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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하 Dec 07. 2020

홍대 다닌 후기

아시아 최상위 미대 재학생에, 어도비 프로그램 5개를 구사하는 내가?



난 13살부터 서울대 서양화과를 꿈꿨다. 이유는 명료했다.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학교 1학년 때 교실에서 밥을 먹다가 서울대가서 법대 남자 만날 거라고 중학생다운 허세를 부렸는데 서울대를 나온 27살 담임선생님이 듣다가 "미대랑 법대랑 가까워.." 라고 말을 얹어주셨다. 후에 들어간 고등학교 자체도 서울대 중심 학교였고 6년을 서울대에 바쳤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다. 이렇게 서울대에 미쳐있었던 내가 정말 염두에 두고 있지조차 않았던 홍대에 와서 반수를 염두에 두지조차 않았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 글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매우 편파적으로 보일 듯 싶다. 그러나 만약(은 없지만) 서울대와 홍익대가 있다면 나는 당연히 서울대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우 공정한 글이 될 것이다.



의자를 놓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좁았지만 불만따윈 없었던 2학년 1학기 자리



앞서 기술했지만 나의 꿈은 상향결혼(a.k.a 취집)이었다. 더 고상하게 말해보려고 해도 좋은 남자 만나서 그림 그리면서 살고 싶다는 걸 표현할 가장 간단한 방법이 취집이다. 그런데 지독한 엘리트주의자인 내가 홍대에 오니 취집에 대한 욕구도 한풀 꺾이고 대학오면 무조건 해야지 싶던 연애에 대한 의지는 두풀 꺾였다.(학교 순위를 떠나서 홍대랑 취집은 너무 결이 안 맞지 않은가..) 그러자 당연한 순리로 내 자신이 자유로워졌다. 예중예고라는 우물 중에서도 탑급으로 좁은 우물에서 나는 정말 착하고 똑똑하고 예쁘고 뭐하고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비교적 아는 사람들이 적은 홍대에 오니 자유로웠다. 


우선 사람이 정말 많았다. 

단일 과로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그냥 이속에 묻혀서 이름도 없이 살아가도 좋을 것 같았다. 메이저리그의 1선발은 아니지만 KBO 프로야구단의 3선발 정도가 된 느낌이었다. 어디가서 명함을 내밀 순 있으나 그렇게 부담감과 자부심에 질식할 것 같진 않은 아주 산뜻한 상태였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 최대한 스무스하게 지나가려는 나의 노력이 부작용을 낳아 본의 아니게 나대다가 C+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사실 예고를 나왔단 사실도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뭐 그렇게 특별한 벼슬이라고 신경을 쓰나 싶겠지만 적어도 2016년 홍대 입시에서는 예고라는 것이 유효했었다. 특정 예고에서는 홍대는 면접에 교복만 입고가도 합격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말 자체는 사실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내 내신성적으로 합격했다는 것은 예고 프리미엄이 작용했다는 이야기다. (친구의 말을 인용하자면 적폐 그 자체다)

숨은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의 대부분의 친구들은 예고출신이지만 그건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홍대와 서교동부터 망원동까지는 정말로 자유의 땅 그 자체였고 탈색머리와 처음 가입한 트위터까지 곁들이니 완벽한 미대생 3단 콤보가 완성되며 나는 자유를 만끽했다. 


사람이 많으니 졸업심사도 없고 마라톤같은 크리틱도 없고 내 존재감은 더 없고.. 본의 아니게 예술교육의 자율성을 보장한 학교에 다니게 된 김모씨의 딸 모진하양


크리틱이 가장 짧은 학교. 졸업심사가 없는 학교. 많은 교수님이 내가 뭐 그렸는지 별 관심도 없고 매주 까먹는 학교. 이것들은 사람이 적으면 절대 성립할 수 없는 수식어이다. 타 대학에 간 친구들과 얘기를 하면 할수록 "어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학교를 다니며 크리틱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편의상 크리틱이라고 명명한 이 점검시간은 내가 홍대를 사랑한 이유 중 하나이다. 3시간이었던 수업이 크리틱때문에 5시간이 되었다면 나는 5년은 더 늙었을 것이다. 작업 얘기하다가 갑자기 미술계에 대한 얘기로 확장되고, 사회문제에 예술가가 개입해야 하는가?같은 근원적인 문제까지 나오면 정말 곤란하다. 홍대 회화과 교수님들의 전반적인 칼퇴욕구와 수업종료 의식은 여러모로 활용하기 좋은 수업시간을 제공해주었다. 크리틱 시간에 난 항상 뭔가 중요한 깨달음을 적는 척 낙서를 정말 많이 했다. 발표 중인 작업을 유심히 보며 혹시라도 교수님이 말을 시킬 경우 할 대답을 10초 정도 구상한 다음 집에 가서 뭐할지, 끝나고 뭐 먹을지에 대한 고찰을 정말 열심히 했다. 크리틱 중에 한 낙서들과 구상한 소설 스토리라인들 중에서 대작들도 많이 나왔다. 


미술 글쓰기에 쓸 단어들이 매우 많은 노다지같은 낙서. 정말 얻은 것이 많은 수업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크리틱이 풍부하게 진행되어야 좋은 미대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독서토론을 해도 주입식 교육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특성상 이 땅에서 아직까지 긴 크리틱은 그렇게 탁월한 교육방법이 아니다. (차라리 뒤에서 "걔 작업 너무 구리더라"라고 뒷담을 큰 소리로 해주는 게 더 피가 되고 살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1,2학년 교육과정은 실기시험을 보지 않는 특성상 기초를 다지는 시간인데 부정적으로 본다면 학비낭비의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론 특별한 작가적 기질을 펼치지 않아도 되어 편안했다. 1학년의 나는 여전히 너무 고등학생의 상태였어서 자료를 킨코스에서 뽑아간 것에 조차 불안감을 느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킨코스의 출력 상태를 보고 디테일이 다 뭉개졌고 색감도 너무 이상하다고 하여 정말 온갖 군데에서 인화를 해 간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교란 곳은 자료검사를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킨코스의 고급 A4용지가 최상일 지경이었다. 이외에도 야외스케치에 아무도 들고 가지 않은 이젤을 들고간 아찔한 기억도 있지만 그후로는 완연한 홍대생이 되어 폰에 자료를 넣어갔고 더 나아가 머리에 넣어갔다. 


 


나는 교수님 배정에 천운이 따랐다. 그닥 평이 좋지 않은 모 교수님은 4학년까지 성별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마주친 조차 없었고 솔직히 그림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A+를 주는 교수님도 만났다. 그리고 


당시 스노우라는 셀카어플에 미쳐있었던 내가 잘 나올때까지 찍은 셀카들을 중첩해서 그린 수채화다.


이런 걸 스케치북에 띡하고 그려가도 "너 미쳤니?"라고 묻지 않는 교수님들과 함께했다. 이건 홍대 자체의 특성이라기 보다 나의 가는 길목에 부모님의 기도가 닿았기 때문이라 짐작해본다. 




두번째로 스케일이 컸다. 4년 다녀보니 홍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많이 그리고 크게 그리는 걸 자연스럽게 권장하는 학교다. 비록 위의 사진과 같이 내 2학년 1학기 실기실 자리는 내가 서 있으면 끝날 정도로 좁았지만 그 좁은 자리에서 나오는 그림만큼은 적지 않았다고 장담한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2019년 나의 졸전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두가지 공간 외에도 신축강당이란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일 크게 키우는 건 질색하는 나도 좁아터진 곳에서 빽빽하게 전시하는 것보다 공간을 키우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더 넓고 높은 공간을 쓰겠다고 자진해서 나갔고 돈은 더 들었을지 언정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학부생이 졸업전시한다고 멀리서 찾아와 주는 사람들이 고작 몇 미터도 안되는 내 작업을 본다는 것은 끔찍했기 때문이다. 

유비쿼터스 IoT 사이버 시대에 스케일이 큰 작업 그것도 회화 작업을 한다는 것은 귀중한 자산이다. 어쩌면 2050년에는 미대에 가면 나무 아깝게 100호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대.. 하는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소중하다. 재료가 무엇이 되었든 배정받은 공간을 책임지는 경험은 자기소개서에 창의적 경험으로 넣어도 손색이 없다. 


가을에 잠시 가르쳤던 미술학원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서울대 가야지..라고 꼰대같은 투로 말하면서도 꿈 한번 펼쳐볼려면 홍대 가야지..라고 더 꼰대같은 말투로 말했던 이유이다. 내가 생각해도 "니들은 소주같은 거 마시지 마라"급으로 소름끼치지만 진심은 전해졌으리라 믿는다. 


물론 스케일이 컸던만큼 다양하기도 했다. 비율상 회화가 많은 느낌을 자아낼 뿐이지 회화를 해도 회화설치를 하려는 노력들이 전시 자체를 매우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현상을 보고 전시 컨셉을 구상할 당시 피로회복의 골든타임을 포기한 채 새벽 2시 쯤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웃기는 짬뽕'을 만들었다. 이 다양한 사람들의 작업을 포괄할 수 있는 한국말로 웃기는 짬뽕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웃기는 짬뽕은 학과장님의 연구실까지 도달해서 그리 나쁘지 않은 반응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컨셉회의 중에 자연스럽게 소멸됐다. (그리고 지금 내 브런치 프로필 사진이 되었다) 


웃기는 짬뽕


마지막으로 이건 여자인 내가 좋았던 부분인데 여자가 활개치기 좋은 학교다. 

이대라는 최고난이도 실기를 통과한 신의 딸들만이 가는 학교를 제외하고는 여자가 다니기에 이렇게 좋은 학교가 없다. 예중예고에서 똑똑하고 쟨 진짜 천재구나, 싶은 여자들을 많이 만났지만 홍대에 와서 만난 여자들은 정말이지 한결같이 나보다 똑똑했다. 총명하고 성실하고 편견없는 여자들이 많은 환경이 얼마나 편하고 아름다운지를 나는 막학기를 종강하고 학교에 가지 않은 이주일 동안 이미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이 세상은 편견덩어리에 무례한 말을 숨쉬듯이 하는구나.. 철저한 개인주의 아래 피씨한 이 홍대의 환경은 몇몇의 한국사회에 절여진 사건들에도 세상이 살아갈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그들이 편견없는 사람들이란 것조차 편견일 수있겠지만 똑똑하고 미술을 하는 여성들은 높은 확률로 편견이 없다. 

온갖 취미생활에도 최적화된 위치를 가졌다. 후회되는 경험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그림 그리다가 상암에 15분만에 달려가 내가 미쳐있었던 남자아이돌의 사전녹화를 간 적이 많다.. 그렇게 보통 찾아가야 하는 문화생활의 요지들이 주변에 포진해있으니 학교를 다니는 내내 편견없고 똑똑한 사람들과 문화생활을 꼬박꼬박한다면 그 자체로 등록금을 내는 보람을 얻을 수 있다. 



 

아시아 최상위 미대 재학생에, 어도비 프로그램 5개를 구사하는 내가?



3학년 1, 2학기에 사용했던 공간들


트위터에서 2020년 밈으로 꼽혔던 "아시아 최상위 대학"밈을 인용해보았다. 

현재 취업준비생인 나는 복수전공 없는 홍대 회화과 졸업장에 과제때문에 야매로 배운 어도비 프로그램 5개만을 들고 학교를 나왔다. 이 문장 자체는 상당히 암울하지만 밈을 가져와 멋드러지게 표현해보았다. 실제로 아시아 최상위 대학에 몇개의 프로그래밍 언어와 몇개국어를 구사한다면 그 분은 이 시대에 적합한 인재이신 것 같다. 비록 내가 그 분처럼 사회에서 원하는 인재상은 아니나 언젠간 저 문장 그대로 말해도 무시받지 않는 예술강국이 살 수 있기를 바래본다. 

결론은, 비생산적인 크리틱은 싫으나 미술이 하고싶고 똑똑한 동시대 여성들과 소통하고 싶은 사람은 홍대를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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