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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Nov 24. 2019

약자의 기준

오래 전 인스타에 올렸다 보관함으로 보낸 글인데, 한국 뉴스 댓글, 특히 마음아픈 수능 희생자 (나는 수능이라는 재앙 앞에서 감히 희생자라는 말을 써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관련 뉴스에 피해자에게 가차없는 댓글을 다는 실명의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나서 다시 가져왔다. 이런 글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지만, 결국 모든 것은 나를 위한 행동이기에 ㅎㅎ 올려본다. 되새기고 또 되새기면서, 약자의 입장에 처한 타인에게 // 나를 위해// 우호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그게 당장 나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200명이 넘어버린 구독자분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써야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읽는 분들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캐나다에서  살고 있습니다.


***


애기가 고층 아파트에서 물건을 던졌다- 위험하다는 기사에 ‘부모를 처벌하고 애 앞에서 경찰에 부모 끌려가는거 보면 애가 안 그럴 것’ 이라는 논지의 많은 댓글들을 보았다. 난민을 옹호한다면 각자 데리고 가서 살고 난민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보증인과 함께 추방해라’ 는 댓글도 보았다. ㅋㅋㅋ 도대체 이 혐오와 / 시스템에 대한 불신(그냥 없다고 믿는 것 같음)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만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는 희한한 도덕의식 및 상황판단은 어디에서 오는가?.? 범죄자를 다 죽이자 라는 취지의 사형 옹호 댓글도 그렇고 맘충과 애들이 싫으니 노키즈존을 만들고... 베를린에 토포그라피 오브 테러를 보면서 나라 전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했는데 그게 멍청한 생각이었고 사람은 원래 그럴 수 있나보다. 가상의 ‘우리’가 위협받을 때에 나와 다른 소수를 없애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정당화되는 모양이다. 한 민족의 삼분의 일을 말살시킨 독일에서는 장애가 있는 독일의 어린이, 회사에서 적응 못한 독일의 젊은이도 죽었다. 혐오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선은 국가도 민족도 아니었다.

서울대를 나와 방송으로 명성을 얻은 개천용의 히어로가 ‘우리도 힘들고 내 옆사람도 죽는다구요’ 라며 진짜 힘들다고 한다. 이 힘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1인 총생산 3만달러 가까이인 나라가 천달러 수준의 나라에게 할 수 있는 소리인가?

모금방송 전화를 받으면 기초수급자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본인 돈 쪼개 저 애를 꼭 돕고싶다며 그렇게도 전화가 많이 왔었다. 한번 더 생각해보시라고 말해도 돕자는 말에 울컥해가며 주민번호를 따라적었던게 생생하다. 아픔을 겪은 사람에겐 타인의 아픔이 더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내가 너무 아파서 남을 도울 수 없어. 라는 말이 성립하는 세상을 나는 믿고싶지 않다. 아플 수록 다른 아픈 사람이 보이는 진짜 지옥도에 있어봤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의 공포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짜증일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을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왜 저놈들을 도와야 하지? 그러니 살기힘들어 죽겠다면서도 무상급식을 받아갈 중산층 이상의 자식들이 싫어서 무상급식을 반대하게 되고 그러는 것일 것이다.

어떤게 이 헬조선을 바꾸는 건지, ‘정말 힘들어서 다 죽을것 같으니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게 나은지 ‘이제는 할만큼 하는’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게 나은지 잘 몰라서 그런 것일 것이다. 헬조선 불반도를 북유럽 복지천국으로는 만들고 싶으면서 그들의 인테리어에만 흥미를 가지는 것 같은건 아마 내 착각이겠지 ^.^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고서는 내가 사랑하는 말과 글이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 아는 것도 많고 다니는 데도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우리는 패전 후의 독일도 아니고 대통령도 바꾼 나라의 국민인데!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나라를 만들면 우리는 영원히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불행한 사고로 인해’ 약자가 될 것에 벌벌 떨며 지옥불을 버텨야 한다. 그런 나라에서는 삶에 동등한 권리가 없고 가지는 모든 것은 위태로움이 된다. 어떻게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뺏기면 안되고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렇게 사는데도 김훈의 말대로 ‘삶이 우발적이라는’ 공허감을 안고 가야 되는 것이다. 그 사회에서, 내가 약자가 되었을 때, 그래 얘는 우리나라 사람이잖아! 국제사회의 기준에 부합하게 도와주자! 라고 할 것 같은지.. ㅋㅋㅋ 슬프게도 그런 때가 오면 약자의 기준은 그가 속한 바로 그 어딘가를 기점으로 또 한번 나눠지게 될 것이다. 그게 아직도 그들이 말하는 ‘우리나라도 힘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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