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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Jun 03. 2020

집 나갔던 애사심, 코로나와 함께 돌아오다

슬픔과 상실이라는 감정을 회사에서 위로받는 날이 올 줄이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연인에게 예고도 없이 이별통보를 받는 기분과 같았다.


처음으로 정식 디자이너가 되었던 뉴욕의 첫 디자인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던 날.


바람이 꽤 차던 금요일 오후 4시. 디렉터가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회사가 지금 굉장히 어렵고 너는 이제 시작하는 입장이니까 다른 곳에 가기 쉬울 거라고. 거기에 한마디 덧붙인다. 나중에 이렇게 너를 다시 도전하도록 세상에 내보낸 나에게 고마워할 거야!(그땐 참 개떡 같은 소리 한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정말 사실이었다. 이 직장을 나와서 나의 커리어의 날개를 단 다음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첫 직장, 내 자리 이런 의미를 부여하면서 잔뜩 가져다 놓은 개인 물건들이 참 쓸데없이 많았다. 딱히 물건들을 다 넣을 박스 하나 없어서 손에 주렁주렁 들고 최대한 밝은 척, 괜찮은 척 웃으며 인사하던 나의 모습. 어색함과 미안함이 섞인 얼굴로 인사하던 나의 동료들. 누가 볼까 봐 회사를 나가서도 한참 멀어질 때까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았던 기억. 참 아픈 기억으로 남았지만 또한 나에게 큰 교훈을 새겨준 날이었다.




미국이란 나라의 냉정함.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 그리고 오피스 책상 서랍엔 짐을 언제든 정리해서 나올 수 있게 토트백을 꼭 구비해두기.


내가 직접 겪은 해고의 경험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해고를 목격하면서 나에게 직장은 자의든 타의든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곳. 다니는 동안 최대한 실력과 포트폴리오를 쌓아서 더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면 그만인 곳이 돼버렸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에게 참 씁쓸하고도 마음 한편이 불편한 일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식당일조차도 애정을 담아서 일해야 마음이 편하고 보람을 얻는 그런 사람이었다. 직원을 소모품처럼 대하는 회사들과 매일 다른 기회를 보며 살아가는 나와의 불편한 관계는 계속되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까진.




애써 울음을 참으며 입장을 발표하는 회사의 CEO



어제 아침, 지금 미국을 휩쓸고 있는 George Floyd라는 흑인의 부당한 과잉 진압에 대한 회사의 입장을 발표한다는 메일이 왔다. 평소처럼 회사의 CEO인 Hans Vestberg가 카메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표정과 얼굴이 아닌 잠을 이루지 못한 듯 피곤에 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흔들리는 목소리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종이에 적어왔다며 글을 읽기 시작했다. 5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그는 분명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겐 슬픔과 상실을 애써 이겨가며 흐느끼는 사람의 목소리로 들렸다.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사람들이 상실감에 시달리는 이때, 기름에 불을 붙이듯 터져버린 이 사건으로 지금 미국은 혼란 그 자체이다. 애써 견디던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져버린 그 처참한 광경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너무 많이 들어서 뻔한 그 말, 진심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코로나 사태가 본격적으로 터진 3월부터 6월이 된 현재까지 나는 매일 회사의 리더십과 대응방식에 놀라고 있다. 리더가 부재된 세상 속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직장이란 곳에서 위안을 받고 있다.


매일 12시부터 30분간 CEO와 각 팀의 리더들이 나와서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직원들에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 마케팅팀의 대표는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일주일에 한 시간씩 우리의 질문에 답하며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아래의 디렉터급 상사들도 2주에 한 번씩 전체 미팅을 하고, 한주가 끝나는 금요일에 직접 쓴 메일을 보낸다.


이 모든 미팅과 이메일에는 공통점이 있다. 리더들 모두 자신들도 주제 할 수 없는 상실감과 무력감에 시달린다고 털어놓는다. 너무 당연한 감정이니 힘들다고 말해도 된다고 말해준다. 직원들을 위해 전문상담가나 명상전문가를 수시로 불러서 우리와 연결시켜준다. 처음엔 아, 커뮤니케이션 참 잘하네 정도로 넘겼는데 점차 그 사람들의 진심이 보인다.


평소 내성적이어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사람이 딱 봐도 어색하고 뻘쭘한 얼굴로 자신의 주방에서 칵테일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개인주의가 팽배한 미국에서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열고 다가가려는 사람들. 우리는 그저 리더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는 건 아닐까. 서툴러서 더욱 진심이 묻어나는 인간적인 모습들 말이다.






회사가 Forbes에서 실시한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응을 잘하는 미국 기업' 1위에 뽑혔다.



직원 만족도 88%, 실화가 되었다.


 나만 이렇게 마음이 열린 게 아니었나 보다. 회사에서 2주에 한 번씩 하는 회사 대처 평가에 대한 조사에서 88% 만족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나왔다. 우리 회사는 전 세계에 정직원만 135,000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그룹이다. 이 많은 직원 중 단 한 명도 해고시키지 않고 있다. 당장 일이 없어진 직원은 2주간 트레이닝시켜서 다른 일에 임시 투입시키면서 어느 누구도 내보내지 않고 있다.(물론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최소한 나의 마음은 움직였다.


나의 마음은 굳게 닫혔던 만큼 참 열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어제 흐느끼며 슬픔을 나누는 CEO의 모습을 보며 나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 나라의 리더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직장이라고 다니는 이곳의 리더는 이렇게 우리의 아픔을 공감해준다는 사실에.




회사 흑인 동료가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백인 경찰관 무릎에 깔려서 9분 동안 서서히 죽어가던 게 흑인이 아니라 어느 동물이었다면, 그 경찰관은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됐을 거라고.


이 아픔이 일시적인 사태로 끝나지 않고 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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