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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하 Jan 13. 2021

미대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봤습니다.

미대 졸업 후 취준 1년, 그리고 취업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며 먹고 살고 있을까.

아마 3학년 쯤 되면 가장 크게 드는 의문이다. 다들 굶고 있지는 않겠지, 하던 중 옥인 콜렉티브의 일원이었던 부부가 들려진 바로는.. 생활고로 사망하며 큰 충격을 안겼다. 굶고 살지는 않겠지가 아니라 정말 일을 안하면 굶어 죽게 생긴 시대는 달과 6펜스 시절 얘기가 아니라 2019년에도 유효한 얘기였던 것이다.


나는 일단 학부를 졸업하고 뭐든 생각하자, 주의였다.

"학부 전공이 뭐가 중요해~다들 석사는 기본인 시댄데~" (학부 전공은 중요했다)

"복수전공 안하고 편하게 그림 그리면서 하고 싶은 걸 찾아볼래~" (안 찾았고 복전도 안했다)

그렇게 4년이 훌쩍 흐르고 나는 복수전공 하나 없는 순수 회화인으로 이 사회에 나오게 되었다. 물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영상 프로그램 특강도 듣고, 토플, 토익, 오픽도 미리 봤다. 미대  건물 벽에 붙어있던 전단지 속 강의를 듣고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그런데 당시 난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고 막연하게

유학갈까?

취업할까?

대학원갈까?

그냥 1년 놀까?

이런 재미난 상상들을 하던 학부생이었다.


졸업전시가 끝나고 가족여행 한번 다녀오니 2020년이었다. 일단 인터넷에 취업. 취준. 이렇게 쳐보니 독취사라는 네이버 카페가 유명한 것 같아 가입을 하고 좀 둘러봤다. 컴퓨터 자격증이 필요한 것 같아 바로 sbs컴퓨터아트학원에 모스/컴활 자격증을 따러 갔다. 나름 시간을 잘 사용해보겠다고 운전연습도 하며 1달 학원을 다닌 결과,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게 시작됐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랬듯 아무생각 없었다. 이대로 지나가겠지 하며 MOS(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스페셜리스트) 시험을 봤는데 한 과목에서 떨어졌다. 시험비도 사설기관에서 하는 거라 너무 비쌌다. 눈물이 났다. 결국 3월 말이 되어서야 나는 MOS MASTER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컴활 1급이 마의 시험이란 것도 모르고 그냥 시험을 신청했다. 필기는 거뜬하게 합격했으나 실기에서 패배의 쓴 맛을 보기 시작했다. 컴활은 무려 7월이 되어서야 2급으로 기대치를 낮추고 합격하게 된다..


그래도 최소한의 무언가는 생긴 것 같아 이력서를 넣어보기 시작했다. 갓 졸업한 파릇파릇한 24세 미대생을 써보세요! 하며 정말 아무곳이나 넣었다.

 

정말 아무거나 넣은 흔적들..복붙한 곳들은 따로 저장하지 않았다.


대기업..중소기업..중견기업..1000대기업..

당시에는 공기업이란 꿈도 품고 있었기에 이곳저곳 넣어봤으나 당연히 한국사 자격증도 없던 나는 떨어졌다.

대외활동 공모전 수상이력도 0에 수렴하던 나는 대외활동, 인턴 이력서도 넣었다. 대외활동은 내가 하던 뷰티 유튜브**를 필두로 하나 둘 합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화장품과 아이돌에 미쳐있던 시절 열었던 뷰티 유튜브가 있었다.. 차마 아까워서 닫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래봤자 서포터즈이지만 서포터즈조차 없던 백수는 뭔가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 행복했다. 인턴은 서류에서 탈락해도 별로 슬프지 않았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오히려 합격해서 일을 하러 가면 너무 두려울 것 같았다. (훗날 어떻게 될 지도 모르고...) 그 당시 나의 삶은 일어나서 늦은 아침을 먹고, 컴퓨터를 켜서 경제뉴스를 보고, 취업 사이트를 순회하며 오늘 넣을 공고들을 보고 서류 하나 쯤 넣으면 점심이 된다. 좀 쉬다가 마저 서류를 넣다보면 지친다. 이럴 때 공모전, 대외활동 사이트에 들어가 슬로건, 명칭 공모전 하나 슬쩍 넣어주고 서류를 마저 넣은 뒤 네이버 블로그 및 대외활동으로 하고 있는 커뮤니티에 진심이 거의 없는 글들을 쓴다. 저녁에는 유튜브 편집을 하거나 홈트를 했다.


그렇게 수도없는 서류탈락을 맛보던 중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인 삼성에, 그것도 삼성전자에 서류가 합격하게 되었다. 그 어떤 기업도 서류조차 받아주지 않던 나는 삼성이 주는 기회의 관문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3달 가량을 오직 삼성에만 투자했다. 내가 대기업만을 원해서가 아니라, 정말 내 서류를 받아줬던 곳이 그곳밖에 없어서. 다행히 공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런 인적성 고사는 정말 미술과 성질이 같아서 내 끔찍한 한계를 체감하고 그저 열심히 파는 수 밖에 없었다. 이 좌절감은 정말 쓰라리고 끝이 안 보이지만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라면 참 익숙한 감정이라, 얼굴에 온갖 트러블이 나 가며 버틸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디자인을 전공한 나의 사촌이 집에 같이 머물렀는데, 만약 사촌이 같이 있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성격이 나빠졌을 거라고 확신한다. 같이 스쿼트 챌린지도 하고 틱톡도 찍고 스터디 위드 미도 찍었다. 대외활동 중 하나가 인스타에 댄스 챌린지를 올리는 것이었는데, 사촌이 없었다면 댄스 영상을 찍지 못했을 것이고 나는 우수 서포터즈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려움에 동감해줄 수 있는 친구가 바로 옆 방에 있어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안에 그 사촌동생이 있다


인적성도 합격하고, 최종면접 후 3주를 지나 최종탈락을 했다. 그리고 잠시 나는 친구의 영화를 도와줬다. 좀 갑자기?스러울 수 있으나 이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하반기도 상반기가 별반 다를 것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상반기에 유일하게 서류합격했던 회사에서 떨어지고 불안한 마음을 바쁜 일에 돌리니 정말 행복했고 어디가서도 쌓지 못할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영화를 바쁘게 준비하고, 실제로 영화를 찍고, 그러는 와중에 부른 콜밴 기사는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하고.. 내가 물려본 모기 중에 가장 강력한 산모기을 만나고.. 끝이 없을 것 같은 내 취준생활에 미술하는 친구들과 함께한 이 영화 제작 경험은 정말 엽떡 먹는 와중에 계란찜같은 존재였다. 마라샹궈 중의 흰밥이랄까..

이 시기에는 또 나에게 하나의 자리를 만들어준 친구에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코로나를 핑계로 방에만 있었다면 아마 지금도 백수이지 않았을까..


친구 영화 찍을 때

영화를 다 찍고 체력를 회복하고 나니 이미 하반기 GSAT삼성직무검사가 다가왔다. 구구절절 말하자면 촬영일정 당시가 월경 직전이었는데 평소보다 밥을 너무 먹지 않아 몸이 정말 이상해졌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여성분들이 월경 전후에 건강하게 많이 드시기를 당부한다. 게다가 하필 예전에 알바하던 미술학원에서 연락이 와서 급하게 대타강사를 뛰게 되었다. 그것도 엄청 많은 양의 대타수업을.. 애초에 30분 컷으로 잘리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아침에 가서 학생들에게 문제주고 "자 얘들아 시작~"하고 30분동안 모의고사를 봤다. 30분 땡하면 웬만큼 구상이나 스케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코멘트하고, 예감이 안 좋은 날은 15분 끊고 코멘트해주고 또 모의고사를 풀었다. 학생들은 운이 좋게도 정말 착하고 성실한 학생들이어서 내가 푸는 수학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나에게 많은 응원을 해줬다. 사실 나는 미술학원 학생들에게 정을 정말 많이 주는 편인데, 이번에도 정 안 주기에 실패하여 잠시 "이렇게 미술하면서 살까.."하는 유혹이 찾아왔다. 중학생 때의 고민들은 아직도 공감해줄 수 있고 조언해줄 수 있는 게 너무나도 많아서 마음이 흔들렸지만 얘들아 너희는 예고를 가고, 나는 취업을 할게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공부시간을 어거지로 끼워가며 내 인적성 시험과 동시에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의 입시도 끝이 났다.

혼수상태맛 그 자체인 예고입시..(미술학원 냉장고에 붙어있던 팜플렛)

아무튼.. 상반기에는 정말 될지도 몰라,라는 희망도 있었지만 왠지 하반기에는 희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떨어졌다고 가정을 하고 모든 계획을 세웠다. 그 감정과 결정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확인사살은 아빠가 해줬다. 가족에게 내 현실적인 한계를 그것도 취업에 도전한지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듣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것저것 정말 열심히 하게 됐다. 팀으로 해야하는 공모전은 현실적으로 당장 꾸리기가 어려우니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로라도 공모전에 출품했다. 사실 1월부터 매달 5건 이상의 공모전(슬로건 공모전같이 정말 시간 안 드는 공모전부터 컨텐츠 만드는 공모전까지 다..) 을 냈지만 하나도 통과하지 못했었다. 하루에 공모전만 2건씩 넣던 때도 있었다. 어떻게 하나를 안되지?하던 찰나에 6월 대한민국 환경 사랑공모전..?과 서울 건축 문화제에서 주최한 공모전 1차가 합격했고 전자는 최종에서 탈락했지만 건축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수상하게 되었다.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취업하는 사람들을 위한 오픈채팅방도 개설했다. 학교 에브리타임에 다시 쿰척대며 들어가서 넌지시 미대 졸업하시고 비예술 분야로 취업하시는 분 계신가요..? 라고 하니 숨어있던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학교 커뮤니티 뿐 아니라 취업카페 등에서 몇몇 사람을 더 모집하여 대략 20명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역시도 내가 내 일정을 전하고 여기에 합격했는데 여긴 어떤 것 같다 정도의 얘기만 했는데도 같이 뛰고 있다는 그 인지 자체가 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옆에서 이걸 왜 얘기해줘?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냥 나는 나 말고도 나와 같은 미술하는 여자들이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그 자체가 나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동기부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최종면접을 보고 왔고 그 사이 처음으로 내 서류를 받아준 또 다른 기업이 나타났다. GS리테일과 GS SHOP을 시작으로 마켓컬리, 스타비전(오렌즈), YTN 방송경영(뜬금없다..) 등에 합격했다. 상반기와 달라진 점은 갓 하반기라는 것과 내 공모전 수상이력 하나, 조금 더 쌓인 대외활동(거창한 것도 아닌 각종 서포터즈..)였는데 서류가 합격하니 신기했다. 아마 하반기이기도 했고 나의 이력서도 조금 더 쌓였고 두번의 삼성 면접을 거치며 자소서도 호되게 다듬어져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결국 지금에 와선 나머지 모든 회사 면접에서 탈락한 것을 확인했지만 내 서류가 뽑힐 수 있구나를 확인하고 내 시각도 조금 더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 서류가 될 법한 곳들을 생각했고 평소 내가 관심가졌던 물품의 제조사나 판매원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많은 나의 관심분야 속 회사들이 채용공고를 걸고 있었고 많은 부분 경력직 채용이었지만 신입 채용도 찾아볼수록 많이 있었다. 사실 정말 취준 초반에 해야할 일이었는데 3~4월의 나는 그렇게 시야가 넓지 못했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니는 편도 아닌데 코로나까지 터졌으니 정말 혼자만의 취준을 했고 정보도 없었다. 11월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공고들이 넘쳐났다. 순간 그동안 시간낭비했나 싶어 화도 났지만 그것보다는 이 사실을 세상에 전하고 싶어 오픈 채팅방에도 올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하고 다녔다.. (이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


사실 삼성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상반기에는 심장이 계속 빨리 뛰어서 아주 곤란했고, 하반기에는 매일 긴장되는 꿈을 꾸며 약간의 심장떨림을 동반했다. 하지만 하반기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상반기의 실패에서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내 스스로 찾게 된 것이다. 심장을 계속 빠르게 뛰고는 있었고 얼굴이 자꾸 뜨거워져 코로나 걸린 거 아닌지 불안하게 되었지만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서류는 계속 제출했다. 항상 탈락했던 게임업계나 카카오 네이버 류의 회사는 기대없이 넣고, 내가 가장 연관성있지만 예술계열은 아닌 뷰티, 패션(슬프지만 이것밖에 없었다..) 아니면 영어를 내세워 글로벌 어째저째로 서류를 냈다.

사실 화장품, 뷰티 분야에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호구 잡혀서 돈을 쏟아부은 분야였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망했으면 했던 산업이었다. 내가 20대 초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내가 그랬던 것 같이 화장품을 마케팅으로 팔아재끼면 사실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뷰티 유튜브말고는 한 게 없던 내 대학 4년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첫 커리어를 뷰티업계로 선정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었다. 인과응보다. 그렇게 나는 3번의 화상면접과 ytn 필기고사를 치르던 와중에 내가 지금 합격한 뷰티 업계의 회사에 면접을 가게 되었고, 그 다음날 합격 통보를 받았다. 결국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시간 쏟았던 분야로, 뭐라도 벌려놨던 분야로 취업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합격한 날 찍었던 사진. 저도 더는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합격 전화가 왔을 때 하필 친구들과 같이 집에 있었고 집에 가족은 없었다. 그 전에 회사 간 우선순위를 정해두긴 했지만 아직 다른 회사는 최종면접을 보기도 전이었고, 이렇게 빨리 결과가 나올 줄 몰라 약간 얼떨결에 다니겠다고 말한 감이 있다. 어쩌다보니 정말 내 스스로의 선택이 된 것이다.. 인생에서 사실 내 스스로 선택했다 할만한 게 없었다. 복수전공 안하고 아이돌 좋아한 거? 화실 알바에 목매다싶이 한 거? 둘 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미쳐있었던 사유로 벌어진 일들이라 그렇게 '선택'이라 명명하고 싶지 않다. 굳이 명명하자면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실수에 가깝다. 조금 더 중대한 결정들은 내가 선택한다기엔 너무 불안한 자아가 내뱉은 말들로 확정이 되었고 30분 지나 내 자신을 의심하기 일쑤였다. 이번에는 내가 미술을 직업으로서 가지지 않기를 결정하고 1년간 이리저리 부딪혀본 끝에 얻어낸 '선택'이라 의심보단 설레임이 더 컸다.


취업준비 기간 동안 제일 우려한 것이 있다면 '인생에 실패라고는 겪어보지 않은 애가 그동안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부닥치며 처음 실패라는 걸 느끼겠지','그냥 안되면 그 정도 자리에 만족해'하는 패배주의적 시선이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진다기 보다는 주변에서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볼까 너무 싫어서 두려웠다. 사실 아무도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나는 예중입시를 할 때부터 그런 시선들을 상정해놓고 피해망상을 혼자서 느끼곤 했다. 아마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유발식 교육이 나에게 직격타로 들어온 모양이다.. 그 세월을 뒤로하고도 2020년이 두려움을 많이 느낀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내 입장도 더 단단하게 세워졌다. 나는 그냥 내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고 우울감 없이 맑은 정신인 김진하로 온전해지고 싶다.



지금은 취준의 끝이나 '취뽀'라기 보다는 나에겐 이제야 시작한 느낌이다. 일에 대해선 아직 출근 3주차라 하나도 모르지만 반대로 심적으로는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다. 앞으로도 계속 취업준비를 할 것이고 새로운 사회에 들어온만큼 날 더 발전시켜서 더 큰 풀(pool)에 내던져보고 싶다. 그것이 꼭 커리어에 있어서는 아니다. 인격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이번 과정이 그랬듯이 끊임없이 나를 도전시켜보고 싶다. 그리고 나와 같은 마음인 여자들에게도 응원을 전한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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