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아직 강백호, 서태웅이다

너무 철들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들에게

by 건축가 김성훈
슬램덩크 01.jpg 슬램덩크의 여러 명장면 중 하나인 주인공 강백호와 서태웅이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수세월이 지나서 다시 그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소년이 되었다.

오늘 나는 잠시 소년으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소년이었던 내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172cm의 청년이 건네준 신호

시작은 뉴스 한 줄이었다.

키 172cm의 일본인 농구 선수가 NBA에 진출한다는 소식. 그 선수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송태섭이었다. 슬램덩크 속 그 작은 포인트가드, 빠르고 영리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던 그 얼굴이 거기 있었다. 작은 키로 NBA 코트를 누비겠다는 그 소식이 어딘가 슬램덩크의 한 장면 같았다.

그때부터 마음 한켠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몇 년 전 가족들과 함깨 본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 다시 봐야지. 그 메모가 오늘에야 실행됐다. 넷플릭스를 켜고 앉았다. 특별한 준비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오늘이 그날이었다.

카와무라 유키.jpg 현실판 송태섭, 172cm 청년의 NBA진출. 응원한다.

소년챔프가 나오던 날

슬램덩크 소년챔프.jpeg 돌아가면서 친구들끼리 돌려보던 소년챔프, 난 오늘 그때의 소년이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슬램덩크를 처음 만난 건.

인터넷도 없던 시절, 일주일에 한 번 소년챔프가 나오는 날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책가방도 제대로 내려놓지 않고 첫 페이지부터 넘기던 그 손. 강백호가 처음 농구공을 잡던 장면, 서태웅이 차갑게 등을 돌리던 장면들이 일주일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슬램덩크는 계속 이어졌다. 산왕전은 대학교 1, 2학년의 나와 함께였다. 슬램덩크는 내 청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통한 만화였다. 고등학생의 나도, 대학생의 나도, 모두 북산 유니폼을 입은 소년들과 함께 자랐다.

그 시절엔 농구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스포츠였다. 농구대잔치가 열리면 체육관이 가득 찼고, NBA는 꿈의 무대였다. 슬램덩크는 그 모든 열기 위에 올라타 우리의 심장을 두드렸다.


강백호와 서태웅, 나의 영원한 고1

사실 나는 북산의 다섯 명을 모두 좋아했다.

묵묵히 팀을 이끄는 채치수, 누구보다 농구를 사랑했던 정대만, 작은 몸으로 코트 전체를 읽던 송태섭.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사랑스러웠다. 북산은 다섯 명이 모두 주인공인 팀이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더 깊이 가는 건, 결국 강백호와 서태웅이다.

오늘 다시 보면서 그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강백호도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서태웅도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리고 나도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는 같은 시간 위에 서 있었다. 같은 나이로, 같은 설렘으로, 같은 혼란 속에서 처음 만났다. 그런데 세월이 흘렀다. 나는 대학을 가고, 사회에 나가고, 어느새 대학생 딸들을 둔 중년이 되었다. 그러나 강백호와 서태웅은 여전히 고등학교 1학년이다. 만화 속 그들은 한 살도 먹지 않았다. 여전히 그 코트 위에서, 그 눈빛으로, 그 전부를 다해 뛰고 있다.

그래서인 것 같다.

그들이 나의 청춘을 고스란히 붙잡아두고 있다.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들이 있는 한 나의 고1은 사라지지 않는다. 강백호의 무모한 자신감도, 서태웅의 차갑고 뜨거운 눈빛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추억이 아니다. 영원히 늙지 않는 나의 청춘이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P001777840.jpg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X세대를 겪은 그 시절의 소년, 청년들이 이제는 중년이 되어서 세상을 상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라고 한다.

요즘 우리 세대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드라마에서는 시대에 뒤처진 중년의 고독을 다루고, MZ 세대는 우리를 '영포티'니 '꼰대'니 부른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자꾸 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 그 불안을 모르는 척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다시 생각했다.

우리, 정말 열심히 살았다. 외환위기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았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그 혼란스러운 시절을 버텼다. 누군가 손 내밀어 길을 알려주지 않아도 그냥 걷고 또 걸었다. 그러면서도 슬램덩크를 보면 주먹을 쥐는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그게 부끄러운 일인가.

나는 오늘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철들지 말자

오늘 화면 속 강백호가 마지막 힘을 다해 리바운드를 잡는 장면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혼자 노트북 작은 화면을 보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어린 시절 소년챔프를 손에 들고 첫 페이지를 넘기던 그 심장박동이 그대로였다.

그 심장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냥 잠시 바빴던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때의 이야기가 있다. 가슴 두근거리게 했던 무언가가. 그것이 만화였든, 영화였든, 한 선수였든, 한 노래였든. 그 두근거림은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안에 살아있다. 우리가 허락만 하면.


우리는 아직 강백호이고, 서태웅이다

회의실에서는 차분한 서태웅이고, 슬램덩크를 보면서는 주먹을 쥐는 강백호인 우리.

딸아이들에게 "아빠도 이런 거 좋아했어"라고 말하면서 눈가가 뜨거워지는 우리.

그 모든 모습이 다 진짜 우리다.

강백호와 서태웅은 오늘도 고1이다. 그들이 고1인 한, 우리 안의 그 소년도 고1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 코트 위에서 전부를 다하던 그 마음만큼은 아직 그대로다.

너무 철들지 말자. 마음이 뛰는 것들을 향해 여전히 달려가도 된다.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꺼내봐도 된다. 두근거리는 마음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이니까.

오늘도 어딘가에서 혼자 화면 앞에 앉아 주먹을 쥔 당신에게.

우리들은 아직 강백호이고, 서태웅이다.


작가는 지속가능한, 오래 남을 공간을 고민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건축가입니다.

건축가의 건축과 공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litt.ly/geeum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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