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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Jun 21. 2019

무슨 소리 3


죽음, 진짜 현실이 되다

3년 전, 정신과에서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진단 내용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무엇이 불안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수능 성적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전형적인 재수생처럼 보이기는 싫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죽는 것이 무섭다’고 콕 집어서 대답했다. 그건 가장 솔직한, 또 그나마 가장 정확한 대답이기는 했지만, 사실 대꾸를 하면서도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고, 그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고 나서, 나는 질문을 바꾸어 내가 왜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지, 이 불안의 진짜 근원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오이디푸스적으로 부모 핑계도, 입시 제도 핑계도 대봤지만 왠지 전부 마땅찮게 느껴졌다.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는 바로 거기서 더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책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죽는 것이 무섭다’는 감상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짚어준다. 그건 바로 죽음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화되어 ‘죽음 본능’이 되면서부터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죽음

원시 영토나 야만 전제군주 사회에서는 모든 욕망의 흐름들을 일정하게 코드화하는 객관적 재현 체계, 즉 외부가 있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관적 재현 체계가 도입된다. 즉, 의식을 가진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로서 부상한다. 자본주의 체계는 이런 주관성,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회수하는 대신 코드 없는 공리계에 가둬놓는다. 이땐 죽음조차 내부의 것이 된다.

죽음이 탈코드화되는 것과 동시에, 죽음은 모델 및 경험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죽음은 본능이 된다, 말하자면 죽음은 생산의 각 행위가 자본으로서의 반생산의 심급과 얼키설키 뒤섞이게 된 내재적 체계 속으로 퍼져 간다. (…) 사람들은 죽음을 욕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은 죽은 것, 이미 죽은 것, 즉 이미지들이다. 모든 것은 죽음 안에서 일하고, 모든 것은 죽음을 위해 욕망한다.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559쪽)

“죽음이 본능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파악하기에, 그것은 죽음이 오로지 인간적인 것, 나에 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죽음조차 주관적 재현 체계를 거친다. 즉 인간의 시선 아래에서 이미지화되어 인간적인 것이 된다. 죽음은 개인에게 ‘인간의 생명을 끝내는’ 파괴의 이미지로서 인식된다.

애초에 인간적인 시선, 즉 ‘나’에 대한 이미지를 구상하는 힘이 없으면 죽음에 대해서도 어떤 이미지를 부여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내가 인간적인 죽음에 두려움, 부당함 등의 정서를 부여한 것은 그것이 내 ‘자아’의 완성을 언제 해칠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개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장차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물건을 소비하면서 살아가야 나 다운 것일까. 나는 자아를 어떻게 완성해나갈 것인가만 고민하면서 매일매일을 살았다. 확고부동하게 굳어진 자아만 바라보는 일상 속에선, 나는 계속 떼를 쓰는 수 밖에는 없었다. 죽음아, 꼭 내 자아가 완성된 다음에만 찾아와 다오. 죽음은 언제든 우연히 찾아온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인데, 나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항상 불안했다. 자아의 완성이라는 형식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내 삶에는 항상 ‘죽음’에서 오는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죽음의 경험은 곧 생성의 경험

앞서 인용문에서, 들뢰즈는 우리가 “죽음의 경험”과 무관해지면서 죽음이 본능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죽음이 끝, 파괴 등의 인간화된 이미지로 묶이지 않는다면, 또 죽음이 자아의 완성을 해치는 시한폭탄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관 없는 몸은 욕망 기계들의 생산 작용의 결과일 뿐 선행하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며, 변신 내지 변모의 계기이다. 기존 것들이 무화되고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는 시간. 죽음의 시간. 한순간. 시간의 흐름에 틈이 있다. 우연이 개입하는 계기. “시간은 경첩에서 풀려나 있다.” (김재인. (2013).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176쪽)

죽음의 시간은 어떤 우연이 내게 개입할 수 있게 되는 틈이다. 이 죽음을 통해서만 욕망 기계는 기존의 것을 무화하고 새로운 것들을 탄생시킬 수 있다. 예컨대, 자아에 대한 고집을 무화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죽음의 경험은 그런 점에서 반드시 ‘생성의 경험’이기도 하다.

늘 회고하지만, 내가 강학원에서의 공부를 만난 것도 참 우연한 일이었다. 처음 나는 청년공자스쿨 2기를 등록하면서 강의의 도움을 받아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삼국사기』 등을 완벽하게 독해하게 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했다. ‘지성을 갖춘 멋진 사람’이라는 자아를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연히, 강학원과 나의 만남은 내가 기대했던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근영쌤의 강의를 들어도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8주 내내 낯설기만 했다. 『삼국사기』를 읽으면서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가뭄과 전쟁에 따분해 하다가, 이따금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는 기록을 읽을 때만 헉 하고 정신을 차렸다.

오히려 내가 겪은 변화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부문에서 일어났다. 자아를 완성시키는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자꾸 구멍을 내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입에도 안 댔던 가지볶음을 먹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현주소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 페이지 반짜리 글을 열심히, 써갔다. 나는 처음으로 내 욕망이 월 오백을 버는 전문직의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 외에도 내가 걷잡을 수 없는 우연한 계기로 변화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식의 변화는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는다. 자아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붙잡고 있을 때, 우연성의 개입은 자아의 반대되는 항으로서 무조건 두렵고 부당한 것이다. 그러나 우연성이 자아 이미지를 부수게 놔두면, 우연한 죽음과 생성이야말로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진다. 자아 이미지라는 가상 세계에서 벗어나, 우연이 마구 개입하는 현실적 지반 위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다 보면, 내가 이전의 나로부터 갈라지는 일은 사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분열-분석이 “바깥과의 약간의 참된 관계, 약간의 진짜 현실 말고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분열-분석은 자아라는 공리계에서 벗어나는 작업으로, 바깥과의 참된 관계를, 진짜 현실에서의 삶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삶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매 순간 분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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