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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Dec 26. 2017

인생이 걸린 선택을 할 때 생각해야 하는것 2/2

베를린 회사에 가서 연봉협상 시도를 해본 이야기

(앞의 이야기에서 계속)


베를린 회사에 가서 연봉협상 시도를 하다가 퇴짜를 맞다


베를린에 취업을 하지 않더라도 회사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큰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공짜니까..! '숙박비는 내가 낼 테니 하루 정도 머물수 있게 해달라'고 회사에 요청해 1박 2일 여정으로 비행기 티켓을 받았다. 베를린에 내리자마자 버스-트램-트램의 경로로 회사로 갔다. 추운 지하철 역에서 구두 갈아신고 화장 대충 하고 파워 당당한척 향한 회사는 생각보다 정말 좋았다. 오피스가 정말 괜찮았고, 사람들도 다들 인상이 좋았다. 전문성은 좀 떨어진다고 느꼈지만 뭐. 내가 하게 될 업무를 내 팀장이 될 사람이 설명해줬는데 그래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당장 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나서 인사하고 마지막으로 HR팀에 갔다.


계약서에 어서 싸인하렴, 이라며 계약서를 들이미는데 내가 원하는 바를 얘기했더니 굉장히 놀라고 기분나빠하는 기색이었다. 이미 여기 취업한 또래의 외국인 여자애들을 통해 연봉협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뭐 그래도 기분나빠할 것 까지야. 준비한 말들을 하고 내일까지 여기 있을테니 연락줘, 라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이 좀 서울 느낌이 나서 크게 좋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서 쇼핑을 했고 그날 잠을 잘 잤다.


그 날밤 베를린 티비타워



다음날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니가 시작일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아서' 라는 핑계로 '채용취소'를 하고 싶단다. 내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일할 생각이 없었기에 크게 아쉽지 않았지만 없던 말을 만들어내서 갑질을 하려는 행태에는 실망했다. 처음 인터뷰부터 모든 전형단계 심지어 이력서에도 난 휴직이며 이직을 하려면 최소 한두달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었고, 전화를 한 사람은 '그건 괜찮아!' 라고 내 눈을 보고 말하던 사람이기에. 잡 오퍼를 떠나 나에게 정직은 중요한 가치인데 어떤 이유로든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건 부당하고, 실망스럽다 했더니 '너 아니고도 우리 지원자 많거든?' 하던 고압적 자세에서 '우린 너와 정말 함께하고 싶지만~' 이라는 강약약강의 태세전환에 더욱 실망스러웠다. 한 20분동안 진짜 이유가 뭐냐, 오퍼를 떠나서 제대로 된 이유를 알려주고 둘다 레슨을 얻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나로서도 이 채용과정에 들인 에너지와 시간 소모가 컸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전화하는 동안) 기다리는 친구에게 인사를 해야할 것 같아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충격적인건 내가 잠시 전화를 끊었던 5분 동안 다른 한국인 지원자에게 전화를 해서 합격 사실을 알린 것 같더라. 아이고.. 아무리 구멍가게라도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비자를 지원해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외국인으로서는 큰 매력이기도 하고, 아마 나처럼 홧김에 지원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테니 합격 전화 한 통에 당장 1월부터 베를린으로 올게요. 라는 사람이 많은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럴수록 '그래도 되는' 회사의 스탠스가 싫긴 하더라. 한국이든 외국이든 지원자에게 기업이 갑질할 수 있다는 건 참 짜증나는 일이다. 다시 전화를 걸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그 사람에게 그럴 필요 없다, 서로 여건이 안 맞으면 진행이 안 되는건 개인적으로 미안해 할 일이 아니다, 다만 한국인이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앞으로는 너희쪽 requirements를 제대로 얘기하지 않아서 생기는 실수는 안 만들겠다고 약속해줘라, 나야 잃을게 없으니 이런 말을 하지만 너희 회사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말도 못할테니까. 이런 내용의 하고싶은 말을 주루룩 하고 난 다음에야 시원하게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내가 했던 모든 선택 중 가장 깔끔하고 시원한 끝맺음이었다


채용 취소라는건 참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내가 원하는건 명확했고 베를린에서 짧지만 조금이나마 해외취업이 어떤 모습일지, 계약서는 어떻게 생겼고 사무실은 어떤 모습인지 등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오로지 '나다운 결정'을 하기 위해 그 모든 과정에 충실하게 임했고 끝까지 '나다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뽑을 사람 많은데 깡다구 부리는게 짜증났을 수도 있겠고, 다른 지원자 입장에서는 고마울 수 있겠고, 한국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독일에 취업해보지 등등 여러 입장과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나답기 위해 한 모든 선택과 행동과 발언들을 내가 책임질 수 있었고 그래서 기분이 꽤나 깔끔했다.


진짜 맛있었다


전화를 받고 나와서 쌀국수를 한 그릇 먹고 마음이 든든했다. 날 위한 선택을 했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남은 베를린에서의 시간 동안 계속 그렇게 했다. 가야하는 명소는 이미 가봤으니, 걷고 싶은만큼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버스를 타고, 다른 사람들의 선물을 사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내가 가고싶었던 디저트 가게에 갔다. 바움쿠헨 한 조각과 핫초코 한 잔을 마셨다. 꼭 가봐야 한다는 국회의사당엔 가지 않았고 대신 히틀러가 자살한 벙커가 있던 자리에 갔다.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마켓에 가서 또 먹고 싶었지만 가성비가 나빴던 (ㅋㅋ) grunkohl을 먹었다. 베를린은 참 매력있지만, 벌써 작은 도시가 그립더라. 그렇게 미련없이 베를린을 떠나 다시 내가 있던 자리로 왔다. 비행기는 한 시간이었지만, 돌아오기까지 두 달 정도 걸린 느낌이었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은 다르기에 내가 한 모든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중요한건 내가 나로 남기만 하면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사실이다. 그 깨달음 하나로 내가 여기 쏟은 모든 시간과 노력이 의미있었다. 그리고 이 경험이 내 앞으로의 많은 선택들을 더욱 쉽고 간단하게 해 줄 것이다.


독일에서의 6개월이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갔다. 놀며 쉬며 또 혼자 바쁘며 의미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새해를 마주하는 나의 각오는 딱 그만큼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쉽게, 간단하게, 깔끔하게 나를 위한 선택을 하자. 돌아오니 기숙사에 사는 애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 날파리가 끓고 있었다. '한 번도 안 버렸으면 오늘 갖다 버리렴!' 이라는 메모를 냉장고에 붙여놓고 왔다. 볕드는 침대에 누워 노래를 듣다가 초코렛을 먹었다. 나에게 집중하면 인생이 그만큼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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