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 그리고 첫 퇴사, 이직까지
저에게 그 어떤 곳보다 강렬하고 귀중한 레슨을 준 첫 회사를 퇴사했습니다.
퇴사 후 수도없이 이미 많이 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다시 한번 봤습니다.
영화와 5년 2개월 간의 직장생활에서 느낀 점들을 브런치에 나눠보려고 합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회사를 다녀보기 전과 다녀본 후에 느끼는 점이 가장 큰 영화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인원이 33명 정도 되었던 첫 회사를 입사한 저는 어쩌면 영화 속 앤디같은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 영화 속 앤디는 누가 봐도 명문대에서 공부+대외활동 잘했을 수재인데, 취업은 또 만만치가 않아서 관심도 없던 패션잡지 편집장의 비서가 된 상황입니다. 대놓고 말은 안하지만 앤디가 친구/남자친구와 하는 말을 들어보면 패션잡지에 목매는 여자애들은 약간 골빈(?) 애들이라고 이미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건 제 감상) 그리고 내가 내 능력으로 인정받으면 됐지, 내가 예쁘게 꾸미기까지 해야돼?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정말정말로 오만합니다.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칭하는 것도 너무 우습지만, 제 안에는 뿌리깊은 엘리트주의가 있었습니다. (엘리트가 아니어도 엘리트주의는 가질 수 있으니..ㅎㅎ)
예중, 예고, 그리고 미대까지 필터링된 사람들과의 만남, 좁디 좁은 미술계 안에서의 생활은 저도 모르게 저를 '나는 대중들과 달라'라는 오만한 생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대중들과 달라에는 취향, 미감, 생활 반경과 만나는 사람들의 소위 '소준'이라는 것도 포함될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런 우월의식을 벗어던지고 겸손하게 회사에 임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사회생활을 저보다 기본 3~4년은 더 해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오만함이 얼마나 투명하게 보였을지 예상이 됩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산업과 업무에 대한 무시가 제 내면에 깔려 있었습니다.
해봤자 고작 몇만원 짜리 화장품을 사고 팔면서 왜 이렇게 유난이지?
인플루언서들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렇게 지극정성에 저자세이지?
화장품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도화해서 설명해야 하는거지? 비싼 제품과 싼 제품의 차이는 사실 그렇게 크지 않고 다 브랜드값, 허영심을 자극한다는 본질은 똑같은데..
사실 어떤 부분에서는 지금도 저 때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들도 존재합니다.
(뷰티, 패션 등 20대 여성소비자를 주고객으로 대하는 산업들은 여성소비자들에 대한 무시가 몇 퍼센트라도 무조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특정 브랜드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 산업이 그렇기에 지금의 대-k뷰티 시대를 만들어냈고, 자본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점
이 산업이 굴러가는 생태계 - 인플루언서와 브랜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 산업에 deep dive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
누가 봤을 때는 '짜칠' 수 있는 마케팅들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매출을 만들어낸다는 점.
(그리고 매출을 만들어낸다면 그 마케팅들을 소위 '짜친다'고 할 수 있을까?)
저에게 5년 2개월은 제 깊은 곳까지 뿌리내렸던 고고한 자아를 후드려 패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몇개월만에 이렇게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년간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고 그 시간동안 제 안에 박혀있던 가치관들은 제 자존감을 지켜주던 울타리같은 것들이어서, 제가 이 일을 잘하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제 자아가 곤두박질칠 것 같아서 더욱 무시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1년, 2년 버티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산업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일하면서 미술계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물론 미술계에도 미친 사람 많지만, 적어도 제가 속한 사회에서는 정말 정제된 비슷한 사람들만 만났던 것이란 걸 몇 개월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학벌이 안 좋은 사람, 반대로 미대/예체능 계열은 공부를 못한다고 무시하는 사람
인생에 말할 거리가 연예인 가십과 뒷담, 다이어트, 시술 밖에 없는 사람
뱀처럼 정치질하는 사람, 그 와중에 정치질에 휘말려 퇴사당하는 사람
1~2년 연차 차이로 엄청난 잡도리를 시전하는 사람, 그것을 즐기는 타고난 부류들
회사에서는 죄 없는 사람에게 텃세부리고 밖에서는 자기 사람은 진심으로 살뜰하게 챙길 (제가 느끼기에는) 일종의 사이코패스들..
써보고 나니 여전히 제 안에 사람에 대한 증오와 무시가 가득하네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여느 학부 졸업생이 그럴 수 있듯..
'내가 그래도 공부를 이정도 했는데 이런 사람의 이런 지시를 들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제 안에 팽배했습니다.
그럼에도 몇 년을 버티다보니 바뀐 점은,
사실 인생의 수많은 요소 중에 하나일 뿐인 학벌 따위로 일/노동이란 것을 대할 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회사에 돈을 더 많이 벌어다주면, 그 사람이 회사에게는 더 가치있는 인간이다라는 정말 단순하고 누구나 동의할 문장은 생각보다 많이 되새겨야 하고 가슴으로 이해하기까지는 어려운 문장이었습니다.
회사에 계셨던 그 분들께 배운 가장 큰 1가지는, 일만 잘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제 가치관은 여전합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인정받고, 직장인의 본질이 일을 잘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건 환상에 가깝더라고요.
물론 제가 모든 회사를 다녀본 것은 아니니 진짜 능력으로만 평가받는 회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능력'이라는 게 기준이 뭘까요.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회사마다 다를 것이고, 업무능력만 90% 쳐주는 회사가 있을 것이며 업무능력은 50% 사회생활 스킬이 50% 중요한 회사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가졌던 것은 모범생의 환상이었던 거죠. 내가 공부를 잘하면 어른들의 칭찬을 받을거야..라는 어린아이같은 착각이었습니다. 영화 속 앤디가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상사는 그걸 하나도 인정을 안해줘'라고 나이젤에게 징징대는 행동은 사회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걸 인정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던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회사생활에는 업무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술자리에서의 애교있는 모습, 평소에 잡담으로 쌓아둔 사람들과의 친목, '보여지는' 열심히 하는 액팅들..
처음엔 앤디마냥 정의의 사도 납셨던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됐습니다. (보통 성적 잘 받아서 좋은 대학이라는 좋은 '성과'를 얻어낸 친구들이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회사의 시간과 돈만 빼먹는 것 같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 같은 행동들이 왜 나보다 인정을 많이 받을까..
하지만 이조차 그 사회에 들어갔으면서 그 사회를 이해하려하지 않은 제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본질'이라는 단어의 개념은 회사가 정하는 것이고, 제가 내린 본질의 정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비단 그 회사 뿐 아니라 정말 많은 사회에서도 제가 본질이라고 순수하게 생각한 것들보다, 사회적인 스킬이 빛을 발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건 특히 저처럼 예술계통 안에 있다가 회사를 다니기로 한 친구들이 있다면 백번이고 말해주고 싶은 부분입니다.. 고작 5년 다니고 뭘 알겠냐만, 5년 전의 저에게 한가지 조언을 해준다면 그 점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바뀌니 생각보다 비참해졌습니다. 막상 제 ego를 다 깨서 제 스스로를 지킬 연약한 방패막이 다 사라졌는데, 업무적으로는 일을 제 자신으로 대응하여 대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감정없이 회사용 자아만 사용하고 진짜 친한 사람들 만날 때는 180도 바뀌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신기했습니다. 저는 매순간 제 자아의 100%를 사용하고 진심으로만 회사를 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오가는 논의도 진심, 내가 담당하는 프로젝트는 곧 나 자신, 회사에서 내게 내려진 평가는 곧 자존감에 직격탄..
제가 하는 일이 걱정되면 24시간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일을 후임들에게 못 맡기고 혼자 붙들고 있고 (제가 한다고 완벽한 게 아닌데도) 주말에도 인사이트 얻으러 밖으로 나가고, 중요한 프로모션은 10만원이라도 매출이 올랐으면 해서 제 돈을 쓰기 일쑤였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대표님 딸이냐, 라는 농담도 들어봤습니다..
네 회사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누가 물어올 때마다, 제가 하는 일이 너무 중요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정말 열심히 하고 싶고 회사에서 보상을 많이 해주는 만큼 그에 책임감으로 보답하고 싶다, 라는 마음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저를 좀먹더라고요.
회사는 제가 아니었고, 제가 가치가 없으면 언제든지 저를 내칠 수 있는 조직일 뿐인데 저는 인간적인 저까지 회사에 갈아넣으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회사가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스스로 그랬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일 때문에 자기자신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기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할 일 다했다고 무조건 퇴근하고 이런 넷상의 MZ적 태도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일하는 과정에서 진심을 쏟아부어도 됩니다. 하지만 결국 일의 결과가 나왔을 때는, 그것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제 자신과 분리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업의 오너가 되거나 정말 중요한 직책(내 의사결정이 거의 최종 의사결정이 되었을 때)을 맡는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6년차의 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앤대의 패션(산업)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싶습니다.
이건 두가지 입장이 제 안에서도 공존하는데요. 단순 패션잡지사가 아닌 패션업계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런웨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패션에 대한 존중과 관심, 이해도가 있어야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 와중에 나는 내가 맡은 일만 해내면 되니 옷차림은 별 상관이 없어요, 라고 말하는 앤디는 상당히 맹랑합니다..패션 업계에 인생을 바친 미란다 입장에서는 사회생활도 안 해본 앤디가 그런 말을 하니 웃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와중에 친히 레슨까지 준 미란다가 어쩌면 정말 앤디에게 거는 기대가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게임을 안하고 인벤 게시판을 읽지 않으면서 롤 업계에 있기가 힘들듯이, 본인이 속한 산업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존중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필 저 영화가 시각을 사로잡는 '패션'업계이기에 주는 허상도 있습니다.
물론 일과 사회생활에 대한 레슨도 남긴 영화이지만, 결국 이 미디어가 남긴 아이코닉한 영향은 앤디의 화려한 Make over와 샤넬 부츠, 사이즈 2로의 다이어트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세련되고 트렌디하게 차려입는다고 무조건 프로페셔널해지지는 않는데, 앤디의 업무능력이 향상되는 과정은 영화에 세세하게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패셔너블해져서 = 일도 잘하게 되었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패션산업에 있어서 일하는 사람의 룩은 그 사람의 능력 중 일부로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사실 다른 산업에서는 오히려 과하게 꾸미는 것이 방해가 될 때도 있기 때문에 약간의 영화적 허상이 존재하긴 합니다.
더 나아가 저도 누구보다 보여지는 것에 신경쓰는 뷰티업계에 몸 담궜던 사람으로서, 언제나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필드에 있는 여성들이 TPO에 맞는 룩 이상의 꾸밈, 외모 강박이 있다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미디어의 영향을 받고 미디어에서는 완벽하게 꾸며진 모습의 커리어 우먼들만 보기 때문에 이 또한 허상에서 벗어나 자기자신을 지키는 것의 일부인 것 같습니다.
회사 생활은 정말 곡예가 맞습니다.
가끔은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조직이라는 것이 인간의 가장 비굴하고 이기적인 면을 이끌어낸다고 생각이 들어 괴롭지만..
제가 그림만 그렸다면 몰랐을 교훈들을 정말 많이 얻었습니다.
저는 곧 다른 직장에서 회사생활을 재개합니다. 그러면서도 사실 회사라는 조직과 제가 맞는지 아직도 아리까리합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겠죠. 그 끝에는 또 어떤 레슨들이 제게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우선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곡예를 하고 있을 수많은 직장인 여러분과 제 자신에게 손 꼭 잡고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직장인 #커리어 #회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