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연휴동안, 돌아보니 마음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잔 아침, 읽었던 책들, 가족과 함께 나눈 밥상, 그리고 그중 하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극장에서 보았던 〈왕과 사는 남자〉.
연휴가 끝나기 전에 이 영화에서 받은 인사이트를 꼭 한번 적어두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흐려지고, 생각은 일상에 묻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지금, 연휴의 마지막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이 글을 쓴다.
연휴 전날이었다. 마감 기한이 촉박한 프로젝트를 겨우 제출하고, 긴 숨을 내쉬며 가족과 함께 극장으로 향했다. 연휴 첫날이 주는 그 해방감. 〈왕과 사는 남자〉를 선택한 건 반쯤은 이유 없는 끌림이었고, 반쯤은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나는 예상보다 훨씬 깊은 곳을 건드리는 무언가를 만났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은 다르다. 어떤 이는 유해진의 연기에 웃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역사의 비극 앞에서 분노했을 것이다. 이 글은 그 수많은 시선 중 하나일 뿐이다. 건축가이면서, 이제 막 대학생이 되는 두 딸아이의 아빠이면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한 명의 어른으로서, 지극히 주관적인 눈으로 이 영화를 되새겨 보았다.
단종이 유배지를 떠나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1457년의 이야기다. 역사책에도 있고, 교과서에도 있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산골 유배지에서 열일곱 살에 생을 마감한 어린 왕. 그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극장은 가득 찼고, 개봉 14일 만에 3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울었다. 설날 당일 하루에만 53만 명이 극장을 찾았다. 코로나19 이후 설 연휴 일일 최다 관객 수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아는 결말을 향해 걸어가면서, 왜 가슴이 이렇게 조여드는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울고 있는 것은 '과거' 때문이 아니라 '오늘' 때문이다.
우리는 단종의 눈물을 보며 그의 이야기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어떤 가치를 함께 슬퍼하고 있다. 567년 전의 청령포가 이렇게 생생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박지훈이라는 배우를 잘 몰랐다.
워너원 출신의 아이돌.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그가 눈물을 참는 장면에서, 나는 뭔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약한 척하지 않는다는 것. 불쌍하게 보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을 잃은 왕이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그 눈빛. 화면 앞에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요즘 이런 말이 유행처럼 돈다고 한다.
"내 마음속의 저장."
아이돌이었던 배우 박지훈이 만든 유행어는,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 전혀 다른 무게로 되살아났다. 기억하겠다는 것. 잊지 않겠다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는 기억이라는 것. 사람들은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을 보며, 그 말을 단종의 마음처럼 가슴에 새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돈다.
"단종이 환생해서 박지훈이 됐다."
처음엔 팬들의 뜨거운 애정 표현인 줄 알았다. 그런데 567년 전 억울하게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어린 왕이 생전에 받지 못했던 사랑과 애도를, 이제야 2026년 극장에서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훈이라는 배우의 몸을 빌려.
장항준 감독은 단종을 '비운의 희생자'로 그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이 사람은 고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을 잃었다. 왕위도 빼앗겼다. 유배지의 좁은 방에 갇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 무엇을 옳다고 생각하는지를 끝내 잃지 않는다.
나는 공간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사람으로서 요즘 이런 장면들을 자주 본다.
설계 미팅에서 AI가 만들어준 렌더링 이미지를 보여주면, 건축가들은 말이 없어진다. 화면은 완벽하다. 그런데 그 화면 앞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간다.
'내가 이것보다 잘할 수 있나?'
비단 건축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자신이 오래 갈고 닦아온 것들이 기계의 연산 앞에서 흔들리는 경험. 그건 단순히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가치의 문제가 된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던 날도 비슷한 감각이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가 지키려 했던 것들이 더 강한 힘 앞에서 무너지는 감각.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잃지 않았다.
나는 이 영화가 바로 그 질문에 조용히 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무엇을 빼앗겨도 여전히 너인가?"
나는 공간을 보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의 배경지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청령포. 강원도 영월의 아주 작은 땅. 삼면이 강으로 막히고 한쪽은 절벽인, 그야말로 세상과 단절된 장소. 그런데 바로 그 고립된 공간에서 이 영화의 핵심이 태어난다. 촌장 엄흥도(유해진 역)는 처음엔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마을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유치하고 이득을 챙기려 했던 철저한 생활인.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의 인간다움 앞에서.
이것이 내가 공간 기획에서 오래 믿어온 것과 정확히 맞닿는다.
공간은 관계를 만들고, 관계는 사람을 바꾼다.
청령포는 감옥이었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정직한 인간적 만남이 가능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권력도 없고, 체면도 없고, 계급도 결국 의미를 잃는 자리.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그냥 인간으로 만났다. 어쩌면 우리가 이 영화 앞에서 함께 울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극장이라는 어두운 공간 안에서, 우리도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인간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가장 로컬한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으로 울리는 이유
개봉 14일 만에 300만 돌파. N차 관람 열풍. 단종 장릉에 추모객 줄.
1457년 영월 청령포라는 지극히 특정한 장소의, 지극히 특정한 역사의 이야기가 왜 2026년의 사람들 가슴을 이렇게 두드리는가. 나는 늘 이렇게 말해왔다. "가장 로컬한 것이 가장 글로벌하다." 지역 고유의 이야기, 그 장소만의 서사가 희석되지 않고 살아있을 때, 오히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울림이 된다고.
이 영화가 딱 그것이다. 시대와 장소를 특정했기 때문에 오히려 시대를 초월했다. 567년의 시간을 건너 단종의 눈물이 지금 우리 극장에 살아 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슬퍼하고, 그를 처음 잃는 사람처럼 운다.
장항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잊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효율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 데이터로 측정되지 않는 가치들. 강한 것이 곧 옳은 것이 되어버리는 논리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젓는 사람들.
기계는 최적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한다. 슬퍼한다. 애도한다. 불합리한 것에 분노한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을 지키려 한다.
단종의 눈물 앞에서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사실 지금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끝내 지키려 했던 것. 엄흥도가 모든 것을 잃을 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것. 단종역의 박지훈이 온몸으로 표현해낸 것. 그리고 지금 3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극장에서 함께 기억하고 있는 것.
그것은 모두 같은 이야기다.
인간은 고귀하다. 그리고 그 고귀함은, 잊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는 지속가능한, 오래 남을 공간을 고민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건축가입니다.
건축가의 건축과 공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