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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Jan 04. 2016

아이슬란드,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1. 한낮에 떠오르는 태양에 대하여

1.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밤 비행기, 꽤나 비어있는 좌석, 복도 양 옆으로 좌석이 세 자리씩 있던 저가형 항공기. 나는 아이슬란드에 도착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착륙하기 위해 비행기가 앞쪽으로 기우는 그 순간부터 비행기 앞머리가 큰 덜컹거림과 함께 땅에 닿는 그 순간까지, 나는 마치 면접을 앞둔 구직자처럼 긴장과 왠지 모를 설렘속에서 (왠지 그래야 하는 것 같아서) 한껏 웃고 있었다. 정말 아이슬란드구나.


아이슬란드에 다녀오고 나서, 왜 그 먼 곳까지 갔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눈이 좋아서, 겨울이 좋아서, 오로라가 보고싶어서 따위의 각기 다른 이유를 대며 신나게 아이슬란드를 자랑하곤 했다. 그런데 사실 아이슬란드에 가는 이유는 아이슬란드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하다.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아무리 되뇌어봐도 나라 이름보다는 누군가 정성껏 준비한 테마파크 정도로 들리는 멋진 이름을 가진 이 나라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공항 화장실을 가지고 있었고, 왠지 엘프어처럼 생긴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겨울다운 차갑고 건조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었지만.


2. 주차장,복도,샤워실과 아름다움의 상관관계

이 나라의 아름다움은 아주 뜻밖의 순간에 나를 놀래키곤 했다.


내가 묵었던 호스텔 복도에는 눈 쌓인 주차장이 보이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의 두 번째 아침, 믿기지 않게도 그 창문 너머에 파란 바다와 설산이 있었다. 원래 그 곳에 있었던 게 아니라, 분명 주차장과 눈보라가 있던 곳이었는데, 자는 동안 갑자기 파란 바다와 하얀 설산이 생긴 것이다.


아이슬란드는 그런 곳이다. 준비하지 않으면, 이 모든 아름다움이 너무 황당해서 복도에 혼자 서서 웃게 되는 곳.  차가운 샤워장에서 온수를 틀었을 때, 무지하게 뜨거운 온천수가 유황냄새를 뿜으며 콸콸콸 쏟아져내리는 그런 곳.     

눈보라 빼고는 아무것도 없던 주차장에, 어느날 설산과 바다가 생겨난 모습


3. 눈을 뜨는 것으로 이미 여행자가 된다는 것

아이슬란드의 여행자라는 신분은 아침잠이 많은 내게 딱 알맞았다. 자고 싶은만큼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새벽 가운데에 있었다. 두꺼운 호스텔 문을 열면 차가운 바람과 깊은 어둠이 스몄다. 한국의 출근시간인 아침 9시에, 나는 호오오 입김으로 구름을 만들며 얼음뿐인 주차장에서 픽업버스를 기다렸다. 해도 뜨지 않았는데 여행을 준비하고 서 있자니 엄청나게 부지런한 여행자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날의 여행 중에 가장 경이로웠던 순간은 해가 뜨는 모습을 마주한 때였다. 내가 한 일은 그게 전부였다. 푹 자고 나가서, 점심에 해가 뜨는 것을 보았다. 그걸로 이미 세상의 모든 여행을 다 해버린 느낌이었다. 눈을 뜨고,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여행자가 되어 특별한 삶을 누리고 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의 시간은 그 자체로 특권과 다름없었다.


4. 그래, 바로 그 한낮의 일출에 대하여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는 수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귀여운 도시다. 바다와 설산을 바라보는 곳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시내라고 부르기 뭐한 길거리에는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이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미처 적응할 새도 없이 날 것 그대로인 아이슬란드의 풍경이 펼쳐진다.


고속도로 주위로 보이는 뒷산의 모습은, 아마도 어느 우주에서 지루해져버린 신이 거대한 초콜렛 팬케익을 여러장 쌓아놓고 그 위에 슈가파우더를 뿌리려다가 슈가파우더를 쏟아버린 것 같은 모양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지구의 것은 아닌 그런 풍경.

이런 동네를 5분만 벗어나면
이런 뒷산을 만난다.

엷게 번진 파란 새벽 사이로 그런 풍경을 지나 싱벨리어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말이 국립공원이지  눈쌓인 화성의 어느 분지를 지나 또 눈 쌓인 어느 공터에 나를 내려준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내리는 대로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설원 저 편으로 해가 뜨고 있었다. 지구의 해였다.


눈 쌓인 평원 위로는 햇빛의 주황색이 스며들었고, 얼음을 얹고 조용히 평원을 채운 강물 위로는 밝은  하늘색, 분홍색, 눈부신 주황색과 밝은 초록색의 빛들이 번졌다. 나는 사는동안 단 한번도, 떠오르는 해가 그런 색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조용하게 떠오르던 정오의 해를 보며, 그 햇빛이 설원을 타오르게 하는 풍경을 보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말과 행동들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 해가 거기 떠올라 이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것 만으로 이미 넘치게 충분했기 때문이다.



5. 애써서 찾지 않아도 충분하다

사는동안 치열하게 의미를 찾아야 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찾고 찾아도 찾아지지 않던 의미들이, 어떻게 채워도 그대로 남아있던 공허함이 말없이 채워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아이슬란드에 처음 해가 떠오르던 그 날이 내게 그랬고, 그 이후로도 (당황스럽게도) 아이슬란드에서 그런 순간을 몇 번 더 만났다.


그냥 내가 거기 있다는 것 만으로, 내 삶이 충분히 설명되는 순간들. 그 시간과 공간 또는 그것을 채우는 어떤 요소들의 존재만으로 나에게 내 삶이 온전해지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순간이라거나
또 이런 순간이랄지...


6. 나의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나는 눈보라가 매서운 밤,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거리를 지나 문을 열면 다른 세상인듯 재즈 연주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호스텔의 펍이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쌀쌀한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면 화아악 하고 퍼지는 유황냄새와 연기가 좋았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도로로록 굴러가는 R발음이 좋았고, 고글을 써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눈보라가 치는데도 고글을 끼고 마침내 거리에 나온 여행자들이 좋았다. 눈보라를 헤치고 성당에 들어가면 나처럼 다 젖어버린 옷을 말리고 있는 사람들이 좋았다. 하늘을 뒤덮은 오로라 밑에서 가만히 서있을 때, 그 옆에 나처럼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슬란드라는 것이 그저 좋았다.


얼마 전,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 편을 보며 1년 전 나의 아이슬란드가 떠올랐다. 분명 같은 아이슬란드지만 다른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었다. 나의 아이슬란드와는 또 다른 아이슬란드. 1년이 지났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써내려가보려고 한다. 기억이 희미할지라도 그때 내가 느꼈던 공기라든가, 볼따구를 때리는 눈보라, 얼어버릴 것 같은 손가락 끝의 감촉 같은 것들은 아직 선명하니까.


게으름을 딛고 과연 두 번째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인가... 여행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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