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고, 필사하는 삶에 관하여
손으로 쓰는 마음
작년(벌써 작년이라니...) 여름의 한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올해에 대학에 들어가는 우리 쌍둥이 딸들의 프랑스 친구들(그들은 이미 작년에 대학 입학이 확정이 되었다.)이 집에 놀러왔다. 열아홉 살 아이들의 수다는 예상 가능한 것들이었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연애 이야기. 그런데 그들의 대화 중 한 대목에서 나는 귀를 의심했다.
"너 그 애한테 시 써줬어?"
"응, 어제 써서 줬어. 떨리더라."
"반응 어땠어?"
요즘 십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이 이성에게 직접 시를 써서 선물하는 것이라니. 스냅챗도 인스타그램도 다 있는 시대에, 펜을 들고 종이에 시를 쓴다니. 그것도 유행으로.
'역시 프랑스구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곧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프랑스라서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 욕구다.
사실 나는 2020년부터 연하장을 직접 제작해서 손편지로 써왔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손편지를 쓰는 일이 없어졌다. 카톡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줄 보내면 그만이다. 빠르고, 편하고, 효율적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해의 고마움을 손편지로 전하기로 결심했었다.
매년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펜을 들었다. 받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을 한 자 한 자 적었다. 때로는 한 장을 쓰는 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글씨가 삐뚤어지면 다시 썼고,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쳐 썼다.
손이 좀 아팠다.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런데 올해, 2026년 연하장을 보낼 때 그 의미가 유독 더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반응이 이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연하장에 손편지라니, 너무 감동이에요."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했어요." 해마다 들었던 말이지만, 올해는 그 감동의 깊이가 달랐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작년에 지브리 프사 유행 기억나? 모두가 AI로 만든 이미지를 프로필로 쓰고, AI가 만든 새해 인사 이미지를 돌려보내고... 처음엔 신기했는데, 어느 순간 피로해지더라. 다 비슷해 보이고, 진심이 안 느껴지고. 그런데 이렇게 손으로 쓴 편지를 받으니까, 이게 진짜 마음이구나 싶어."
맞다. 작년 한 해 우리는 AI가 만든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았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편리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넘쳐날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진짜'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단순한 새해 인사였는데, 손으로 쓴다는 것만으로 그것은 특별한 선물이 되었다. 아니, 2026년이기에 더욱 특별한 선물이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손편지가 주는 감성, 그것은 단순히 정보의 전달이 아니다. 편지를 쓰는 동안의 시간,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정성스럽게 한 글자씩 적는 손의 온기. 그 모든 것이 함께 전달되는 것이다.
진심을 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여전히 글을 쓴다.
그것도 손으로.
AI가 말해주지 못하는 것
얼마 전 '[다시, 읽기로 - 2부 AI 시대, 읽기의 반격]'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제목부터 반가웠다. AI 시대에 '읽기의 반격'이라니.
건축가로서, 사업가로서,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나는 매일 AI 기술의 혜택을 받는다. ChatGPT는 내게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요약해주고, 초안을 작성해주고, 아이디어를 정리해준다. 분명 유용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노트에 필사도 하고 건축가다 보니 스케치도 한다. 좋은 펜으로, 좋은 종이에, 천천히.
왜일까?
AI는 요약을 해준다. 하지만 저자가 그 문장에 이르기까지 거쳤을 수많은 사유의 과정, 고뇌의 시간, 선택의 순간들을 전달하지 못한다. AI는 정보를 준다. 하지만 그 정보가 내 안에서 발효되고 숙성되어 나만의 생각으로 변화하는 그 시간을 주지 못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사유와 조우하는 것이다.
필사, 느린 사유의 감정
나는 필사를 사랑한다.
좋은 문장을 만났을 때, 단순히 밑줄을 긋거나 하이라이트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문장을 내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으면서, 나는 저자가 그 문장을 쓸 때의 호흡을 따라간다. 문장의 리듬을 느낀다. 단어의 무게를 짚어본다.
필사하는 동안 그 문장은 내 안으로 스며든다. 눈으로 읽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더 깊이, 더 온전하게.
이것은 비효율적인가?
물론이다.
AI가 1초 만에 해줄 요약을 나는 30분을 들여 손으로 옮겨 쓴다. 하지만 그 30분이 나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 30분이 그 사유를 진정으로 '내 것'으로 만든다.
문학서적이든, 철학서적이든, 인문학 서적이든 마찬가지다. 좋은 노트에, 좋은 펜으로 필사하며 내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는 그 순간들. 그것이 바로 텍스트의 힘이다. 책의 힘이다. 필사의 힘이다.
빠른 세상에서 느리고 읽기 그리고 깊게 생각하기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시대를 살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고, 모든 것은 즉각적이며, 효율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그런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천천히, 깊이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저항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낭만주의적 향수가 아니다. 이것은 생존 전략이다.
건축을 설계할 때, 사업 전략을 짜갈 때, 학생들을 가르칠 때, 나는 깨닫는다. 진정한 통찰은 빠른 정보 처리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깊은 사유, 오랜 숙고, 느린 발효의 과정에서 온다는 것을.
AI는 패턴을 찾아준다. 하지만 패턴 너머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훈련을 통해서만 길러진다.
텍스트의 귀환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말하는 '읽기의 반격'은 어쩌면 이런 의미일지도 모른다.
AI가 모든 것을 요약하고 정리해주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더 깊이 읽어야 한다. AI가 글을 써주는 시대에, 우리는 더 진심을 담아 써야 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더 자주 펜을 들어야 한다.
프랑스의 십대들이 시를 쓰는 것처럼.
왜냐하면 진심은 속도를 타고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심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고민을 필요로 한다. 손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AI 시대에 책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은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 멈춰 설 용기를 준다. 깊이 들어갈 인내를 가르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만의 목소리를 찾게 해준다.
읽고, 쓰고, 필사하는 삶
요즘 나는 대학원 학생들에게 자주 말한다.
"AI를 활용하되, AI에 종속되지 마라. AI에게 요약을 시키되, 원문을 읽어라. AI에게 초안을 쓰게 하되, 자신의 글을 쓰는 연습을 멈추지 마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가끔은 좋은 책의 좋은 문장을, 좋은 노트에, 좋은 펜으로 옮겨 써보라. 그것이 당신을 단순한 정보 소비자가 아닌, 진정한 사유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스스로를 극복하는 인간이었고, 철학의 지혜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면,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것이다.
AI 시대에도, 아니 AI 시대이기에 더욱,
읽고, 쓰고, 필사하는 삶.
천천히 사유하는 용기.
그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위버멘쉬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