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설계하다

우연이 만드는 행복, 공간이 만드는 우연

by 건축가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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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어원이 말하는 것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 혹시 우리가 행복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영어 'happy'의 어원을 찾아보면 흥미롭다. 14세기 중세 영어 'hap'(우연, 운, 행운)에서 유래했고, 고대 노르드어 'happ'(운 좋은, 우연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행복(happy)의 원래 의미는 "운 좋게 좋은 일이 일어나다"였던 것이다.

프랑스어는 더 직접적이다. 'heureux'(행복한)는 'heur'(운, 행운, 기회)에 형용사 어미 '-eux'(~이 많은)가 붙은 말이다. 말 그대로 "운이 많은", "좋은 기회가 많은" 상태가 행복이었다.

프랑스에 오래 살면서 이 단어의 뉘앙스를 체득했다. "Je suis heureux"(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할 때, 그건 단순히 기분이 좋다는 게 아니라, 내 삶에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행복은 내게 일어나는 것(happen)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일들이 자주 일어날 수 있을까?"그리고 건축가인 나는 깨달았다. 그 좋은 일들은 대부분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내게 일어나는 작은 행복들


새벽 다섯시, 서재에서 펼치는 책 한 권.
매일 아침 한 시간,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 어제까지 막혔던 프로젝트의 해법이 2500년전 손자병법에서 발견된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개념들이 새벽의 고요 속에서 연결된다. 이건 계획할 수 없는 일이다. 그냥 일어난다(happen). 그리고 그게 행복이다.

저녁 여섯시, 가족들과 둘러앉은 식탁.
아이가 갑자기 학교에서 있었던 웃긴 이야기를 꺼낸다. 아내가 오늘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다가 예상치 못한 통찰을 던진다. 나도 프로젝트의 어려움을 털어놓다가 아이의 엉뚱한 질문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이 모든 건 계획된 게 아니다.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그게 행복이다.

점심 식사 후, 직원들과 함께 가는 회사 근처 작은 카페.
외근과 출장이 많은 나에게 이 시간은 특별하다.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다가도 누군가의 사적인 고민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젊은 직원들이 고민하는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그들은 내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배운다. 계획한 게 아니다. 커피 한 잔과 작은 테이블 사이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좋은 일이다.

그리고 멋진 프로젝트로 가득한 우리 회사.
도면과 여러 서류들을 펼쳐놓고 논쟁하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이거 어때요?"라며 전혀 다른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우연히 발견한 공간의 가능성. 완성된 공간을 함께 확인하러 갔다가 예상치 못한 사용자의 반응을 마주한다. 영어 어원이 말하듯, 행복은 '운 좋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프랑스어가 말하듯, 행복은 '좋은 기회가 많은' 상태다. 그래서 나는 우리 회사가 좋다.


그렇다면 그 '좋은 일들'과 '좋은 기회들'은 어디서 일어날까?


행복의 빈도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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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서은국 교수는 그의 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을 거창한 성취가 아닌 '갈비탕 한 그릇' 같은 소소한 즐거움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행복 압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일상 속 사소한 즐거움(행복)을 많이 깔아두어야(압정), 그중 하나를 밟아 자주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행복은 강도보다 횟수가 중요하며, 사소한 긍정적 경험을 얼마나 자주 하느냐가 삶의 행복도를 결정한다. 복권 당첨 같은 한 번의 거대한 행복보다, 매일 경험하는 작은 행복들의 총합. 다시 말해, 좋은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happen) 환경을 만드는 것.


시인 나태주는 그의 시, <행복>에서 그 '좋은 일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한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집', '사람', '노래'. 모두 우리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들이다. 저녁에 돌아갔더니 가족이 있고, 힘들 때 문득 떠오른 친구가 있고, 외로울 때 갑자기 생각난 노래가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그 모든 것이 일어날(happen) 공간이 있다는 것.


우리에겐 우연이 너무 적다

100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OECD 국가 중 행복지수는 하위권이고, 자살률은 상위권이다. 코로나 이후 우리 도시는 극단으로 분리되었다. 홍대, 강남, 성수동 같은 '핫플레이스'만 북적이고, 나머지 동네는 텅 비었다. 동네 카페는 문을 닫고, 작은 서점은 사라졌다.

우연한 만남이 일어날 공간들이 사라진 것이다.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우연한 영감, 식탁에서 나누는 우연한 대화, 카페에서 마주치는 우연한 만남, 골목길에서 이웃과 나누는 우연한 인사. 이 모든 'hap'(우연, 기회)들이 사라졌다. 그 결과는? 사람들은 행복을 경험할 기회를 잃었다. 거창한 소비를 해야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날'만 남았고,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작은 좋은 일들은 사라졌다.


우연이 일어나는 공간의 조건

그렇다면 어떤 공간에서 우연한 행복이 일어날까? 내 경험으로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자주 갈 수 있어야 한다.
우연은 반복 속에서 온다.매일 저녁 식탁처럼, 자주 가는 나만의 카페처럼. 자주 가지 않으면 우연도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부담 없이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우연은 여유 속에서 온다. 비싼 입장료나 최소 주문, 눈치 보는 분위기는 우연을 죽인다. 한 시간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처럼, 오래 대화할 수 있는 식탁처럼

셋째,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우연은 통제되지 않는 곳에서 온다. 오늘 어떤 책을 읽을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누가 올지 모르는 공간. 원하면 혼자 있을 수 있고, 필요하면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공간.

혼자가 편해진 이유

최근 젊은이들은 점점 혼자가 편해진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아니면 우연한 만남이 일어날 공간이 사라져서, 만남이 너무 '계획적'이 되어버린 걸까? 회사 직원들이 비싼 돈을 내고 공간을 빌려 친구를 만나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동네 카페에 부담 없이 앉아 우연히 긴 대화를 나눌 공간이 없으니, 시간과 장소를 예약하고 돈을 내고 '계획된 만남'을 만드는 것이다.


우연(hap)이 사라지니, 행복(happy)도 사라진다.

이건 공간의 실패다. 도시의 실패다. 나는 건축가이자 공간 컨설턴트로서 이 문제를 풀고 싶다. 거창한 문화센터나 랜드마크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동선 안에서 우연한 좋은 일들이 자주 일어날 수 있는 공간들을.


행복은 설계될 수 있다

서은국 교수는 행복이 유전적 요인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유전은 바꿀 수 없지만, 환경은 바꿀 수 있다. 그리고 환경의 핵심은 공간이다. 나는 믿는다. 행복은 직접 설계할 수 없지만, 행복이 일어날(happen) 조건은 설계할 수 있다고. 새벽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처럼, 가족이 매일 모이는 식탁처럼, 직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카페처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회사처럼. 이런 공간들이 집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는 도시 곳곳에, 일상의 동선 안에,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거리에 존재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주 들르고, 부담 없이 머물며, 우연한 만남과 우연한 대화와 우연한 발견이 일어나는 공간들. 그것이 진정한 지속가능한 도시다. 경제적 지속가능성이나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넘어선, 우연의 지속가능성, 행복의 지속가능성.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우연이 자주 일어나는 평범한 공간들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행복

오늘 당신에게 일어난(happened) 작은 좋은 일은 무엇이었나?

그 우연은 어떤 공간에서 일어났나?
당신의 일상에는 그런 우연이 일어날 공간이 몇 개나 있나?

그리고

우리 도시는 당신에게 충분한 우연을 제공하고 있나?

건축가로서, 공간 컨설턴트로서 나는 오늘도 그런 공간을 설계한다. 사람들이 자주 들르고, 부담 없이 머물며, 우연한 만남과 우연한 대화가 일어나는 공간들을.

왜냐하면 나는 믿으니까.

행복(happy)의 어원이 말하듯, 행복은 우연히 일어나는(happen) 것이고, 그 우연은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공간이 바뀌면, 우연이 늘어나고, 행복이 늘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도시다.


작가는 지속가능한, 오래 남을 공간을 고민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건축가입니다.

건축가의 건축과 공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litt.ly/geeum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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