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가 발견한 로컬 스토리의 지속가능성
프랑스에서 10년을 넘게 생활하며, 나는 한류의 물결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센 강변을 흔들 때도, 그저 "한국 문화가 수출되고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사이 한국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BTS의 빌보드 석권, <기생충>의 아카데미 휩쓸기, <오징어게임>의 넷플릭스 신기록. 한국 문화는 이제 세계 문화의 중심축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약 4년만에 완전체로 컴백하는 BTS의 새앨범 <아리랑>이 건축가이자 지속가능한 공간을 기획하는 기획자인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현재 여러 지자체의 공간기획에 참여하며 지역소멸이라는 절박한 현실과 마주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로컬을 살릴 수 있는 진짜 힘은, 바로 그 로컬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힘이라는 것을.
건축가가 본 아리랑 – 완벽한 지역성의 교과서
지난 2025년 밀양문화유산 국제콘퍼런스에서 발제를 하면서, 나는 건축가이자 공간기획자로서 중요한 발견을 했다. 같은 '아리랑'이지만, 각 지역마다 완전히 다른 가락과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기획하는 지속가능한 공간에 필요한 핵심 원리라는 것.
경기 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의 영화를 통해 전국화된 신민요로, 맑고 세련된 보편성을 가진다. 정선 아리랑은 고려 유신들의 한시에서 시작된 '긴아라리'로, 느리고 애절한 산간의 애환을 담는다. 진도 아리랑은 남도토리로 한과 흥을 동시에 표현한다. 밀양 아리랑은 아랑 전설에서 유래해 세마치장단으로 비극을 희망으로 승화시킨다.
건축가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같은 프로그램, 다른 콘텐츠'의 원리다. 정선의 긴 겨울은 느린 템포를, 진도의 섬 생활은 한과 흥의 공존을, 밀양의 평야는 경쾌한 리듬을 낳았다. 각 지역의 기후·문화·역사가 완전히 다른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모더니즘이 놓친 것이고, 지금 많은 지자체 공간기획이 반복하는 실수다. '표준 모델'로 전국을 똑같은 복합문화공간으로 채우며,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바로 그 땅만이 가진 이야기.
공간에 스토리를 심는다는 것 – 건축가의 고백
최근 몇 년간 지자체들의 공간 컨설팅 및 기획을 하며, 나는 깊은 반성을 한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어 그럴듯한 공간들이 만들어지지만, 그 안에 그 지역만의 이야기가 없다.
건축 설계는 완벽하다. 구조는 견고하고, 마감은 깔끔하며, 동선은 효율적이다. 하지만 공간기획이 실패했다. 누구를 위한 공간인지,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지, 어떻게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기획이 부재했다.
서울의 복합문화시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지방 도시의 건물들. 오픈 초기에는 사람들이 몰려오지만, 6개월이 지나면 텅 빈다. 이것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공간'이다.
우리는 '건물'을 짓고 있는가, '장소'를 만들고 있는가?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가, '커뮤니티'를 기획하고 있는가? 아리랑이 가르쳐주는 것은 명확하다. 각 지역의 공간도 그 지역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정체성은 건축 설계가 아니라 공간 기획에서 시작된다.
형태는 달라도 좋다. 중요한 것은 공간기획의 출발점이 '그 지역의 이야기'인가 하는 것이다.
시간의 가치를 엮어 미래를 설계하다
2025년 밀양 컨퍼런스에서 나는 "시간의 가치를 엮어 미래를 설계하는 것"을 강조했다. 지속가능성이란 단순히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공간에 엮어내고, 그것을 통해 미래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건축가로서 나는 물리적 지속가능성을 설계한다. 친환경디자인설계, 자연 환기, 로컬 재료 사용. 하지만 공간기획자로서 나는 안다. 아무리 물리적으로 완벽해도, 그 공간에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지 않으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은 건축 기술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라는 것을.
아리랑이 바로 그렇다. 고려 시대 한시가 조선 민요가 되고, 일제강점기 저항가가 되고, 해방 후 민족 상징이 되고, 2026년 BTS의 앨범이 된다.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되며, 각 지역마다 다르게 변주되며, 끊임없이 진화하며 살아남았다. 이것이 진정한 '문화적 지속가능성'이다.
밀양의 아랑 전설은 지금의 청년 프로그램에서 '부당함에 맞서는 용기'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정선의 유신들의 충절은 지금의 교육에서 '뿌리를 잃지 않는 자존'으로 이어져야 한다. 진도의 섬 생활은 오늘의 커뮤니티에서 '고립을 극복하는 연대'로 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BTS가 아리랑으로 하고 있는 것이고, 건축가이자 공간기획자인 내가 로컬 공간에서 해야 할 것이다.
서울을 넘어, 로컬에서 세계로
이제 우리나라는 서울만의 나라가 아니다. BTS, 봉준호, <오징어게임>이 세계를 사로잡은 이유는 '한국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국적인 것의 본질은 서울이 아니라 로컬에 있다.
정선의 인내, 진도의 연대, 밀양의 활기. 이것이 진짜 한국의 이야기다. 경기 아리랑이 전국을 대표하지만, 정선·진도·밀양 아리랑 없이는 아리랑의 진정한 깊이를 이해할 수 없듯이, 서울이 한국을 대표하지만 로컬 없이는 한국의 진짜 매력을 발견할 수 없다.
건축가로서 내가 목격하는 지역소멸은 단순히 인구 문제가 아니다. 그 지역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삶의 지혜가 단절되며, 우리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것이다.
로컬을 살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서울의 공간을, 멋있는 공간을 복제하지 말고, 그 지역만의 이야기를 공간기획에 담아내는 것. 유행하는 프로그램을 따라 하지 말고, 그 지역의 기후·문화·역사가 만든 고유한 콘텐츠를 발굴하는 것. 가장 로컬한 이야기로 가장 글로벌한 가치를 창조하는 것.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그리고 내가 배운 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은 로컬에 있다는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BTS의 아리랑 컴백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세계 정상에 선 그들조차 자신들의 뿌리로 돌아온다. 가장 로컬한 것이 가장 지속가능하다.
건축가로서 나는 확신한다. 공간이 100년 후에도 사랑받으려면, 단순히 물리적으로 견고한 건축으로는 부족하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 그 이야기를 실현하는 프로그램,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는 문화적 지속가능성. 그것이 진짜 답이다.
각 지역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리랑'을 변주해 냈듯이, 우리가 기획하는 공간들도 각 지역의 고유한 이야기로 '지속가능성'을 변주해야 한다.
시간의 가치를 엮어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공간기획에 담아내고, 그것이 미래 세대의 정체성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속가능성이고, 지역소멸을 막는 길이며, 로컬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의 새로운 방향이다.
1926년 나운규가, 2026년 BTS가 보여주듯, 진정한 혁신은 뿌리로부터 시작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같은 고개지만 넘는 방식은 다르다. 각 로컬의 이야기로 지속가능성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 이야기의 힘으로.
지속가능한, 오래 남을 공간을 고민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건축가의 건축과 공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