 내 딸, 장손인 아들, 큰 아들인 남편과 딸 같은 며느리인 나를 위해. 아버님의 눈물 어린 기도가 우리 가정이 지금까지 잘 서있을 수 있는 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목사님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더 많이 섬기고 기도하셨던 아버님. 국가 유공자로 나라를 위해서도 헌신하셨던 아버님. 그 누구보다 어머님을 사랑하고 아끼셨던 아버님. 그 빈자리가 너무 크다. 이제 그 빈자리를 오롯이 안고 사셔야 하는 어머님께 잘 해 드리는 게 도리다.

입관 예배 전 아버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다.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관 속에 잠 드신 아버님. 곧 깨어나실 것처럼 웃는 인상으로 누워계셨다. 나는 안다. 아버님이 천사의 손에 이끌려 이미 주님을 만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 땅에서 아버님을 뵐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이 한없이 나왔다. 남편과 나는 아버님을 싸고 관 뚜껑을 덮는 것까지 밖에서 바라보았다.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머금으며. 

‘아버님, 저 천국에서 큰 아들, 큰 며느리, 큰 손녀와 손자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아버님께서 남겨 주신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줄 수 있는 믿음의 가문이 되도록. 아버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훗날 천국에서 뵈어요.’


아버님 빈소 모습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떠오른다. 아픈 아내를 홀로 집에 남겨두고, 인력거 일하러 갔던 김 첨지. 그날따라 그렇게 일이 잘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에 거나하게 친구와 술도 한 잔 하고,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도 사 갔는데…… 아내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 

왜 이 소설이 아버님을 떠나보낸 이 시점에 생각이 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코로나 19 때문에 뵙지 못한 아버님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던 나. 하지만 이제는 이 땅에서는 뵐 수 없는 아버님. 아버님을 저 천국에서 다시 뵐 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아버님께서 그리 하셨던 것처럼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자녀들에게 신앙의 좋은 유산을 남겨주고 싶다. 교회를 사랑하시고 나라를 사랑하신 아버님처럼 살고 싶다. 아버님 떠난 빈자리를 아버님만큼 채워드릴 수는 없겠지만, 어머님께 늘 안부 전화 드리며 살아야 되겠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의자에 앉아 하모니카로 찬송가를 불었던 때가 생각난다. 값나가는 하모니카는 아니지만, 아버님이 부셨기에 가치를 매길 수 없었던 훌륭한 연주회였다. 그 때가 아버님의 하모니카 소리를 들은 마지막 날이 될 줄이야. 모르긴 해도 내가 아플 때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더 엎드려 기도하셨을 아버님. 오늘도 아버님의 기도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버님께서 부신 하모니카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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