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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Sep 16. 2019

나는 왜 XX하고 싶을까

1. 정답을 사냥하는 사람


낯선 나라에서 낯선 길을 헤매는 일. 여행을 설명하는 수만 개의 낭만적인 수사법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본질은 아무래도 그 정처없음과 피로감이다. 발바닥이 아프고 땀이 밴다는 육체적인 피곤함도 있지만, 내게는 그보다 정신적인 피로도가 훨씬 컸다. 그건 여행이 곧 선택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일상에서도 수많은 선택을 내리면서 살고 있겠지만, '여행'이라는 배치에서는 내 선택이 오늘 하루의 풍경을 좌우한다는 것을 매 순간 실감하게 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선택지를 탈락시키는 스트레스를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어떤 도시라도 관광객에게는 막연할만큼 넓기 때문에, 한 곳에 도착하는 순간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수많은 시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어떤 곳에 가서 제법 기분 좋게 감탄을 하고 있을 때도, 내겐 바로 옆자리에 알쏭달쏭한 불안감이 자리잡았다. 그건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대신 슈테판 대성당을 갔어야 했나?"라는 식의 구체적인 아쉬움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그냥 만성적으로 깔려 있는 자기 닦달이었다. 


내가 여행을 잘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이래도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건 내가 일상의 수많은 밤낮에 했던 고민과도 아주 비슷한 형식이었다.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이래도 내가 글 쓰고 공부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이래도 내가 외롭지 않게 늙어갈 수 있을까? 당위적 이미지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쏟아진다. 여행에 이렇게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투자해놓고 막상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는 쿨하지 못하게 결핍감만 느끼는 나. 글을 쓰고 싶다고 떠벌거려놓고 빈약하고 공허한 감수성을 가진 나. 게으르게 읽고 글을 쓰지 않는 나... 나는 어딜 가야 하지, 뭘 먹어야 하지, 구글맵을 채근하면서 회색 돌길을 배회하다가도 갑자기 다 좆같고 쪽팔려서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그래서 사나흘에 한 번 씩은 꼭, 한나절 침대에 누워 핸드폰 속 고만고만한 신변잡기로 마음을 마비시켜야 했다. 


불안감과 무기력함에 오랫 동안 침대에 숨어 있다보면 그래도 한가지 결론에는 확신 있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잘함'과 '잘못함'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투박하게 통과시키는 이 내 촌스러운 습관이, 내게 참 해롭구나. 이건 참, 차근차근한 논증을 거칠 것도 없이 일단 너무나 괴롭기 때문에 머리가 상황을 소화시키기 전에 몸으로 먼저 배우는 것이다. 이 짓거리 그만 해라. 지겨워서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몸이 꽥 비명을 지를 때 나는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 끌림에 의해서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에 하루종일 앉아 축축하고 차가워진 손끝으로 글을 썼던 7월의 어느 날. 비슷한 이유로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온 9월 15일. 나는 고민한다. 어쩌면 탓하는 마음으로. 나를 불안하게 하는 이 '잘잘못'의 도식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12년의 정규 교육 과정 동안 나는 줄곧 정답을 곧잘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자습 시간에는 무기력함에 사무쳐 책상에 엎질러져 있다가도 시험 시간에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정답을 맞추려고 덤벼들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정답'을 맞추는 시험의 규칙에 중독이 되어 있었던 거다. 정답은 단 하나의 형태로 분명하게 가려지고, 그걸 맞추고 나면 티끌 만큼의 찝찝함 없이 자신만만해도 되는 시험지의 방식이 좋았다. 한심해서 오랫 동안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명확하게 가시화 된 형태로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인정 받는 것도, 기분이 짜릿했다. 좀 웃긴 건,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내가 시험 점수나 그 결과로 따라오는 학벌 따위로 자기 존재적 확신을 찾으려는 주위 친구들을 허접하다고 비웃고, 사회에 '해롭다'고 엄격하게 분류했다는 거다. 나는 저들보다 나은 사람이기에 좀 더 멋진 방식으로 잘 살아야 한다는 고집이 생겼다. 그 일환으로 글을 쓰고 공부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우월감이나 도그마적인 판단조차, 또 하다 못해 글을 써보겠다는 목표조차 '단 하나의 정답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맞추려는' 집착에서 출발한 건 아닌지. 도저히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다. '더 멋지고 행복한 인생'이라는 정답을 너희가 아닌 나만이 쟁취하고 말겠다는 마음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지배하고 있다. 가장 순전한 내 욕망의 대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목표보다 윤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글쓰는 삶' 조차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글쓰는 삶을 욕망할 때 한편으로 자주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성아는 결국 (우리와 달리)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네.'라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의 씁쓸하고 부럽다는 표정. 역시 쟤는 처음부터 특출난 면이 있었다느니, 하는 체념 섞인 인정. 글로써 어떤 식으로든 '공인된 인정'을 받아서 사람들이 내 성취를 기사로 방송 매체로 접하게 되는 것... 나는 시간이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 최종적으로는 세상 모두가 명확하게 알게 되었으면 했던 것이다. 내가 정답을 달성했음을. 


/ 좀 덜 비관하는 마음으로 다음 편을 쓸 것이다. (2019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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