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위로가 되는 시간

초고령화 시대, 따뜻한 주거 공간을 만드는 법

by 건축가 김성훈
COVER.jpg EBS 특집 다큐멘터리 '특별하지 않아서 좋았다 - 출처 : EBS

작년 12월 27일, EBS 특집 다큐멘터리 '특별하지 않아서 좋았다'가 방송되었다. 필자가 설계와 기획에 참여한 해심당이 소개되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정작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다른 장면들이었다.

충남 부여 송정마을의 한 할머니. 팔십대 중반의 나이에도 400포기 김장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서울 가서 노인네 갇혀서 못 살아요. 이게 좋아서 마을을 못 떠난 거예요."

강원도 원주 구도심의 상인 어르신. 신도시로 떠나지 않고 낡은 골목을 지키시며 말씀하셨다.

"나이 들면 편안한 게 좋지. 아는 사람 많으면 더 편안하고."

서울 중랑구의 한 어르신. 엘리베이터도 없는 연립주택 2층에서 30년째 사시며 말씀하셨다.

"나한테는 이 집이 최고예요. 68년 전 결혼사진이 있고, 이 집이 평생 집이죠."

나는 이 말씀들을 들으며 깨달았다. 노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익숙함이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알았다. 모든 어르신이 익숙한 곳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을.


작은 것들이 주는 큰 위로

건축가로서 어르신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어르신들이 원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햇살이 들어오는 창. 어제와 같은 오늘이지만, 창밖 빛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보며 계절이 흐른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고 하셨다.

복도에서 이웃을 만나 짧게 인사하는 것. "어제는 못 봤네요. 괜찮으세요?" 하고 물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외롭지 않다고 하셨다.

직접 흙을 만지고 무언가를 키우는 것. 토마토든 상추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자라는 것을 보는 일. "이게 자라는 걸 보면 나도 살아 있다는 걸 느껴요"라고 말씀하신 할머니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밤에 포근하게 잠들 수 있는 것. 너무 밝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방. 안전하다는 느낌. 내일 아침도 이 집에서 눈을 뜰 수 있다는 안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하루. 하지만 그 평범한 하루가 편안하고 따뜻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노년의 존엄이라는 것을 배웠다.


LH 해심당 -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은 곳

5.jpg EBS 특집 다큐멘터리 '특별하지 않아서 좋았다'에 소개된 해심당, 필자가 설계에 참여했다.

서울 도봉구의 '해심당'은 65세 이상 무주택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이다.

이곳을 설계하며 가장 고민했던 것은 거리였다. 외롭지 않으면서도 간섭받지 않는 적절한 거리.

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근데 또 너무 혼자 있으면 무서워요."

그래서 각 층마다 공동거실을 만들었다. 아침에 문을 열면 이웃이 있는 곳. 누군가 "잘 주무셨어요?" 하고 물어주는 곳. 차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피곤하면 "먼저 들어갈게요" 하고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는 곳. 문 하나의 거리. 문을 열면 함께, 문을 닫으면 혼자. 그 단순한 구조가 어르신들께 큰 안정감을 준다고 했다. 옥상에는 정원을 만들었다. 설계 초기에는 그냥 예쁜 정원을 생각했다. 하지만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바꿨다.



image.png 해심당 전면 모습, 층별 색깔을 부여함으로써 어르신들에게 자기가 사는 집을 인식하는 환경인식디자인을 적용을 하였다.
image.png 해심당 옥상정원

"보기만 하는 정원 말고, 우리가 직접 만지고 키울 수 있으면 안 될까요?"

그래서 옥상의 절반은 텃밭으로 만들었다. 어르신들이 직접 채소를 심고, 물을 주고, 수확하는 공간. 지금은 토마토, 상추, 깻잎, 고추가 자란다.

1층은 동네에 열려 있다. 작은 카페처럼 만들어서 지역 주민들도 저렴하게 차를 마실 수 있다.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걱정하셨다. "우리끼리만 있는 곳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오면 불편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지금은 가장 좋아하시는 공간이 되었다. 젊은 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오면 할머니들이 아기를 봐주신다. 세대가 섞이고, 이야기가 오가고, 관계가 만들어진다. 고립이 아니라 연결. 그것이 해심당이 추구한 방향이었다.


LH 진주영구임대주택 시범 리모델링 - 빛과 자연이 있는 집

필자가 참여한 또 다른 경남 진주의 영구임대주택 리모델링 프로젝트. 1993년에 지어진 30년 넘은 집들을 고령자에게 적합한 공간으로 바꾸는 LH의 시범 사업이었다.

처음 그 집들을 봤을 때, 가슴이 아팠다.

좁고, 어두웠다. 중문이 햇빛을 막고 있었고, 작은 창으로는 빛이 조금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낡은 벽, 오래된 바닥. 여기서 수십 년을 사신 어르신들은 매일 아침 어떤 기분으로 눈을 뜨셨을까.

다짐했다. 이것을 단순한 수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는 일로 만들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빛을 들이는 것이었다. 주방과 거실을 나눈 중문을 없앴다. 문을 미닫이로 바꿨다. 현관에서 발코니까지, 빛이 온 집 안을 관통하게 했다.

빛은 단순히 밝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빛은 희망이었다. 내일도 해가 뜬다는 것. 계절이 흐른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

조명도 바꿨다. 차갑고 밝은 형광등 대신 따뜻한 색의 빛을 선택했다.

밝기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중요했다. 아침에는 은은하게, 낮에는 환하게, 저녁에는 다시 부드럽게. 빛이 하루의 리듬을 따라 변한다.

바닥과 벽의 색도 신중하게 골랐다. 차가운 회색은 버리고 따뜻한 아이보리를 선택했다. 강조 색으로는 연한 녹색을 썼다.

나무의 질감도 살렸다. 플라스틱 같은 차가운 재질 대신, 손으로 만졌을 때 온기가 전해지는 나무를.

"만지면 따뜻해요. 플라스틱은 차가워서 싫었는데, 이건 만지면 좋아요."

안전을 위한 장치들도 필요했다. 손잡이, 센서등, 큰 글씨 호수판. 하지만 그것들이 '노인용 시설'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싶었다.

손잡이는 벽의 디자인 일부로 자연스럽게. 센서등은 은은한 간접조명처럼. 호수판은 예쁜 사인물처럼.

집이 위로를 준다는 그 말. 그것이 건축가로서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말이다.

31_배란다_BEFORE AFTER_02.jpg 베란다 : 왼쪽이 기존의 모습이고 오른쪽이 리모델링 후의 공간이다. - 발주처 LH / 지음플러스 설계 + 우진아이디 시공
31_현관에서 배란다_BEFORE AFTER.jpg 현관 : 왼쪽이 기존의 모습이고 오른쪽이 리모델링 후의 공간이다. - 발주처 LH / 지음플러스 설계 + 우진아이디 시공

공간이 주는 치유

해심당과 진주 프로젝트를 하며 배운 것이 있다.

고령자를 위한 공간에 필요한 것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 고가의 자재도 아니라는 것.

필요한 것은 세심함이다. 마음이다.

어르신들은 작은 것에 민감하다. 빛의 색깔, 바닥의 촉감, 조명의 밝기, 벽의 색상.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이 어르신들께는 하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두운 복도는 두렵다. 차가운 벽은 쓸쓸하다. 너무 밝은 조명은 눈이 아프다. 혼자만 있는 공간은 외롭다.

하지만 따뜻한 빛이 들어오는 창은 희망이다. 부드러운 촉감의 손잡이는 안심이다. 복도에서 만나는 이웃의 인사는 기쁨이다. 옥상에서 키우는 토마토는 삶의 의미다.

작은 것들. 하지만 그 작은 것들이 모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들이 모여 삶이 된다.


나이 드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

대한민국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이다. 나이 드는 것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현재이고 미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노인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 시설로, 요양원으로, 자녀 집으로. 안전과 편의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곳에서 분리한다.

그러나 노년은 삶의 주체여야 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며, 존엄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다큐에서 부여 송정마을의 할머니들은 그림책 작가로 데뷔하셨다. 평균 연령 85세. 마을 카페를 운영하시고, 김장을 하시고, 손주들을 맞으신다.

원주 구도심의 상인들은 신도시로 떠나지 않고 익숙한 골목을 지키신다.

해심당의 어르신들은 자치회를 꾸려 공동체를 운영하신다. 옥상에서 채소를 키우시고, 카페에서 동네 주민들을 맞으신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보호받는 노인이 아니라, 일하고 나누고 즐기는 삶의 주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간이다.


편안한 공간은 자신감을 준다. 따뜻한 공간은 위로를 준다. 아름다운 공간은 기쁨을 준다. 함께하는 공간은 관계를 만든다.


특별하지 않아서 좋은 것들

환경미화원으로 일하시는 한 어르신이 다큐에서 말씀하셨다.

"어르신들은 거리에 친절했지만, 거리는 어르신들에게 조금도 친절하지 않습니다."

우리 도시가, 우리 건축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친절해져야 한다. 노년에게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래에게.

그 친절함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아침 햇살이 잘 드는 창문. 복도에서 만나는 이웃과 나누는 인사. 함께 차를 마시는 공동거실. 흙을 만질 수 있는 옥상 정원. 밤에 포근하게 잠들 수 있는 안락함.

특별하지 않은 것들. 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집이 되고, 삶이 되고, 위로가 된다.

나는 건축가로서 거창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빛을 들이고, 따뜻한 색을 골랐을 뿐이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이 원하는 것을 공간에 담으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작은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견디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안다. 내일을 기다리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안다.


집이 위로가 되는 시간.


그것을 만드는 것이 초고령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건축가로서뿐 아니라, 이웃으로서, 가족으로서,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언젠가 우리 모두 나이가 든다. 그때 우리가 살게 될 집이, 우리가 머물게 될 공간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특별하지 않아서 좋은 그런 날들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지속가능한, 오래 남을 공간을 고민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건축가의 건축과 공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litt.ly/geeum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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