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교육대학원 계절학기 수업 정리 (feat. 세서미 스트리트)
폭풍같이 휘몰아치던 2주간의 계절학기가 드디어 끝이 났다. 봄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결정해야 할 것들, 처리해야 할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들고 있지만, "아이들을 위한 비정형 학습 (Informal Learning for Children) (이하 비정형 학습)"은 많이 기대했던 것 보다도 더 인상적이었기에 오래오래 기억해두고 싶어 기록을 남긴다. 이번 포스팅은 수업 운영 방식 위주로 정리하고, 수업 내용 정리는 다음 포스팅부터.
가을학기와 겨울학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수업들, 더 구체적으로 기술혁신교육 프로그램 (Technology, Innovation, and Education, 이하 TIE) 수업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는다:
수강신청과 동시에 수업 과정이 시작된다.
오늘 배운 것은 오늘 바로 활용한다.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이 곧 과제의 열쇠가 된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만큼, 나와 다른 관점을 마주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1. 수강신청과 동시에 수업 과정이 시작된다.
비정형 학습 수업은 교육대학원 내에서 굉장히 유명하고, 그만큼 인기가 높은 수업이다. 수업 내용도 신박하지만, 무엇보다 세서미 스트리트 (Sesame Street), 내 친구 아서 (Arthur), WGBH, Fablevision 등 내로라하는 미디어 기업들의 경영진 및 분야 전문가들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학생들의 프로젝트 결과물을 그들 앞에서 발표하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다. 일반적으로 12주로 구성되는 한 학기 내내 진행되는 수업 하나는 4학점인데, 겨울 계절학기로 진행되는 고작 2주간의 이 수업의 학점 역시 4학점이다. 지난 2주가 얼마나 폭풍 같았는지 말해준다. 일반 학기 수업들은 일주일에 8-10시간 정도의 수업 외 시간을 과제나 프로젝트에 할애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니 계절학기 수업은 하루에 8-10시간 정도를 수업 준비와 프로젝트 진행에 쏟아야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건 아니지만 나와 같이 노력을 해야지만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 시간을 투자해야 다음 수업시간에 '나는 누구, 여긴 어디'와 같은 멘털붕괴 사태를 겨우 면할 수 있다.
처음 강의 계획서를 읽다가 주말에 해야 하는 과제들까지 꽉꽉 채워져 있는 시간표를 보고 아연해졌다. '워라밸'이라는 개념이 미국 사회를 대표하는 콘셉트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주말까지 반납하라니 슬쩍 겁이 났다. 그러나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은 공부할 때도 적용된다고 믿는 나는 이미 정신 차려보니 수강신청 완료. 며칠 후 수업과 병행할 프로젝트 팀을 구성해야 하니 설문에 참여해달라는 이메일이 왔다. 설문 내용은 네 가지 큰 주제들 (1. 아이들의 건강과 체력 향상, 2. 시민 참여 촉진, 3. 디지털 리터러시, 4. 현명한 소비습관 형성) 중 나의 관심 분야가 무엇인지, 배경 지식과 경험, 프로젝트 진행 시 내가 자신 있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글쓰기, 타깃 연구, 프로젝트 관리 전반, 앞서 언급한 큰 주제들에 대한 전문 지식, 인터뷰, 교육 상품 개발 등),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들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질문들이 주를 이루었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나에게 해당되는 답을 클릭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수업 프로젝트에서 내가 기여해야 할 부분과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깨닫게 된다. 학교 측에서는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긍정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학생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준다. 그렇게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주듯 매일 열띤 토론과 협업을 벌여야 하는 애증의 팀이 꾸려지는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연이어 도착한 이메일에는 "수업 전에 읽어볼 만한 자료들을 업데이트해두었으니 개강 전까지 최대한 많이 읽고 올 것. 참고로 개강 이후에는 프로젝트 때문에 바쁠 것이므로 논문이나 책 읽고 있을 시간은 많이 없을 것"이라고 쓰여있다. 첨부되어 있는 링크를 클릭했더니 자료 한 번 방대하다. 바로 잔머리가 돌아간다. 첫 번째 든 생각은 '워.. 지금부터 눈떠있는 시간 내내 읽어도 전부 다 읽지는 못하겠구먼'. 두 번째로 든 생각은 '그래도 팀원들한테 민폐 안 끼칠 정도는 읽어가야지.' 온몸에 압박붕대를 감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2. 오늘 배운 것은 오늘 바로 활용한다.
내가 경험한 수업들은 대부분 내가 소속되어 있는 TIE 프로그램 수업들로, 개별 또는 그룹 캡스톤 프로젝트와 병행된다. 수업시간에는 예습해온 자료들에 대해 토론을 하고, 수업이 끝나면 프로젝트 팀원들끼리 따로 모여 그날 배운 수업 내용을 우리의 프로젝트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지 논의한다. 그 말인즉슨, 수업시간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프로젝트에 써먹을만한 내용을 건질 수 있다. 수업시간과 팀 미팅이 끝나고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다음 수업과 팀 미팅 준비를 위해 자료를 찾고, 읽고, 정리하고, 각자 맡은 프로젝트 업무를 처리 및 공유해야 한다. 2주간의 과정 중간에 세 번의 중간 프로포절을 제출해야 한다. 수업이 끝나는 시점에 미디어 기업들의 경영진 및 분야 전문가들 앞에서 프로젝트 결과물을 발표하고, 그날 받은 피드백을 기반으로 수정한 최종 프로포절을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수업 전
수업 전에는 교수진이 업로드해둔 영상들을 보고, 논문들을 읽으면서 수업시간에 질문할 내용을 준비한다. 영상과 논문들은 주로 비정형 학습 기회와 니즈를 평가하는 방법, 미디어 기반의 teaching과 learning 관련 연구 방법, 학습 대상자들의 학습 목표와 니즈에 부합하는 비정형 학습 자료를 디자인, 테스트, 수정하는 방법, 다양성에 중점을 두고 비정형 학습 경험을 디자인하는 과정, 그리고 비정형 학습의 단/중/장기적 효과를 측정하는 방법을 다룬다.
3.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이 곧 과제의 열쇠가 된다.
수업 중
수업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90분씩 진행된다. 앞서 언급한 미디어 기업들의 현역들을 초청하여 수업 전에 예습해온 내용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학생들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뻘쭘해하며 질문을 망설이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질문이 너무 많아서 본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하고 수업 시간이 끝나면 아쉬움을 토로하는 학생들이 많다. 나 역시 호기심 천국이지만, 처음 며칠은 수줍어서 말도 못 꺼내보고 수업이 끝났다. 교육대학원의 최대 장점은 세심한 교수진이다. 나와 같은 학생들의 니즈를 재빠르게 포착하고, 질의응답 방식에 유연함을 더해주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각각의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를 수업 시작 전에 소규모 랜덤 그룹을 구성하여 (학생 4-5명) 각자 가져온 질문들을 그룹원들과 공유하고, 각 그룹별로 가장 흥미롭거나 긴급한 질문 하나를 골라 그룹 대표가 손을 들어 발표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소규모 랜덤 그룹 세션 동안에는 모든 학생들이 골고루 발언권을 가진다는 점이 좋았고, 각자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고,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 역시 배움의 연속이었다. 친구들이 준비해온 질문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었지만, 친구들의 질문들을 통해 그들의 관심사와 배경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체 수업 세션으로 돌아와서 진행되는 질의응답 시간이 훨씬 질서정연해 졌다.
수업시간에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두면 교수님이나 조교들, 또는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신속하게 답변을 달아준다. 어떤 질문들은 댓글과 대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면서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4.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만큼, 나와 다른 관점을 마주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수업 후 = 프로젝트 팀 미팅
비정형 학습에 관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팀워크를 맞춰나가며 프로젝트를 병행한다는 점은 끊임없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었다. 이 수업에서 만난 팀원들은 네 명 중 세 명(나 빼고 전부 다)이 전직 교사들이다. 초등학교 과학 선생님부터 중학교 역사 선생님까지 다양하다. 우리는 소비자 교육을 주제로 모인 팀이다. 설문지를 작성할 때만 해도 '아이들을 현명한 소비자로 키운다... 중요한 일이지'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팀원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각자가 생각하는 '아이들', '현명한 소비자', '비정형 학습'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우리는 0~18살 중 어떤 나이대를 대상으로 한 비정형 학습 자료를 만들 것인지, 그 아이들은 어떤 사회경제적 상황과 문화적 환경에 살고 있는지, 현재 소비 및 미디어 사용 행태는 어떠한지에 대한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나는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한 경험이 전무하기에 주로 리서치를 기반으로 접근했다면, 팀원들은 본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접근해왔다. 조금 놀란 사실은 리서치에서 일반화하고 있는 아이들의 소비행태나 관심사가 팀원들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꽤 있었다는 것이다. 리서치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인지, 팀원들이 가르쳤던 아이들의 샘플이 랜덤하지 못했던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딱 떨어지는 결론은 짓지 못해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현명한 소비자'에 대한 정의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팀원은 '공정거래 등 도덕적으로 올바른 과정을 통해 생산 및 유통되는 상품들을 구매하는 이'라고 정의하고 있었고, 또 다른 팀원은 '충동구매나 과소비를 하지 않는 등 자산을 아낄 줄 아는 아이들'로 정의하고 있었다. '자신의 소비가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으로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인지하고 행동하는 아이들', '쓸데없는 지출을 하지 않는, 자기 절제력이 있는 소비자' 등등 다양한 정의들은 프로젝트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하나의 정의로 좁혀나가는 데에 있어 특히 신중을 기했던 부분이다. 정해진 답은 없기에, 팀원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정의에 빠르게 도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비정형 학습' 역시 만만찮은 주제였다. 비정형 학습은 간단하게 말해 정형 학습, 즉 학교 커리큘럼과 같이 그 구조와 대상이 정해져 있는 방식의 학습이 '아닌' 다른 방식들의 학습을 통틀어 설명하는 개념이다. 게임 기반의 학습, 소셜 미디어를 통한 학습, 방과 후 프로그램, 서머캠프 등 그 형태뿐만 아니라 학습 대상 역시 광범위하다. '어떤 비정형 학습 방식이 가장 효과적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학습자는 누구고 그들의 니즈는 뭐지?'에 대한 답을 찾아낸 이후에만 유의미하다. 교육기업에서 일을 하면서도 정작 내가 개발하고자 했던 솔루션을 직접 활용할 학습자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면서 반성이 되었다. 여러모로 나에게는 꽤나 부담스러운 시간이었으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온 경험 많은 팀원들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팀원들은 매일 수업 이후에 만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팀 미팅이 끝나면 조교와 30분~1시간 정도 미팅을 하며 팀 미팅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조교와의 첫 미팅에서 조교는 우리 팀이 본인을 어떻게 활용하고 싶은지 물어본다.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조교의 역할은 1. 시시콜콜 잔소리꾼, 2. 경험 많은 선배 (실제로 TIE 프로그램 석박사를 마치고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 공유해줄 수 있는 정보와 경험이 많다), 3. 프로젝트 매니저 (우리 팀이 프로젝트 진행을 때맞춰 진행하고 있는지 확인해주는 역할) 등 다양하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전부 다!"
조교 미팅이 끝나면 다시 팀 미팅의 시작이다. 각자 맡은 바를 정한 뒤 공유 문서를 열어두고 작업한다. 얼추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 되겠다- 싶어 시계를 보면 쓰러져 자야 할 시간이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달리다 보면 어느새 프로젝트 발표날이 코앞이다.
발표 전날 저녁에는 5개 팀들과 모여 각자 준비해온 만큼 공유하고, 학생들끼리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각자의 주제에 매몰되어 미처 인지하지 못한 보완점을 다른 학생들의 새로운 관점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만 다음날 아침부터 발표 일정이 잡혀있는 팀들도 있기에 전날 받은 피드백을 최종 결과물에 얼마나 반영할지는 자유재량이다.
프로젝트는 학습자와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비정형 학습 방식에 대한 연구 결과, 그 연구를 바탕으로 직접 만들어낸 결과물 (게임, 앱, 커리큘럼, 유튜브 채널 등), 그 결과물의 효과성 입증 방안 등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발표가 유머러스하고 프로페셔널하여 바쁜 와중에 참석해준 패널리스트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있다. 내가 이 한 몸 불사르며 열심히 내 몫을 다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손발이 착착 맞는 팀원들이 없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공부하되, 동시에 함께 일하고 싶은 팀원이 되어야 한다. 내가 선택한 전략은 두 가지였다.
1. 내가 제일 하기 싫은 일 (오래 걸려서, 어려워서, 혹은 모호해서)에 손을 든다. 소위 말해 폭탄을 빨리 치워주면 팀원들도 제 몫을 빠르게 찾아간다.
2. 팀원들의 의견은 끝까지 잘 듣고, 거기에 살을 붙인다. 이건 교수님이 제안하신 방법이다. 나만 해도 나에게 귀 기울여주는 사람한테 더 마음이 가니까.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2주 안에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면 태클 걸기보다는 마음을 모으는 데에 에너지를 써야 했다.
감사하게도 발표는 아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팀원들과는 그사이에 정이 들었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렇게 작지만 의미 있는 성취를 함께하고 나니 앞으로 하게 될 많은 프로젝트들도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더 큰 채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