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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Jun 21. 2019

무슨 소리 2



사막 정착민의 고백

솔직히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지금껏 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자본주의에 예속된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더 많이 떠올렸다. 예컨대, 외고와 재수학원, 그리고 대학교에서 내가 만난 수많은 엘리트들이 내 머리 속에 먼저 떠오른 것이다. 그들은 부나 명예, 혹은 고용 안정 등의 막연한 가치를 움켜쥐고자 맹목적으로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항상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질책한다. 반면, 스카이 입학이 허망해 보여서 도저히 입시에 열중할 수 없었던, 그러면서도 딱히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은 내 신체는 제법 솔직하지 않은가. 거기다 난 여기 강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전보다 훨씬 덜 불안한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를 들어가며 난 자본주의에 철저히 예속된 모범생들과 나 사이를 구분했다. 예속된다는 건 무조건 공포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스스로가 남들보다는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저번 주 수업 시간에 죄책감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전제군주 기표가 불러온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 멍해졌다. 공포는 전제군주 기표의 효과고, 대신 자본주의는 ‘냉소’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발제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나 막막한 것을 보니, 내 삶과 남의 삶을 지배하는 공포는 꽤 쉽게 보이는 데 비해, 냉소를 포착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전제 군주 기표보다 자본주의라는 충만한 몸이 훨씬 더 교묘하고 위선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홈 파인 길에서 도망치기 위해선, 이 ‘냉소’를 반드시 직시해야 할 것 같다. 냉소는 내 삶에 어떤 경로로 도입되었을까? 또 이렇게 자리잡은 냉소는 어떻게 자본주의 기계를 계속해서 생산하게 할까?


스펙이 되는 탈코드화

공포가 아닌 냉소로서의 예속을 상상하기 위해, 나는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착실하게 살아가는 주위의 모범생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생각해보니 스스로의 욕망에 관심이 없기는커녕, 자신의 욕망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더 열렬하게 드러내는 데 특화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몰개성하게 시험 성적이나 자격증을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이들은 일본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서 수십 개의 영상에 한글 자막을 제작하고, 시 짓기를 좋아해서 독립출판물을 내고,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 배급 시장을 관찰하고 논문을 쓴다. 이렇게나 활력 넘치고 열정적인 엘리트들의 삶에서 예속이란 단어를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자유롭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할 때, 나는 늘 막연하게나마 이런 삶의 태도를 떠올렸던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기. 그렇게 함으로써 개성 있는 멋진 사람이 되는 것.

(문명 자본주의 기계를 설립하는 결합은) 노동의 원시적 연결들을 탈영토화된 새로운 충만한 몸으로서의 자본에 결부한다는 조건에서, 이 유일한 조건에서, 이 연결들을 되찾는 <생산을 위한 생산> 속에서 사치 자체를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만들고 모든 탈코드화된 흐름을 생산으로 복귀시키는 것 같다.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383쪽)

그러나 묘하게도 이 눈부신 개성들은 언제나 어김없이 면접 장소에서 돋보이는 지원자가 되는 데 쓰인다. 일본 아이돌의 팬은 고려대 일어일문학과에 합격한다. 시 짓기를 좋아하는 대학생은 자기소개서에 개인출판 경험을 내세우며 대기업 마케팅 부서에 취직한다. 영화 마니아는 CJ E&M에 취직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범생들은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자유로운지를, 자신의 탈코드화된 흐름을 입증함으로써 대학과 회사의 선택을 받는다. 그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펼치지만 그 탈영토화의 성취는 다시 자본의 가치로 환산된다.

물론, 모범생들의 자유로움이 ‘이색적인 스펙’이 될 때, 그들은 결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 뜨고 코 베인 피해자가 아니다. 애초 그들은 자유롭고자 할 때면 언제나 자본에 의한 재영토화를 전제하고 있었다. 내 개성이 나에게 성공을 주었음 좋겠어, 내 독창적인 욕망을 통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그 욕망은 이런 내용일 것이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나도 개성 있는 멋진 사람이 된 스스로를 상상할 때 ‘인정받는’ 지식인의 표상을 그리고 있었다. 모범생들은 ‘탈영토화된 노동자’, ‘자기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자유롭고 벌거벗은 노동자’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385쪽)가 되는 삶을 추구한다. 자유로움을, 즉 노동력을 입증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팔아야 하는 삶을 목표로 한다니, 이만큼 냉소적일 수가 있을까?


자본주의의 독실한 신자가 되다

냉소의 시대는 이상한 독실함을 동반하고 있다(이 둘은 휴머니즘을 구성한다. 냉소는 사회장의 물리적 내재성이며, 독실함은 정신화된 원국가의 존속이다. 냉소는 초과노동을 수탈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이지만, 독실함은 이 동일한 자본이되 모든 노동력이 그로부터 유출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신-자본과도 같다.)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385쪽)

이렇게나 냉소적인 욕망이 나를 지배했는데, 어떻게 지금껏 거북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자본주의 기계가 내 욕망에 새긴 냉소를 확인한 지금도, 나는 그다지 절망적이거나 비참하지 않다. 그건 내가 여전히 너무나도 독실하게 ‘신 자본으로부터 모든 노동력이 유출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영영 존속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은, 그 아래에서 이 정도로만 자유로운 삶이 내게 최선이라고 굳게 믿는다는 뜻이다. 늘 어느 정도까지는 예속된 삶이 확고부동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아쉬운 마음이나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들기는 힘든 것이다. 그리하여 냉소는 자본이 엘리트들의 열정적인 노동(초과노동)을 계속해서 수탈하는 수단이 된다.

들뢰즈는 말년에 한 인터뷰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사막에서 태어난다. 사막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적어도 사막을 건너는 것이 가능하지만, 사막에서 태어난 사람은 사막이 아닌 곳을 모르니까 더욱 암울하다.’ (김재인,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느티나무책방, 215쪽) 고 말했다고 한다. 자본주의라는 사막 한 가운데서 태어난 젊은이인 나는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대해서 상상할 때도 언제나 자본에 의한 재영토화를 함께 떠올린다. ‘사막 아닌 곳, 자본주의 없는 곳은 없을 것’이라는 은밀하고 익숙한 냉소는 그렇게 나를 자꾸 사막에 정착하게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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