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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May 14. 2020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글이다


편혜영 작가는 자신의 두번째 단편집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 작품을 다 쓰고 나면 오히려 한 시절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함께 소설 쓰는 사람들이 위로가 된다. 그들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소설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소설을 쓴다는 게. 즐겁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한 시절을 졸업할 수 있는 글을 써낸 작가들을 몸서리치게 질투했다. 나에게는 너무 잃고 싶어하는, 그래서 더 잃지 못하고 있는 모습과 시절이 있다. (조급하게 성장하고 싶어하고 만사를 유치해하고 그러다가 평생을 이렇게 재미없게 살다가 죽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그래서 저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동경했다.


오늘은 같은 구절을 읽고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함께”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언젠가 심상정이 토크쇼에서 그가 처음 학생 운동을 시작한 건 “학생 운동을 하는 남자를 좋아해서”라고 말했다. 나는 그걸 보면서 그가 대선 후보답게 귀여운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나는 성공적으로 그의 ‘익살’에 피식 웃고 말았지만 지금은 그게 그냥 그런 익살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 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 무엇도 힘을 다해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운동을 하는 일도 소설을 쓰는 일도. 아마 돈을 버는 일도 가정을 꾸리는 일도.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외로워서 글을 쓴 게 맞지만, 좀 더 엄밀하게는 사랑하는 최소현의 마음에 들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애는 글을 썼고 나는 그게 좋아보였다. 그 애를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 좀 더 치기어린 마음으로 그 애가 나와 대화하고 싶어했으면 바랐다. 그래서 열네살 적 나는 쓸 줄도 모르는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폼나는 글은 아니었다. 우중충한 일기와 쓸데없이 비장한 오타쿠 팬픽을 쓰는 것부터 시작했다.)


지금은 평생 팔지 못하더라도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스물 네살의 나는 글 쓰는 사람들을 기웃거리며 궁금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 글쓰기에 가장 큰 동력이 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인데, 나는 시종 그들에게 보여지고 이해받고자 끙끙대며 글을 쓴다. (민망해서 냉소적인 말투로 쓰는 것을 사과한다 이것은 내 방어적인 습관일 뿐 나는 사실 지극하게 그들과 당신을 사랑한다.) 함께 글을 써주고 읽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는 아마 글쓰기를 시작하지도 계속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은 성공한 작가의 수상소감 같은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다만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는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나는 사랑에 관한 금욕주의가 가장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있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사랑할 것, 너무 사랑하면 안 될 것들은 사랑하지 않을 것, 사랑해야 할 대상만 사랑할 것. 같은 마음 말이다.


사람에겐 평생 쓸 수 있는 거의 무한한 만큼의 사랑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무한한 에너지를 우리는 어떻게 써야할지 배우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그냥 바로 사랑하도록 내던져졌기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세상에는 적당히 마음을 줘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도 우리는 금욕 금욕 금욕한다. 돈 안 벌리는 공부는 너무 사랑하지 말 것 사랑하기 불리한 사람은 사랑하지 말 것 만난지 얼마 안 된 것에 대해서는 딱 그만큼만 사랑할 것, 등의 교리가 있다.


다만 다소의 각박한 교리를 철저히 지키면서도 가장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분출구를 하나씩 마련한다. 막무가내의 사랑이 허락되는 관계를 만들어 피신하는 것이다. 예컨대 연인이라는 딱지를 걸어붙이고 그것을 주기적으로 기념하며 사랑을 퍼붓는다. 내 반려동물 외의 인간 따위들은 행복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진심 반 방어 반 냉소하고 아, 내 자식 말고는 다 남의 자식인 것이다.


나도 열렬히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파도 아닌 뭍에서 안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가장 완전하고 안전해 보이는 사랑처를 선택했었다. ‘머리로 하는 철학공부’가 그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잔머리를 굴려 선택한 사랑의 대상이 남들보단 광대하다고 생각했기에 “사랑은 하나를 하는 것도 둘을 하는 것도 아니라 수천수만을 하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말을 팔에 새겼다. 말로는 겸손 떨며 그렇게 살고 싶어서 새겼다고 했지만 어느 정도는 남들보단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우리는 협소하게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섣부른 서열 정리와 가지치기는 잠시간 안정을 줄 뿐 결국엔 결핍감과 헛헛함을 낳는다’ 고 배웠다. 그걸 머리론 알면서도 나는 다만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사람과 세상을 사랑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주제넘게 철학을 선택했다. 그런 격변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 철학의 지상 목표라는 것을 달달 읽고 외우고 쓰면서도 나는 천페이지 양장본 같이 고리타분한 토대를 사랑하고 싶었  너무나 간절하게.


그러나 말했듯 내가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사람의 사랑은 줄줄 새어나갈 수 밖에 없다. 파도를 타는 일은 멀미를 수반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처음부터 그 일 밖에는 없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 앞에 자주 절망하고 분노하지만 오늘은 김애란과 편혜영의 글 쓰는 마음을 읽고 조금쯤은 우리가 타고난 사랑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멀미를 하기 시작한 최근 계속해서 불안한 손으로 타자를 치고 있다. 앞으로도 내가 글을 쓰고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면 그건 내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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