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되죠.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고독한 작업이죠.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여행에 비유하는데, 저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행위라고 생각해요. 여행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나서 낯선 곳으로 혈혈단신 가는 것이죠.
개인에게 고독은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떠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죠. 둘째,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는 거예요. 자신과 대면해야만 내면이 탄생합니다.
내면은 대부분 읽는 과정에서 형성됩니다. 저는 읽기라는 행위가 두 가지 역량, 즉 고독해질 수 있는 역량과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고 생각해요.
아렌트가 구분한 개념으로 보면, 읽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고독해지는 게 아니라 외로워집니다. 추방되는 것에 가까운 두려움이 밀려와요.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중요한 역량입니다.
_ 김성우,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독일 철학자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뜻하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매일 약속을 잡고 늦은 시간까지 남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죠. 쾌활한 모습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내면은 온통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릅니다. 준거집단을 설정한 뒤 자신도 구성원임을 늘 인증 받고 싶어하는 거죠. 이들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집단으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을 높이는 위험인자에 불과합니다.
반면, 혼자서도 작은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깊이 있게 사유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면서 홀로 있는 시간을 향유하죠. 이들에게도 준거집단이 있어요. 바로 '자기 자신'이요. 조선 후기 시인인 이덕무가 그러했듯, '마음에 꼭 드는 시절에 마음에 꼭 드는 친구를 만나서 마음에 꼭 맞는 말을 나누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벗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하루종일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다른 사람들과 전혀 어울릴 줄 모르는 은둔형 외톨이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가진 개성과 세계관이 꽃 향기가 되어 주변의 관심을 불러모으죠.
자기 자신을 준거집단으로 삼고 중심을 잘 잡으려면 선문답 같지만 내가 누군지 잘 알아야 합니다. '가치관'이라는 물줄기가 모여 결국 '나'라는 바다를 이룹니다.
따라서 나 자신이 누군지 이해하려면 다른 사람의 내면을 향해 안테나를 세우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가치관과 조우했을 때 내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며 얼마나 격렬히 반응하는지를 자세히 관찰해야 합니다. 즉 나의 당파성을 확인하는 것이죠.
안테나를 세우고 내가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남긴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나의 독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읽은 독자가 된다. 이때 내 책은 단지 일종의 확대경일 뿐이다. 나는 그들 내면에 이미 자리한 것을 읽기 위한 도구를 제공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