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정의 추억 feat. 판초는 40솔

알파카는 얼마였더라

by 루나

고산병과 함께 했던 쿠스코에서의 첫 날이 저물었다.


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제 예약해둔 마추픽추 1박2일 투어길에 나섰다. 그새 조금은 적응이 되었는지 다들 표정도 움직임도 한결 나았다.


우리가 마추픽추 1박2일 투어를 예약한 여행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잘 알려져있는 파비앙 여행사였다. 무조건 유명하다고 덜컥 예약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후기를 보니 괜찮아보였다. 다만, 페루의 물가 대비 비용이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기에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당시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효율이었다. 시간이라는 아주 제한적인 자원을 세이브하기 위해 평소같았으면 좀 더 조사하거나 비교했을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혹은 비용을 더 투입했다.


1박2일 마추픽추 여행의 첫날은 마추픽추로 향하며 다른 여행지에 들르는 일정이 대부분이다. 드라이버가 친체로, 살리네라스, 모라이, 우루밤바 등의 마을을 구경시켜주고 오얀따이땀보라는 마을에 내려주면 그 때부터는 우리끼리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가 있는 마을로 이동하여 예약된 숙소에 묵는다. 다음날 마추픽추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기 전에 가이드와 만나 설명을 들으며 마추픽추 구석구석을 돌아본 후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쿠스코로 되돌아가는 기차에 오르면 이 투어가 마무리된다.



드라이버가 내려주는 마을들은 확실히 방문객들에게 페루 전통 기념품을 파는 것을 주요 업으로 삼고 있는 듯 했다. 특히 많이 판매하는 제품은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판쵸와 알파카 인형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미 판쵸를 살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유심히 판쵸를 구경했지만, 가격표가 붙어있는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나 '흥정'을 해야한다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음에 드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처음에 들어간 가게에서 그냥 나오고 들어간 다음 가게에서도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다. 다들 가격만 물어볼 뿐 선뜻 사야할 지 말아야할 지 결정을 하지 못해 그냥 맴돌기만 했고, 그렇게 점점 시간이 흐르자 가장 성격이 급한 내가 나섰다. 얼마인지 물으니 주인은 계산기를 두드려 130이라는 숫자를 보여주었다. 페루의 화폐 단위는 '솔'이었는데 1솔에 340-350원 정도였지만 그냥 편하게 계산하려고 대충 400원이라고 생각하며 다녔다. 아니, 130솔이라니, 너무 비쌌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할인해달라는 의미로 엄근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계산기의 숫자는 내려갔고, 주인은 선심 쓴다는 듯이 100이라는 숫자를 찍었다. 나는 오케이, 하고 당당하게 붉은 빛의 판쵸를 둘렀다.


윤회장과 임사원, 탁인턴은 오오- 하며 나의 첫구매를 축하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여전히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만 시간 끌고 빨리 사라고 재촉했다. 빨리 사야 사진 찍고 둘러볼 시간이 여유로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들어간 가게에서 윤회장은 80솔에 판쵸를 샀다. 계산기의 숫자가 내려가자 나를 뺀 모두가 환호했다. 가장 마지막에 판쵸를 구입한 탁인턴은 40솔에 샀다. 이제 탁인턴 빼고 모두 웃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두 '쟤보단 낫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호갱이라 놀렸고, 나는 반박의 여지없이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판쵸는 40솔이다.

40솔.

흡.


내가 호갱이라니.


그래서 그 뒤로 구매한 알파카 인형은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했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판쵸가격만큼 뚜렷하게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엄청난 호갱이 되지는 않았다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보송보송 털찐 알파카 인형들은 페루 특유의 화려한 모자를 쓰고 미친 귀여움을 뽐냈고, 비슷해보이지만 털 색깔이나 표정, 장식품 등이 다 미묘하게 달라 하나만 고르기가 정말 어려웠다.



엄청난 고민 끝에 나의 픽은 이 아이였다. 그냥 새하얀 알파카보다 유니크하면서도 질리지 않을 듯한 모자의 컬러감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알파카들에 비해 조금 큰 눈과 그 위로 튀어나온 귀가 킬링포인트였다. 그래, 좀 호갱이 됐으면 어떠냐. 알파카가 이렇게 귀여운데.



1박2일 마추픽추 투어 사진을 보면 알파카 인형이 상당히 눈길을 끈다. 사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평범할 수 있었던(이라고 표현하기에 페루의 자연은 너무 어마어마하긴 하지만) 사진들에 생기 한 스푼, 귀여움 한 스푼을 불어넣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판쵸도, 알파카 인형도, 좋은 소비였다.

판쵸는 아니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