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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Jan 06. 2016

(지나간) 크리스마스 단상

뒷북주의 반전주의 소름주의

1.

나의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빠다.


하동에 있는 고모네 집이었을 것이다. 동생과 나는 산타할아버지가 와야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잠자리에 누웠다. 오랜만에 다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어른들은 밖에서 술이나 한 잔 더 하기 위해 나갔던 모양이다.


드르륵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보니 아빠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고, 술냄새가 화악 났다. 아빠가 들고있는 검은 비닐봉지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 당시 김영만 아저씨가 텔레비전에서 선전을 하던 불어펜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굳이 입으로 불어서 그림을 그려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물건인데 그 때는 그게 너무나 갖고싶었더랬다. 이왕이면 24색으로.


얀 종이에 꾹꾹 연필로 불어펜 주세요를 써서 조심스레 양말에 넣었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든 까만 비닐봉지의 양 끝은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 난 눈을 질끈 감았고 곧 머리맡으로 무엇이 툭, 하고 놓여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어펜이구나. 나는 그 날 산타를 보내야만 했다. 슬펐던 것 같다. 실망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비닐봉지를 들고 온 진짜 산타가 실망할까봐 나는 미닫이문 소리가 다시 들릴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아빠가 나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갔다. 문이 열릴 때 찬바람이 들어왔고 술냄새가 한번 더 났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내가 원하던 불어펜이 머리맡에 놓여져 있었다. 24색은 아니었지만 내가 적어놨던 그 불어펜이 맞았다. 크리스마스였다.


2.

미닫이 문 사건 이후로 나는 산타를 믿지 않는 시니컬한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한 살 차이나는 동생을 위해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더랬다. 이 '어른들만 아는 비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더 염세적인 초등학생으로 만들었던 것도 같다.


그때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하동 고모네의 미닫이문이 달린 방보다 더욱 산타-비친화적인 구조를 가진 집이었다. 굴뚝도 없는 복도형 아파트 10층에 산타가 와서 자물쇠 두개를 따고 선물을 주러 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초등학생답게 실낱같은 아주 실낱같은 기대를 품은 채로 잠에 들었다. 엄마 아빠가 잠든 다음이었다. 다음날 깨보니 역시 머리맡에 선물 같은 것은 없었다.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을 보니 뭔가 짠했다. 이런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


어른이 된 슬픔을 안고 거실로 나가보니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무언가 포장이 되어있는 물체 두 개가 눈에 띄었다. 포장지를 뜯어보니 하늘색 부엉이 인형과 분홍색 토끼 인형이 있었다. (토끼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나는 하늘색 부엉이 인형이 좋아서..)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엄마아빠도 자고 있었고 문도 다 잠궈져 있었는데? 현관에 가보니 이상하게도 문이 열려져 있었다. 분명 내가 잠궜는데? 간밤에 도둑이 들었나? 근데 왜 선물을 놓고 가지? 그 때부터 내 머리가 뜨겁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온갖 가정을 머릿속으로 엄청나게 했던 것 같다. 사촌오빠가 와서 선물을 놓고 간 것은 아닐까? 아니 열쇠도 없는데? 그럴 리가 없어. 


이 사태와는 전혀 상관없이 단잠을 자고있던 엄마 아빠는 아침부터 왠 이상한 인형 두 개를 들고 이거 엄마가 그랬지! 아빠가 그랬지! 따져묻는 큰 딸 때문에 매우 황당한 모습이었다. 내가 으아악! 하며 머리를 쥐어뜯을때마다 피식 피식 웃기는 했지만 정말로 진실로 그 인형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정말 둘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쳐다보던 모습이 기억난다.


산타는 아닐텐데, 아니 설마 진짜 산타가 있나?

근데 왜 바라지도 않았던 선물을 주지?


크리스마스 내내 피식피식 웃으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있던 그 두 분이 또 산타였겠구나 라는 아주 단순한 정답은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서서히 알게되었다.

그 때도 역시 크리스마스였다.


3.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적고 싶었는데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집에서 티비보고 귤까먹느라 바빴다.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누군가의 집에는 산타가 있다.


그리고  지구가 멸망하기로 한 날의 크리스마스 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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