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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하 Jan 03. 2021

졸업전시 1년 후

4학년 1학기에 제출한 독후감에 약간의 살을 붙였습니다.  



나는 서양미술사가 아니꼽다. 

 사실 지루하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온 인류의 역사가 그렇다 하지만 이리도 철저히 여성을 배제해온 역사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름이 정확하게 명시된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가의 주류는 남성이었으며 그것에 대해 말을 붙은 평론가의 주류 또한 남성이었으며 심지어 미학을 다룬 철학가의 주류 또한 남성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의 이름은 남성 작가들은 후원한 상속녀, 작가의 헌신적인 아내, 또는 내연녀, 그리고 뮤즈 등이다. 아시아, 그것도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여성인 나는 이러한 제1 세계의 백인 남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어떤 면에서도 그들과 공감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잠시라도 해본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 있다. 김영애 저의 <페로티시즘>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그러한 서양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에로티시즘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하며 지나왔는지에 대해 3가지 파트로 서술한다. 첫 번째 파트는 에로스와 신체로 에로티시즘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매체인 신체에 대해 설명한다. 다음 파트는 에로스와 사회로, 흔히 금기로 칭해지는 에로티시즘의 다양한 표현에 대해 논한다. 마지막 파트는 에로스와 상상력으로 결국 에로티시즘을 관통하는 주제이면서도 창조하고 이를 수용하는 이에게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상상력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한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 에로티시즘을 논하며, 이 책의 제목처럼 ‘페로티시즘’(페미니즘+에로티시즘)의 가능성 또는 필요성에 대해 말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제1 세계에서는 이미 많은 여성작가들이 남성 중심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미술계에 대해 그를 전복하는 의미를 담은 작품을 창작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라쇼비즈의 <파랑이 아니라 빨강> 퍼포먼스가 있다. 이는 1993년에 진행된 퍼포먼스 작업으로 이브 클라인의 <인체 측정학> 퍼포먼스를 그 주체와 대상의 성별을 바꾸어 진행한 것이다. 이브 클라인 블루가 상징적으로 두드러진 <인체 측정학> 퍼포먼스는 양복을 갖춰 입은 작가이 갤러리에서 울려 퍼지는 권위 있는 관현악과 함께, 그리고 그 퍼포먼스를 지켜보는 사람들조차 드레스 코드를 양복으로 맞추어 그 사이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나체의 여성을 철저하게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던아트에서 여성이 어떻게 대상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퍼포먼스이다. 이 작품을 감상할 때 관람자는 여성의 몸이 사물화 되는 것을 느낀다. 전통적으로 종이 혹은 캔버스에 물감을 사용해 그리던 여성의 누드가 심지어 여성의 몸 자체가 ‘도구’가 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여성들은 사회가 정형화된 미의 기준에 부합한 모델들이다. 이것은 대상화와 동시에 사물화 된 여성을 보여주며 그 여성들은 이브 클라인과 동일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모를 만큼 인격체로서의 의미를 상실된다. 나는 이것을 문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브 클라인이란 작가는 언제든지 여성의 몸을 사물화 하여 작품을 제작한 자유가 있으며 이는 현대미술에 큰 충격을 준 의미 있는 퍼포먼스다. 하지만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분명히 여성의 인격을 기만하는 면이 존재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작품들을 대할 때, 남성 작가들에 의해 수백 년 간 이어진 남성의 성적 판타지 재생산은 그들의 자유이긴 하나 그 역사적 중복성은 비판받아야, 사실은 무관심으로 대응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할 것이다. 


한글로 검색하면 이미지가 나오지 않는다. 작가도 제목도..


 이를 반대로 뒤엎은 작업인 <파랑이 아니라 빨강>은 여성인 라쇼비즈가 정장을 입고 나체의 남성을 사용하여 이브 클라인 블루와는 보색 관계에 있는 빨강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기록한 사진을 보았을 때 성별은 뒤바뀌었으나, 그 권력관계는 어쩐지 뒤바뀌지 않은 것 같다는 감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입은 검은 원피스 정장은 여성복이 주는 그 연약한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퍼포머가 된 남성은 어딘지 모르게 나체의 잭슨 폴록 마냥 정열적이고 힘이 넘쳐 보인다. 


나는 내가 이러한 감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아마 이 안타까운 감정은 첫째로, 나의 현실 상황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나는 전형적인 조기교육의 수혜자로 4학년 때부터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미술학원을 다녔고 학창 시절을 모두 예술계 학교에서 보냈다. 아직도 미술을 시작할 때 미술학원의 풍경이 잊히지 않는데, 나를 포함한 초등학생 20명 중에 남성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중고등학교 반 또한 2명으로 별 반 다르지 않았고 해가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장 괴리감을 느낀 것은 막상 상급학교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남성 교육자의 비율은 높아지고 현장학습이라 칭한 미술관, 갤러리에서 또한 남성 작가의 현저히 높은 위치와 수적 비율을 보았을 때였다. 나와 함께 시작한 수많은 여성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분야에서 성비가 같은 수는 없으나 시작할 때는 극도로 비율이 높은 여초로 시작하여 남초로 끝난다는 것이 의아했다. 이처럼 항상 권력의 자리에는 여성의 부재가 만연했고 이는 나의 전반적인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둘째로 이것은 그동안 세뇌되듯이 학습되어온 남성 중심의 미술사의 결과이다. 미술에서 에로티시즘이란 정말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각을 자극하며 그것이 설사 이성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하여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제이다. 하지만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모든 에로틱한 감정은 남성이 주체가 되고 여성이 그 객체가 된다는 점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작품을 마주하였을 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며 때로는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각각 어필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의 구조가 같지 않음을 밝힌다. 저자는, 남성들에게 있어 섹스가 성기 끝에서 벌어지는 유희로 그치는 것인 데 반해, 여성들에게 섹스는 나의 몸 안으로 다른 어떤 것이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여성들이 느끼는 충격의 강도는 훨씬 강렬하며 그것은 신체를 통해 겪어야 하는 변화, 그리고 삶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파랑이 아니라 빨강>은 우리가 익히 접해온 에로티시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으나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권력관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기에, 나에게는 이 작품이 에로티시즘의 맥락에서 읽히기보다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나의 졸업전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나는 2019년 나의 졸업전시에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이 제거된 여성을 그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대학을 다녔던 3년간 작품을 제작하며 거친 과정들의 결과물인데, 처음에는 나 자신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페미니즘 적 성향을 가진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사회적인 의복과 머리 모양과 행동양식 등 사회적인 모습을 갖춘 내가 그리는 본체의 나를 그리고자 하는 마음을 키웠다. 하지만 곧 내가 택한 포즈와 그려내는 방식이 나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너무 많은 유사한 선례들이 존재하고 그 도발적인 분위기를 따라 한다 해서 작품에 그런 뉘앙스만 남길뿐이지 정작 의미를 사라졌던 것이다. 


3학년 때 그렸던 100호 그림, 당시 좋아하던 망사스타킹과 레이스 그리고 흘러내리는 듯한 색채. 당연히 모델은 나 자신이었다.


 


 같이 진행한 ‘성화’를 그리는 작업에서는 가장 성스럽고 고귀해야 하는 성녀와 성모의 모습에서 발견한 에로티시즘을 극대화하는 표현을 했었는데, 이는 책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었다. 베르니니의 <테레사의 환희>는 성 테레사 수녀의 종교적 환영을 형상화한 것인데, 그 표정이 엑스터시의 장면만을 모아놓은 달리의 <엑스터시의 현상>의 모습들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종교적 작품에조차 성적인 맥락으로 읽을만한 상상력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슷했지만 나의 작업에서는 기독교의 생산물들이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를 거치면서 키치 해지거나, 각 지방의 민속문화와 결합되면서 지나치게 화려 해지는 등 독특한 형상을 하게 되거나 하는 경우를 포착하여 그 모순을 보여주는 작업을 진행했다. 




성화의 요소들을 차용한 드로잉


 그 두 작업은 결합되면서 더 발전되는 양상을 띄게 되었는데, 이는 페미니즘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중요한 테스트는 남성 위주의 선례들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나에게 여성의 신체라는 것은 곧 현실을 마주해야 되는 싸움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성적으로 대상화된 맥락 속에서 표현하니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구조를 뒤바꾸어 남성을 작품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여성이 만드는 여성 서사가 더 많아져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지 ‘여성의 몸은 아름답고 예술의 대상으로 그려져야 한다’를 깨는 것이 아닌, 여성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고통을 고스란히 그 몸 위에 그려내고 싶었다.



졸업전시에 냈던 회화 중 일부 


성적인 함의가 지워진 여성은 비로소 성화 속의 주체가 되며 이는 그 자체로 체계 전복적이다. 그리하여 성녀 혹은 창녀로의 구분을 거부한 하나의 온전한 여성으로서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전달한다. 기존 성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현실적인 고통과 무기력함, 우울 혹은 강인함 등이 만화적인 드로잉 기법을 통해 나타나면서, 관람자는 여성을 성과 속의 틀에서 벗어난 주체로서의 아이돌을 맞이한다. 

-작가 노트 中


아무리 봐도 너무나 미술 글쓰기 같지만 이보다 명확하게 쓰기에는 힘에 부쳐 내 작가노트의 일부를 인용했다. 이 그림을 그리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약 4년간 고민해온 '나는 미술 하는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5% 정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작품을 공유할 수 없어 아쉽지만 이 전의 회화보다 훨씬 똑 떨어지는 형식이다. 3학년 때의 나는 망사스타킹과 구두를 신은 자화상을 발표하기 위해 망사스타킹과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갈 정도로 자신에게 취해있었고 약간은 몽롱하고 나사 빠진 미술 하는 여자로 보이길 바랬다. 기법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말하는 야한 색채와 야한 기법들로 (미술계가 그렇게 좋아하는) 체액의 느낌이 나길 바랬다. 위의 그림을 시작하면서는 애써 야하게 그리지 말자, 나에게 도취되지 말자는 게 첫걸음이었다. 우선 그리는 사람 자체가 자신이 취한 콘셉트에서 빠져나와야 내가 느낀 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말한 5%의 해답은 자연스럽게 내 앞에 놓였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휘발유 같은 존재였던 분노, 절망 그리고 의무적인 성취감들보다 그저 존재하기, 계속 나아가기, 그리고 정기적으로 쉬고 웃기 등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의 힐링 서적 같은 평온함이 나에게 해답으로 찾아왔다. 워낙 분노할 것이 많은 세상이고 미술계라 어쩔 수 없이 분노하였고 앞으로도 하겠지만, 분노 자체가 나의 본질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기적인 학생이었어서 그것이 관람자에게 전해졌을지는 사실 고민하지 않았다. 춥디 추웠던 졸업전시가 거진 1년 지난 지금은 돌아보며 그것이 조금은 전해졌길. 서양미술사가 다 헛소리라는 나의 막되어먹은 생각에 반해 내 그림은 편히 즐길 수 있는 무료 배포 엽서 같은 회화가 되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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