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글쓰기와 입털기라는 궁극의 필살기에 대하여
입시미술도 미술이지만 유행에 따라 정해진 양식이 있다. 심지어 그 양식이 너무 세세해서 때때로 두뇌의 똑똑함이 손재주를 압도한다. 이처럼 미술대학에 오면 많은 분들이 마주하는 큰 산이 있다. 바로 미술 글쓰기이다. 오늘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글 양식인 미술 글쓰기에 대해 글쓰기를 해보고자 한다.
는 쉽게 말해, 미술관에 가면 벽에 붙어 있는 어려운 글이다. 혹은 A4용지에 프린트되어 있는 글이다.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읽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코로나가 있기 전 주말에 한가람 미술관에 가면 그 어렵고 헛소리가 대부분인 글을 읽으라고 그 벽면 앞에 아이들을 세워두는 부모님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정말 진기한 광경이었다. 그 중에는 정작 본인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당연하다 아마 글쓴이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얘들아, 봐봐. 이 사람이 ~~해서 ~~했대" 라고 하시는 걸 보면 나라도 그 교육현장을 쾌적하게 비워드리고 싶어서 서둘러 자리를 떠나게 된다.
다시 말해 미술글쓰기는 작가가 작품에 대해 설명해놓은 글인데, 학예사나 평론가 등 어쨌든 박사학위를 가진 박사님들이 작가와 작품을 평론하고 작가와 대담한 글도 포함되는 것 같다.
**내가 미술글이라고 안 쓰고 미술글쓰기라고 쓰는 이유는 <현대미술 글쓰기>라는 번역체 책 제목이 너무 강력하게 다가와 그렇게 안 쓰면 허전하고 대체가 안되기 때문이다. 번역체를 그만 써야 하는데 나도 미술글쓰기에 완벽하게 전염되어 버린 것이 분명하다.
아마 내가 처음 만난 미술 글쓰기는 제목짓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14살 때 변비에 걸린 사자가 변기에 앉아있고 그 앞에 각종 귀여운 동물들이 화장실 사용을 기다리다가 잠에 든 도자공예 작품을 만들었다. 그 제목은 당시 유행했던 2PM의 '기다리다 지친다'였다. 사실 나의 미술글쓰기 실력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이 '기다리다 지친다'에서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뭔갈 얘기는 할려고 하는 현학적인 미대생같은 인상을 준다. 내가 생각한 미술 글쓰기의 포인트는 이것이다.
미술글쓰기는 양식화에 양식화를 더해 양식 그 자체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워낙 오만방자한 편이긴 하지만 미술 글쓰기의 90%는 헛소리였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의 미술관 관람시간은 대폭 줄었다. 십중팔구 허울 좋은 헛소리라면 내 인생의 효율성을 위해 대부분 지나쳐도 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간혹 감명을 주는 너무나도 완벽한 미술글쓰기를 만나면 정말 열심히 읽고 멋져보이고 이해가 안되는 단어들을 폰 메모장에 적어뒀다. (그런 글은 첫문장에서부터 뭔가 멋있다)
내가 처음 감명받은 글은 리움에서 열린 2014 아트 스펙트럼이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진행되고 있지 않지만 주목해야할 작가들을 조명하고 보는 재미도 놓치지 않은 전시였었다. 국내 미술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은 작가 선정이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도록에 있는 모든 단어와 문장을 2019년까지 참고할 수 있었다. 리움 학예실에서 쓴 글은 그야말로 교과서다. 내가 주로 참고한 것은 문장의 서술어에 대한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를 표현했다, 나타냈다, 의미한다 같이 평범한 서술어말고도 미술은 다양한 것들을 해야한다. 모색하고, 조명하고, 시사하고, 형상화하고, 제시하고 그 외에도 정말 다양한 서술어를 사용해야만 글을 완성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미술 글쓰기가 그렇게 중요한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작업이 10% 진행되었어도 말과 글로 적어도 6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어쨌든 작업물이기 때문에 100%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글은 놀라운 힘을 가진다. 실제로 16살 즈음 아는 친구의 언니가 손이 너무 느려서 30%정도 진행된 작업을 크리틱에 들고가 세치 혀로 A를 받아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때부터 그 힘을 믿기 시작했다. 작업이 구려도 미술계 안에서 존재하는 글이 번듯하면 그런가보다~하게 되는 게 순리다. 제목에서 언급했듯이 글만 잘 써도 작품이 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맞다. 오히려 글을 잘 못 쓰면 작품성이 떨어지는 시대다.
그렇다면 미술 글쓰기는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뜬금없이 시를 쓴다거나 해서 보다 자유롭고 똘끼를 내세우는 글을 써도 되겠지만 정형화된 글에는 헛소리도 있어보이게 하는 형식들이 존재한다. 워낙 문학적인 재능과 노력이 출중해서 글이 술술 써지는 분들께는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그 형식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예시를 위해서 3D그림판으로 3분만에 완성한 그림판 그림을 사용해 미술 글쓰기를 해보고자 한다.
제목은 <사이버 고양이>이다.
첫째로 독자를 상정한다. 평론가들이 될 것인지, 중학생 정도의 교육수준을 수료한 사람이 읽어도 이해가 가게 쓸 것인지, 그냥 아무도 이해 못하게 쓸것인지 말이다.
정했으면 첫문장을 쓴다. 첫문장이 정말 중요하다. 굳이 엄청나게 쓸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담담하고 담백하게 가야한다. 철학자나 미학자를 데려와도 되지만, 굳이 모셔올 필요는 없다.
1. <사이버 고양이>는 강남역 한복판에서 컴활을 공부하던 중 사이버 세계 안에 나만의 작은 고양이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시작되었다.
2. <사이버 고양이>는 고양이로 대변되는 현대인들의 귀여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여준다.
3. 나는 고양이가 주는 초월적인 귀여움과 사이버 세계에서 가지는 고양이의 가치에 대해 탐구해왔다.
정말 일기의 한 부분같고 담담하지 않은가..이런 식으로 담담하게 시작하면 된다.
이제 이게 도대체 뭔지,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사이버고양이>는 어린 아이의 관념 속에 존재할 법한 평면적인 형태의 고양이를 다시 3D로 재현하여 고무장갑 색의 공산품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는 사람들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귀여움에 대한 갈망, 즉 동심으로의 회귀가 박제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박제됨은 살아있지 못하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나는 귀여움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인류의 한계를 사이버 고양이로 표현하여 아이러니한 비극성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제 재료와 소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나는 '그림판'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디지털 재료를 사용하여, 고양이의 털과 온기라는 감각에 대한 정보를 삭제하고 고양이의 구조를 왜곡하였다.
슬슬 헛소리가 되기 시작한다. 이제 여기에 살을 붙이면 된다. 살 붙이는 방법은 다양하다.
0. 과연 ~은 이 사회 안에서 유효한가, 라며 뜬금없이 질문한다(근데 물어보는 게 아니다)
1. 단어 앞에 "~적", "~주의적"을 붙인다(많은 ~~주의들을 알아야 한다)
2. 모든 문장을 비슷한 단어로 바꿔서 설명하는 척 굳이 두 번 써준다
3. 작업의 키워드를 논문 사이트에 검색한 후 아무 철학자 분들 데려와 아무개는 이렇게 말했다. 라고 알려준다
4. 미술사 책을 펴서 선사미술부터 2020년 미술까지 중 특정 사조, 작가와 연관성 찾고 연관성을 부여한다.
등등 이 있다.
이제 이 구간에 들어가면 시간은 이미 새벽이고 눈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이겨내는 사람은 하루만에 스테이트먼트를 완성할 수 있고 이 흐름을 놓치면 일주일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졸업전시 서문을 급하게 수정해야 됐던 날 도저히 갈피를 못 잡겠어서 새벽 2시까지 한 문장 정도 고친 적이 있다. 그렇게 새벽 5시까지 쓰고 7시에 일어나 학교를 가서 발표를 했다. 그 날도 논문 사이트에 열심히 "장소성", "교차성" 등을 검색하며 제발 내 글에 써먹을 수 있는 이론이 나오라고 빌었더랬다. 다행히 미셸 푸코가 주장한 '헤테로토피아'개념을 발견하고 "세상에..이거다"싶어서 바로 가져왔다. 미학 지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는 당연히
"헤테로..?이성애자 천국인가..?이름은 예쁜데.."
했지만 다행히 요즘 써먹기 좋은 개념이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나 2020년 4월 17일 대림미술관에서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라는 구찌와 관련한 전시가 개최되었다. 교수님이 글을 검사하며 '헤테로토피아'라는 단어에 태클을 걸지 않았을 때보다 기뻤다. 그 어느때보다 기뻤다.. 내가 급하게 새벽 5시에 논문 하나 읽고 썼던 개념이 그럴듯해 보였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과 같은 학문기관에서는 교수님따라, 학계의 형식을 따라 가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진짜 똑똑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알게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데, 도통 왜 더 어렵게 쓸려고 노력하는지 학부졸업생의 수준에서는 모르겠다. 아마 내가 돈과 재능이 있고 노력도 하여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미술 글쓰기는 결국 고학력자들의 세계임은 분명하다.
최근 친구의 스테이트먼트를 봐준 적이 있다. 특정 교수님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뜻하는 바가 있는데도 여러번 수정을 거쳤어야 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면 교수님 눈에 괜찮지 않을까를 고민하다가 몇 문장을 써서 보내줬더니 너무 미대생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회사에 가면 급여체(직딩체..?)를 쓰고 잡지에서는 보그체, 지큐체를 쓰듯이 학계에서는 서양권 언어와 일본어의 혼합된 번역체 혹은 예술적 언어를 써야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다만 급여체같은 단어 자체에 약간의 자조가 있듯이 분명 예술계도 고쳐나갈 수 있는 점이 존재한다고 본다. 범죄와 다를 바 없는 행위들을 번지르르한 미술 글쓰기를 통해 예술로 퉁쳐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