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누구를 위한 것인가

by 박종성
태초에 부정행위가 있었으리라.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정행위를 눈감아준 사람이 있었으리라.

부정행위를 눈감아준 대가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이의 충성을 얻고, 그 충성에 기초해서 이득을 얻거나 권력을 누렸으리라. 그 과정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비슷한 거래에 동참했으리라.

그리하여 부정행위의 용인이 쌓이고 쌓이자 그 적폐는 관행이 되었으리라.

급기야는, 그 관행에 한통속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상대적 손해를 보게 되었으리라. 위장전입, 이중 국적, 전관예우, 남발되는 자격증과 상. 그것들을 못하게 하면 강변하는 거다. 다 하는 건데 왜 나만 갖고 그래, 불.공.평.하게!

그리하여 마침내 부정행위가 관행을 넘어 정의의 반열에 올랐으리라.

_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유명한 언설을 남겼습니다.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환상과 허구는 오직 디즈니랜드 안에만 존재할 뿐이며, 바깥 세상의 모든 것은 실재하고 진실된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서는 현재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측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업 총수가 사과문을 낭독하고 세습 경영과 무노조 원칙이라는 고리를 깨뜨리겠노라고 국민들 앞에서 선언합니다. 기득권 세력에 의한 적폐가 우리 사회에서 하나둘씩 뿌리뽑혀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련의 현상이야말로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하는 디즈니랜드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TV 화면 밖에서는 관행이라는 명분 하에, 혹은 오래된 습관처럼 적폐를 자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청렴하고 정직해 보였던 정치인조차도 인사청문회장을 드나들 때마다 한두 가지 이상의 불법과 탈법 사례를 목에 걸고 나오니 그렇게 추정할 수밖에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하면 흔히 ‘기득권 세력이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무’라고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보다는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옮겨야 본질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기득권자들의 행실을 본받아 온갖 질서와 룰을 무시하고 편법을 획책한다면 사회 시스템이 과연 유지될 수 있을지. 시스템이 붕괴되어버린 사회에서 기득권이 무슨 의미를 가질지. 잠자리채를 피해 다니며 남의 꿀을 빨아먹는 나비 놀이는 잠시 접어두고, 자신들이 저지른 적폐의 나비효과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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