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하루가 명작이길
어느날 아침, 책상 한쪽에 놓인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펼쳤다. '풀꽃', '행복', '선물' 그리고 '시'를 천천히 읽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건축가로서 미래의 공간을 그리면서도, 학생들에게 내일을 이야기하면서도, 나는 정작 '오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역설의 시대
한국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K-팝, K-드라마, 반도체... 세계가 우리를 주목한다. GDP는 올라가고, 기술은 발전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사람들은 점점 더 힘들어할까?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 건축 현장에서 만나는 동료들, 이웃들과 친구들. 모두가 피곤해 보인다. 몇 일전에 캐나다에서 한국에 오랜만에 온 파트너가 "몇 년 사이,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 슬프다"란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 가슴이 미어왔다. 성공의 사다리는 높아졌는데, 올라갈수록 숨이 가빠진다.
이건 너무 역설적이지 않은가?
나태주 시인은 말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찾지만, 정작 이미 손안에 있는 것들을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침 햇살, 커피 향, 누군가의 눈빛. 이 평범한 순간들이 사실은 기적이라는 걸 우리는 자꾸 잊어버린다.
공간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는 선물
나에게는 두 딸이 있다. 올해 고3인 두 아이는 지금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주변의 모든 고3 학부모들이 불안해하고, 아이들이 지쳐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 딸들은 행복하다.
유년시절 프랑스에서 아이들은 느린 삶의 리듬을 배웠다. 광장에서 뛰놀고, 작은 카페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공간이 만들어내는 풍족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양평에서 아이들은 계절을 느끼며 자란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이 깨고, 창문을 열면 산이 보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이조성이 되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고 싶은 일을 가족이 믿고 밀어준다는 것을 안다.이것이 내가 믿는 것이다. 좋은 공간과 환경은 사람을 바꾼다. 작은 일상을 행복으로 만들어준다. 하루를 선물처럼 느끼게 해준다.
건축가이자, 시대의 어른으로서
나는 지속가능한 건축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처음에는 환경을 생각하고 에너지를 절약하는 건물이 지속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진짜 지속가능한 건축은 사람이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건축가의 역할은 거창한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하루가 선물이 될 수 있는 환경과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작은 일상이 행복이 될 수 있는 장소를 설계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높은 건물이 아니라, 더 따뜻한 공간이다.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더 느린 여유다. 그리고 나는 두 딸을 키우는 아빠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불안하고, 직장인들은 번아웃에 시달리고, 청년들은 미래가 막막하다. AI는 우리를 앞서가고, 변화는 우리를 재촉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
넌 괜찮아, 우린 괜찮아
내 딸들을 보면 안다. 입시라는 압박 속에서도,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 때, 살아가는 공간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낄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마찬가지다. AI 시대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해도 괜찮다. 때로는 느리게 가도, 때로는 헤매도, 그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나태주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아무나 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행복도 아무나 누리는 거다.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
한국이 아무리 발전해도, 한류가 아무리 세상을 장악을 해도, 정작 우리가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성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느낄 수 있는 여유다.
당신의 하루는 이미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까지, 당신이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작품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설계가 틀어질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균열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당신만의 이야기이고, 당신만의 건축이다.
오늘, 이 순간도 선물이다 : 당신의 하루가 명작이길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창밖을 본다.
오늘 겨울 하늘이 참 맑다. 산 너머로 햇빛이 비치고,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평범한 풍경이지만, 자세히 오래 보니 사랑스럽다.
오늘 하루도 선물이다. 내일이 불안해도, 어제가 후회스러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 것이다. 이 순간을 자세히, 오래 들여다봐 주었으면 좋겠다.
AI가 세상을 바꿔도, 기술이 우리를 앞서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당신의 하루가 의미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괜찮다는 사실이다.
건축가로서, 두 딸의 아빠로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나의 소망은 이것이다.
우리 사회에 작은 일상이 행복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지길. 사람들이 하루를 선물처럼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길. 그래서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깊이,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중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위로를 전한다.
넌 괜찮아. 우린 괜찮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