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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Dec 11. 2017

스무 살의 여행과 서른 살의 여행

런던 공항에 28시간째 대기타며 써보는 한탄

연착과 캔슬로 좁디좁은 런던 사우스엔드 공항에서 두번째 아침을 맞는 중이다. 저절로 여러 생각이 나게 되는데, 서른 살을 앞두고 (한국에선 서른이지만 굳이 앞두었다고 하련다) 돌아보니 여행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런 사건들에 대응하는 나의 모습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걸 기대하고 읽으러 오신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비행기가 연착 혹은 취소가 되어서 호텔 방을 얻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사실 처음에는 훨씬 더 혹독했었다. 사건은 워싱턴디씨에 인턴십을 하러가던 2011년에 일어났지. 멍청하게 친구들과 다른 티켓을 끊어서 한국-일본-뉴욕-워싱턴 비행기 세번을 타야하는 여정에서 혼자만 뉴욕-워싱턴 구간에서 다른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눈이 많이 왔고 친구들의 비행기는 연착이 되었는데 희한하게도 내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했고 운이 좋다 생각하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30분이 채 안되서 워싱턴 근처에 비행기가 도착했지만 기상 상태가 나빠서 공중에서 20분을 뱅뱅 돌았고 기어이 기장님께서 방송으로 우리는 뉴욕으로 돌아갑니다- 를 시전하기에 이르렀다. 진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 중 베스트는 온갖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걸 하는

와중에 다시 기내 방송이 들렸다. 연료가 모자라서 근처 공항에 착륙합니다- 라는 거였다. 그 때 옆에 있던 미국 아줌마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난 죽게된다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후회스러운가? 를 생각해보았다. 당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더 잘해주지 못했던 것과 결혼하자는 걸 웃어넘긴게 너무 후회되었다. (가족한테는 항상 최선 오브 최선을 다했기에 크게 후회되는게 없었음.. ㅋㅋ)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출발했던 공항으로 다시 착륙해서 호텔 바우처를 받아 인근의 공항으로 갔고 샤워를 하려는데 큰 수도꼭지가 폭발하듯 튀어나와서 식겁한 기억이 난다. ㅋㅋ 정신을 좀 차리고 남자친구와 영상통화를 했는데 갑자기 서럽던게 터져서 엉엉 울었다. 아 살아있구나 엉엉. 왠지 기분이 나아져서 통화를 끝내고 밖을 보니 해가 뜨고 있었다. 이 때 기분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 난리를 치고도 밖을 보니 눈오는 주차장이 정말 외국의 그것이라, 외국에 도착했구나 라는 느낌과 새로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 꽤 설렜다. 그때 나이 만 스물한살.


어제는 눈이 많이 와서 런던에서 독일가는 비행기가 처음엔 연착이 되더니 결국 취소가 되었다. 런던 시내에서 한시간 반 걸리는 공항에 가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생략하겠다. 그 이후의 고생도 엄청났으므로.. 하여튼 겨우 호텔 바우처를 받고 호텔에서 자고 왔는데, 창문 밖에는 분명 미국에서의 그것과 비슷한 눈오는 주차장이 있었음에도 호텔에 있는 동안 단 한번도 커튼을 열지 않았다. 아 나 이거 짜증나서.... 왠지 런던을 한 번이라도 더 보면 내 눈이 썩을 것 같아. ㅋㅋ 난 지금 만 스물 여덟이고 곧 만 스물 아홉이 된다.

그거 눈 좀 왔다고 호들갑

여행에서 마주치는 많은 것들이 덜 새롭고, 더 피곤하다. 이전의 내게 삶이란 건 미스테리였고 삶 하나 하나 하나 그 모양이 너무나 각기 달라서 그걸 상상하는 것 만으로 우주 하나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짜릿했다. 지금의 내게 삶은 왠지 어떤 모습이던 간에 같은 덩어리인 것만 같다. 저기서 양복을 입고 떠드는 저 사람의 삶도, 여기서 패딩을 입고 삼삼오오 모인 이 사람들의 삶도, 저기 조용한 저 커플의 삶도.



예전 같으면 공항을 이잡듯이 뒤지며 모든 쇼핑몰을 구경이라도 했을텐데, 난 그냥 한 곳에 앉아서 계속 차나 마시는 중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다행이고, 예전처럼 ‘여기 눌러앉아 살아버리면 어떨까!’ 하는 공상 놀이는 시작되지 않는다. 예전같으면 사우스엔드 공항에 갇혀 숙식을 해결하는 나의 모습이나 사우스엔드 주변의 농노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오토플레이 되었을테지만..



이런 변화가 크게 달갑지 않다. HD tv로 생생한 화면 보다가 그냥 티비 보는 느낌? 엄청나게 싫은 것도 아니지만 굳이 비교해보면 색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사람이 웃긴게 내가 이렇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 표정도 그래보인다. 지치고 무기력하고. 지금은 라운지에 있는데 사실 공항이라는 공간 자체에 설렐 여행자들에게 라운지는 정말 필요없는 시설이다. 대기시간이 진짜 대기시간이어야 이 라운지가 의미가 있는 듯 하다.

팬시한 감옥


물론 나는 지금 두시간 기다려서 두시간 더 연착되는 내 비행기 편명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므로 여기에 오길 잘했다 싶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 공항에서 비행기가 뜨긴 뜨는걸까? 나는 영국이나 한국 정부의 어떤 실험에 강제로 초대되어서 가짜로 만들어놓은 공항과 라운지에 이렇게 갇혀있으면서 저 cctv로 감시당하고 와이파이로 내가 인터넷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두 털리고 있는건 아닐까? 역시 나는 트루먼쇼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더 미쳐버리기 전에 뭐라도 좀 더 주워먹어야겠다. 나와 같이 민숭민숭한 삶을 사는 사람들아 어서 짭짤한 땅콩과 감자칩을 주워먹읍시다. 내 앞에 앉아있는 백인들의 표정이 서로서로의 거울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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