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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Jun 21. 2019

무슨 소리 1


남산강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한 두 달쯤 지났을 무렵, 나는 마구 들떠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욕망하는 나’의 존재를 실감하니 이제야 살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평생 고민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내 욕망의 정체에 대해서도, 나는 왠지 너무 쉽게 답이 내려졌다. “이제 확실히 알겠는데, 나는 공부하는 삶을 살고 싶어.”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나는 공부에 대한 내 욕망 자체를 의심해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심의 순간은 너무나 금방 찾아왔다. 그것도 여러 번. 8주 동안 한 차례도 『삼국사기』를 충실하게 읽어가지 못하고, 책을 읽기보다 핸드폰을 만지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자꾸만 내 욕망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모두가 어렵지만 재밌다는 『안티-오이디푸스』가 내게는 자괴감만 유발하고 있는 요즘에는 더더욱 그랬다. 잠시 착각했을 뿐, 나는 사실 공부를 안 할 놈이었나 하는 의심이 자꾸 올라왔다. 나는 공부를 욕망하는가, 하지 않는가. 양 극단의 답안을 두고 고민하고 있던 중, 『욕망과 혁명』에서 다의성에 관한 내용을 읽었다. 가타리는 말한다. 이분화된 가치 틀 안에서 순수성을 증명하려고만 드는 이의성에서 나아가 ‘행위의 다의성’을 고려하라고. 정곡이 찔림과 동시에, 그의 말을 놓고 끈질기게 생각해보면 왠지 내 고민에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해서,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하고자 한다. 내 현실을 이의적으로만 해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또, 거기서 벗어나 내 삶을 다의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어떤 것인가?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단지 믿기만 하는 무의식

가타리는 좌파가 지배 계층과 맞서면서도 그들과 타협하고 억압을 재생산할 때,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의적인 논리를 구사한다고 한다. 지배 계층과 결과적으로 같은 현실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들관 달리 어쨌거나 우리는 혁명적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모호한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이의성은 가치에 대해서 하나의 명확한 코드를 지정하는 일의적 태도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컨대, 혁명과 비-혁명이라는 이원화된 틀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이 틀 위에서 전사하니, 세계는 오직 혁명과 혁명, 비혁명과 비혁명으로 파악된다.

모든 현실을 오이디푸스적인 틀 아래 끼워맞추는 정신분석에서도 같은 양상이 벌어진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정신분석 모델은 다음과 같다.

도대체 <따라서 이것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었다>란 무슨 뜻일까? 오이디푸스와 거세 위에서 <따라서>의 으깨짐. 안도의 한숨. 그렇지, 대령, 교관, 교사, 보호자, 이 모든 이것은 그것, 즉 오이디푸스와 거세를 말하려는 것이었어.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125쪽)

위 장면에서 환자의 무의식은 코드화된 개념에 의존하며 정해진 틀로, 즉 오이디푸스와 거세로 모든 현실을 전사시킨다. 대령은 아버지이며, 교관 역시 아버지, 교사도 보호자도 아버지인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현상을 ‘무의식의 거세’라고 표현한다. 거세된 무의식은 기성품적이며 차이 없는 의미화를 생성한다. 차이가 발생하지 않으니, 무의식은 생산을 멈추고 다만 믿기만 하고 있다.

내가 욕망의 유와 무라는 단일한 코드 아래에서 내 현실을 파악하고 있을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부에 대한 욕망 있음, 있음, 있음. 어? 이건 없음, 없음, 없음…. 끊임없는 재현, 그것만이 내가 현실을 흡수하는 방법이었다. 교차되는 수많은 흐름이, 과정이 무시되었고, 나는 생산의 흐름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방황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욕망이 없다, 는 단촐한 현상 파악 뒤에 어떻게 ‘그래서 그 다음에’가 올 수 있었겠는가. 이원화된 가치 틀에 의존해 현실을 본다면 다음 동작으로 나아갈 방도가 없다.


그래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다의성을 고려한다면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게 될까? 이에 대해선 가타리의 문장에서 힌트를 얻었다.

나는 욕망해방에 대해서 말하지만 몇몇 여성들에게 질투하고 독재적이다. 나는 여성해방을 말하지만 아직도 많은 여성에 대한 소유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 사람들이 모순의 여러 요소들을 열거할 때만 어떤 배치가 발전할 수 있다. 즉 내가 일정한 상황 아래에서 실제 얼마나 미시파시스트인지를 밝히는 분석과정이 발전할 수 있다. (펠릭스 과타리, 『욕망과 혁명』, 42쪽)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장은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다. 이의적인 해석을 취한다면 가타리는 스스로의 소유관념과 독재성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축소한 채, 여성해방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 진심’을 입증하려고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자기 과신을 버리고, 억압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기 자신 속까지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 배치를 전복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으로 이행할 수 있게 된다. 모순의 여러 요소는 현존하지만, 그 위에서 그의 배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현실도 이처럼 더 세밀하게, 더 실제적으로 봐야 한다. 공부하고자 하는 욕망과 모순되게도, 내게는 ‘이미 이해할 수 있는 공부만 하면서 똑똑한 기분을 느끼고 싶은’ 욕망도 있다. 내가 배격하고 싶은 욕망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나 자신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나를 만들어낸 모순된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다시 말해 다의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 나를 생산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첫걸음이다. 예컨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똑똑한 기분을 느끼려는 욕망이 지금 공부하고 싶은 욕망을 간섭해 절망과 경직이라는 흐름을 산출하고 있는데, 이 배치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가. “너 공부에 대한 욕망이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어떡할래?” 같은 막막한 추궁보다 훨씬 ‘생산적’이지 않은가? 이렇게 생산을 이어가는 질문으로 앞으로의 공부길을 해석해 나간다면, 나는 이제 전보다 씩씩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부 할 놈, 안 할 놈의 이분법에 포획되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갈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장은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다. 이의적인 해석을 취한다면 가타리는 스스로의 소유관념과 독재성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축소한 채, 여성해방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 진심’을 입증하려고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자기 과신을 버리고, 억압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기 자신 속까지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 배치를 전복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으로 이행할 수 있게 된다. 모순의 여러 요소는 현존하지만, 그 위에서 그의 배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현실도 이처럼 더 세밀하게, 더 실제적으로 봐야 한다. 공부하고자 하는 욕망과 모순되게도, 내게는 ‘이미 이해할 수 있는 공부만 하면서 똑똑한 기분을 느끼고 싶은’ 욕망도 있다. 내가 배격하고 싶은 욕망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나 자신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나를 만들어낸 모순된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다시 말해 다의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 나를 생산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첫걸음이다. 예컨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똑똑한 기분을 느끼려는 욕망이 지금 공부하고 싶은 욕망을 간섭해 절망과 경직이라는 흐름을 산출하고 있는데, 이 배치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가. “너 공부에 대한 욕망이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어떡할래?” 같은 막막한 추궁보다 훨씬 ‘생산적’이지 않은가? 이렇게 생산을 이어가는 질문으로 앞으로의 공부길을 해석해 나간다면, 나는 이제 전보다 씩씩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부 할 놈, 안 할 놈의 이분법에 포획되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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